소설리스트

천마님 안마하신다-86화 (86/286)

< 천마님 안마하신다 86화 >

“그럼 바로 물어보지, 어떻게 물어보냐?”

“괜히 배려한답시고 쓸 데 없이 빙빙 돌려서 물어보는 사람들이 많잖아. 너도 그러지 않았냐? 슬럼프다 뭐다 했을 때.”

확실히 본인도 겪어본 적이 있는 일이다. 최태준도 다시 폼이 돌아오기 전까지, 만나는 사람마다 비슷한 이야기를 한참 에둘러서 꺼냈던 것이다.

“이 친구··· 많이 힘든가보구만.”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꽤 예민한 반응이다.

특히 강주완은 예전부터 성격 좋고 대인관계가 좋기로 유명했던 녀석이라, 최태준이 조금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만큼 정신적으로 몰려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렇지, 뭐. 힘들 수밖에 없지 않겠냐.”

강주완은 씁쓸한 표정으로 빈 맥주잔을 채우다, 깊은 한숨을 푸욱 내쉬면서 말했다.

평소 기자들과 팬들의 앞에서는 괜찮은 척 별 일 아닌 척 연기를 했지만, 오랜 친구, 특히 종목은 다르더라도 같은 프로 스포츠선수 앞에 있으니 탄회한 심정이 튀어나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축구는 발과 다리로 하는 운동이다. 설령 골키퍼라고 해도 발을 제대로 쓰지 못한다면 제 역할을 다할 수가 없다.

“공을 아무리 차도 예전 느낌이 안 돌아오더라고.”

헌데 그 발을 제대로 쓸 수가 없게 되었으니.

축구선수에게는 이것만큼 치명적인 부상도 없다.

아예 못 뛰거나 움직일 수 없는 정도는 아니지만, 공을 몰거나 슛을 때릴 때 발을 타고 전해지는 그 미묘한 감각이, 좀처럼 느껴지질 않았다.

단순한 느낌만이 아니라 실제 성적도 처참. 그저 경기에 출전했을 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정기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훈련 데이터만 봐도 실력이 확 떨어진 것이 보였다.

취미로 축구를 즐긴다면야 아무런 문제도 없는 수준이지만, 그는 다른 어중간한 곳도 아니고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서 활동하는 프로선수다.

전 세계의 정점 급 선수들이 모이는 무대.

선수 한 명의 사소한 실수나 컨디션 난조만으로도 경기 결과가 확 뒤집어질 수 있는 곳인데, 부상으로 감각 자체가 둔해져버린 선수가 나설 자리가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경기 몇 번은 나왔잖아. 감독님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거 아니냐?”

“우리 감독님··· 참 고마우신 분이지.”

에버튼의 앨버트 감독.

선수가 어디서 왔건, 어떤 사람이었건 간에 되도록이면 기회를 먼저 주고 나서 판단하는 스타일의 감독이다.

덕분에 강주완은 예상보다 빠르게 팀의 주력으로 뛸 수 있었고, 심지어 부상 이후에도 경기에 나갈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다만 그때의 결과가 좋지 않아서 문제였을 뿐.

[강. 당분간은 고국으로 돌아가 회복에 전념해라. 그리고 스스로 준비가 됐다고 생각되면 그때 다시 돌아와라. 일단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앨버트 감독에게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이다.

그가 말하는 준비는 중의적인 의미였다.

몸을 회복하고 다시 복귀를 할 준비, 혹은 팀을 그만두고 나갈 마음의 준비.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는 뜻이었으니까.

“···뭐야. 고마운 사람 맞냐?”

“일단은 그렇지. 오랜 회복기간을 기다려주기도 했고··· 이번에도 어쨌거나, 마지막 기회를 한 번 더 주겠다는 거니까.”

이야기를 전해들은 최태준이 의아한 목소리로 되묻자, 강주완이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프로의 세계는 냉정하다. 본인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 건, 본인의 실력뿐이다. 자기 역할도 제대로 못하는 선수가 있을 자리 같은 건 없다.

시즌이 끝나기 전에, 적어도 구단과 재계약하는 시기까지는 회복을 마치지 않으면··· 강주완의 프리미어 리그 경력은 사실상 거기서 끝인 것이다.

“생각해둔 계획은 있고?”

“···병원에서는 정 그러면 수술을 한 번 해보자고 하더라.”

계획이 있는 것치고는 꽤 어두운 강주완의 목소리에, 최태준이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렇게 내키진 않는 수술인가보네.”

“원래는 병원에서도 좀 더 경과를 지켜보자고 했었던 수술이거든. 수술을 한다고 해도 본인의 원래 인대랑은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면서.”

부상당한 발목의 인대를 교체하는 수술.

