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마님 안마하신다 85화 >
“미국? 그럼 엄청 좋은 일 아니야?”
“뭐 나쁜 일은 아니긴 한데··· 본선에 바로 나가는 건 아니고, 예선에 나가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에요.”
머쓱해하며 말하지만, 채은비의 표정은 밝았다.
원래는 허리 때문에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프로의 꿈. 그럼에도 완전히 포기하질 못해 미련만 남아있었는데, 지금은 한 명의 프로로서 대회에서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정말 꿈만 같은 일이었다.
“허리 상태도 그리 나쁘지 않네. 많이 좋아졌는데?”
“그럼요. 오빠가 알려준 스트레칭도 매일··· 윽?!”
느슨하게 힘을 풀고 있던 와중, 갑작스레 강태한의 손이 그녀의 양쪽 허리를 지그시 눌렀다. 그리 세게 누르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마치 전기가 통하는 듯한 저릿한 느낌이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그래도 오빠 안마는 여전히 자극적이네요.”
“뭐, 여전히 후유증이 남아있는 곳도 있고··· 몸 상태가 좋으면, 그만큼 또 강도를 올릴 수 있으니까.”
안마란 원래 상대에 맞춰서 바꿔가는 것.
건강해진만큼 그녀의 몸이 감당할 수 있는 힘도 더욱 커지게 되고, 강태한은 거기에 맞춰 기준을 좀 더 끌어올렸을 뿐이다.
그는 그녀의 허리부터 시작해서, 척추를 타고 올라가며 등 전체를 골고루 지압하기 시작했다.
허리 인근에서부터 내부의 혈도들을 자극하고 순환을 활성화시키는 작업. 그 과정에서 피로가 쌓여있던 근육들도 자연스럽게 풀어지고, 탁기들이 빠져나간 자리에는 새로운 생기가 흘러들어간다.
“으흐으··· 흐극.”
강태한의 손길을 따라 등에서부터 퍼져나가는 묘한 감각. 마치 막혀있던 혈관들이 열리고, 외부에서부터 맑은 기운이 흘러들어오는 그런 느낌이 든다.
그 모든 걸 한 마디로 딱, 끊어 설명하자면···
시원하다. 허리에서부터 말초신경까지 척추를 타고 올라오는 그 시원함에, 꾹 다물어진 채은비의 입에선 희미한 신음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아니, 뭔가··· 윽. 지난번이랑 느낌이 약간 다른 것 같기도 한데요?”
잘은 모르겠지만, 지난번에 안마를 받았을 때와는 좀 달라진 느낌. 단순히 몸이 풀어지고 피로가 해소되는 느낌을 떠나서··· 뭐라 표현하긴 애매하지만, 외부에서부터 기운이 흘러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네가 감각이 좋긴 하구나.”
채은비가 넌지시 그걸 언급하자, 강태한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지금 손끝에 생기를 실어 그녀의 혈자리 곳곳에 힘을 불어넣어주는 중이었다.
혈도를 좀 더 강화시키고, 고여 있는 탁기들을 끄집어내는 동시에 주변 근육들에 활력을 실어주기 위함.
불어넣은 생기들은 다시 회수하긴 한다만, 극히 일부긴 해도 그 과정에서 일정량은 소진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되도록 사용하지 않는 방식이었지만.
“미국까지 간다니까, 따로 신경 좀 써주는 중이지.”
강태한은 그녀의 명문(命門)혈을 지그시 누르며 장난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그와 동시에, 채은비는 실시간으로 본인의 몸 상태가 확연히 좋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생기가 넘쳐흐른다고 할까.
게다가 등에 올라온 강태한의 손을 기준으로, 따스한 온수가 흘러들어오는 듯한 감각이··· 온몸을 안쪽에서부터 덥히면서 느슨하게 풀어지게 만드는, 묘한 편안함을 가져다주고 있었다.
“···제가 미국에서 성적이 좀 잘 나오면.”
그 편안한 감각에 노곤해져있는 상태에서, 채은비는 한껏 풀어진 몽롱한 목소리로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오빠 이야기도 엄청 할 거에요. 인터뷰에서도 말하고··· 진짜 장난 아닌 K-마사지가 있다고. 나도 그 사람 덕분에 다시 꿈을 찾았다고···”
눈은 반쯤 감겨있고 혀도 살짝 풀려있는 것이, 이미 한 발은 꿈나라로 건너가 있는 상황이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강태한은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그러면 미국 가서 잘해야 되니까, 이번에 안마 좀 제대로 해줘야겠네.”
“이미 제대로··· 해주고 있···”
크어··· 그걸 마지막으로, 그녀는 완전히 눈을 감은 채로 코를 골기 시작했다.
채은비가 따로 내색을 한 적은 없었지만, 그녀는 쉬는 동안 잃어버린 감과 운동신경을 되찾기 위해 굉장히 빡빡한 재활운동과 훈련 일정을 소화해냈다.
‘결과가 나왔다는 건, 그만큼 노력을 했다는 거지.’
거의 복귀와 동시에 이뤄낸 프로 데뷔, 그리고 대회에서의 준우승. 그 성과들은 그녀 나름의 노력이 있었기에 이뤄낼 수 있었던 것들이고, 그 노력의 흔적들은 몸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지금 이렇게 곯아떨어진 것도 그 흔적의 일부라 할 수 있는 부분. 강태한은 그런 그녀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마저 안마를 이어가기 시작했다.
* * *
다음 주 월요일.
“태한 씨! 이것 좀 봐 봐요.”
“뭔데요?”
유세아의 말에 강태한은 천천히 걸어와 슬쩍 고개를 내밀었다.
“이거 어때요? 휴대용 커피머신이래요!”
유세아는 물통만한 크기의 플라스틱 통을 집어 들고는 해맑은 표정으로 말했다. 마치 장난감 가게에서 갖고 싶은 물건을 찾은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흐음··· 꽤 좋아 보이네요.”
한편, 같은 물건을 마주하는 강태한의 표정은 사뭇 달랐다. 마치 먼 길을 떠나며 장비를 살피는 모험가의 눈길과도 같다고 할까.
“무게도 적당해보이고, 사용하기도 편해 보이고.”
커피가루를 따로 챙겨야하긴 하지만, 커피가루와 끓는 물만 있으면 어디서든 에스프레소를 직접 뽑아 마실 수 있다.
반드시 필요한 필수품은 아니지만, 별다른 수고 없이 소소한 사치를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장비. 그 실용성을 인정하듯 강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괜찮아 보이죠?”
강태한이 인정하는 뉘앙스의 말을 꺼내자, 유세아도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지난번 약속대로 캠핑용품을 보기 위해 백화점에 찾아온 두 사람.
각자 일을 마치고 만난 것인지라 폐점까지 시간이 얼마 안 남아있긴 했지만, 유세아의 표정은 강태한과 만났을 때부터 줄곧 밝았다.
“이건 어때요? 베개도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마냥 들떠있는 듯한 기분!
지난번 캠핑은 챙겨간 텐트도 불량이었고, 갑자기 저녁에 비가 내리는 불상사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녀에겐 너무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서서히 어두워져가는 숲의 풍경. 주위 분위기는 고요한 적막과 함께 차분하게 내려앉고, 텐트 위에서는 빗방울 소리가 톡, 토독 울리고 있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리면 넓은 어깨 위로 보이는 강태한의 옆모습과, 위아래로 포개져있는 두 사람의 손. 손을 통해 서로에게 전해지는 온기.
‘후후후.’
그 당시를 떠올리면, 조금 힘든 