허나 몸에 칼을 대는 수술의 특성상, 수술을 받고 나면 원래의 상태로는 다시 돌이킬 수가 없게 된다.

일단 강주완의 발목 상태가 심각하거나 일상생활이 힘들어질 정도는 아니었고, 오히려 수술 때문에 인대가 교체되면서 지금보다 발의 감각이 더 이상한 쪽으로 틀어질 가능성도 있었다.

그렇기에, 병원에서도 원래는 재활훈련을 하면서 좀 더 경과를 지켜보자는 입장이었다.

다만 거기에 얼마나 시간이 더 걸릴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을 뿐. 이미 경력이 끊기고 선수활동이 끝났을 때 회복되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렇기에 강주완도 원래는 수술을 받지 않겠다는 생각이었지만, 지금에 와선 아무래도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긴, 수술은 좀 내키지 않을 수밖에 없지.”

칼을 대는 시점에서, 부작용이 아예 없는 수술 같은 건 없다. 더군다나 몸으로 먹고 사는 프로 스포츠선수들에겐 약간의 부작용도 치명적일 수 있다.

말하자면 선수생활을 걸고 도박에 나서는 기분이랄까. 실제로 큰맘 먹고 수술을 받았음에도 폼이 돌아오지 않아 은퇴한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으니까.

“으음···”

최태준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잔에 든 맥주를 한 번에 비워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그의 고민은 그리 길지 않았다.

“야, 주완아.”

“뭔데.”

“너 다음 주 금요일에 시간 좀 되냐?”

“시즌 중에 귀국했는데 일정이 있겠냐?”

강주완이 약간 자조적인 뉘앙스가 섞여있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럼 그때 서울이나 갔다 와라.”

“서울? 서울은 왜 갑자기. 뭘 시킬라고.”

미심쩍어하는 목소리에, 최태준은 잠시 ‘그냥 없던 일로 할까’하는 고민을 떠올렸다. 그로서는 나름 큰마음 먹고 결심한 건데, 정작 받게 될 사람의 태도가 괘씸했던 탓이다.

“가서 안마나 좀 받고 오라고, 새끼야. 내가 언제 너한테 안 좋은 일 시킨 적 있냐?”

“따져보면 몇 번은 있지 않겠냐? 그보다··· 갑자기 웬 안마? 굳이 서울까지 가서 받을 이유가 있나?”

지금 두 사람이 앉아있는 곳은 수원.

서울까지 가는 게 그리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안마 한 번 받으려고 갈만한 거리는 또 아니었다.

“야, 받고 나면 이야기가 달라질 걸? 나에 대한 고마움이 샘솟을 거다. 그리고 어쩌면···”

“어쩌면?”

네 발목에도 효과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말이 목구멍까지 넘어왔지만, 최태준은 겨우 삼켜냈다. 아무리 강 선생님이라고 해도 뭐든 다 할 수 있는 건 아닐 테니까.

괜히 말을 꺼냈다가 선생님도 곤란해질 수 있고, 무엇보다 이 친구가 괜한 기대를 품게 만들었다가 실망하게 만드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어쩌면, 뭔데. 왜 말을 안 해.”

“거기 단골이 될 수도 있을 거라고, 자식아.”

최태준은 어색한 목소리로 말을 돌렸다. 강주완은 어깨를 으쓱이며, 맥주잔을 쥔 채로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됐다. 보아하니 되게 가기 힘든 거 나한테 양보하는 거 같은데, 너나 받고 와. 난 한 것도 없는데 무슨 놈의 안마냐.”

자격이 없다, 자격이. 강주완은 자조하듯 냉소를 머금은 채 중얼거렸다. 그러자, 최태준이 보기 드문 정색을 하면서 말했다.

“네 말대로 큰마음 먹고 양보하는 거니까, 그냥 순순히 좀 가라. 응? 지금 딱 결정해.”

“그, 그래. 알았어. 뭘 그렇게 정색을 하냐? 꼭 갈게. 가면 되잖아.”

학창시절에도 좀처럼 화내는 일이 없었던 최태준의 격한 반응에, 강주완은 자기도 모르게 당황한 목소리를 내며 진정하라는 손짓을 했다.

* * *

강태한이 라이너 호텔의 총지배인, 곽상영과 서비스 제휴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 뒤, 해당 사안은 본격적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럼, 여기까진 그때 말씀드렸던 내용입니다.”

그로부터 사흘의 시간이 지난 뒤.

인테리어 공사는 물론 정리까지 끝난 호텔의 카페에서, 두 사람은 테이블 위의 서류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앉아 있었다.

강태한은 오른손으로 턱을 괸 채로, 곽상영이 손가락으로 짚은 부분을 천천히 소리 내어 읽었다.

“음. 호텔 측에서는 객실 내 팜플렛에 안마원의 홍보내용을 게시한다. 그리고 안마원은 호텔 이용객에 대해 일반코스에 한해 할인혜택을 부여한다.”

“맞습니다. 딱 지난 번 말씀드렸던 내용이지요?”

그 말에 강태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아래에는 강태한이 따로 이야기를 꺼냈던 ‘안마원 고객에 대한 사우나 할인혜택’ 또한 따로 언급되어 있었다.

“좋네요. 총지배인님과 직접 이야기를 나눠서 그런지, 일 진행이 빠른 느낌입니다.”

“하하, 뭘요. 제 밑에 있는 직원들이 워낙 유능하고, 또 원장님이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주신 덕분이죠.”

강태한의 말에 곽상영이 넉살 좋은 웃음을 터트리며 답했다. 겸손하게 말하면서도 자연스레 주변 사람들과 앞에 있는 상대방을 치켜세우는 것이, 호텔에서 구른 경력이 어렴풋이 느껴지는 화술이었다.

“그건 그렇고, 개업 준비는 좀 어떠신가요?”

“아, 네.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저번에 좀 소란을 떤 보람이 있는지, 이젠 그냥 개업만 기다리는 수준이죠, 뭐.”

덕분에 각 부서의 지배인들이나 팀장급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직원들은 휴가를 내보낸 상황이었다. 오픈에 앞서 재충전을 해오라는 의미. 그래도 상관없을 정도로 순조로운 상황이었다.

“사우나랑 피트니스 센터도 같이 오픈이고··· 그러면 이제, 본격적으로 상권이 돌아가는 셈이죠.”

곽상영은 깍지 낀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으며 담백한 미소를 지었다. 오픈을 앞둔 상황임에도 딱히 긴장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의 자신감이 느껴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제 본론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이미 다 끝난 상황.

아직 식지 않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던 중, 문득 용건이 떠오른 강태한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혹시, 호텔에 방 좀 남습니까?”

“저희 호텔 말입니까? 언제를 말씀하시는 건지.”

“다음 주 수요일입니다.”

그때면 오픈하고 나흘이 지났을 때다.

“평일이야 꽤 널널하죠. 호텔에도 오픈빨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오픈하기도 전에 예약이 꽉 차는 건, 원장님 정도밖에 없을 겁니다.”

곽상영이 손에 잔을 쥔 채로 어깨를 으쓱였다.

아직 문을 연 가게도 얼마 없는 빌딩에 손님들이 꾸준히 들락날락거리던 모습은, 곽상영에게 꽤 인상 깊은 장면이었다.

“그럼, 혹시 전망 좋은 자리로 예약하나 잡아주실 수 있겠습니까?”

“전망 좋은 자리라··· 제일 위층은 전부 나갔지만, 18층에 방이 좀 있을 겁니다. 준비해드릴까요?”

“예.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강태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곽상영은 안쪽 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더니, 거기에 강태한이 부탁한 내용을 메모했다.

“그건 그렇고, 어느 분이랑 묵으실 예정이십니까? 필요하시다면 소소한 이벤트도 준비해드릴 수 있습니다. 욕조에 장미 꽃잎을 띄운다든지.”

“아, 그런 건 괜찮습니다. 아버지에게 호강 한 번 시켜드리고 싶었을 뿐이라서.”

“···아하.”

싱글거리던 곽상영은 강태한의 말에 작은 탄성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곧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담았다.

“효자시군요.”

“별 말씀을.”

“그럼 원장님의 효심을 응원하는 의미로··· 좋은 전통주 한 병, 따로 준비해놓도록 하지요.”

그러면서 흐뭇한 표정으로 해당 내용을 메모지에 추가하는 곽상영이었다.

* * *

그리고 다음 주 수요일.

“이야아! 건물 한 번 높다!”

“태한이 녀석, 성공했다더니 진짜 성공했네!”

라이너 빌딩 앞에 멈춰선 택시의 뒷좌석에서, 두 아저씨가 걸어 나오더니 빌딩을 올려다보며 연신 감탄을 내뱉었다.

“아이, 뭘 그렇게 주접을 떨고 있어. 쪽팔리게들.”

뒤이어 강태한의 아버지, 강호연이 조수석에서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선글라스에다 양복까지 차려입은 것이 그 또한 꽤 들떠있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강 씨, 주접 안 떨게 생겼어? 이 커다란 빌딩이 태한이 꺼라는 거잖아!”

“우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내가.”

양옆에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는 김씨와 최씨.

“···누가 그래? 이게 다 태한이 꺼라고.”

두 사람의 터무니없는 말에, 강호연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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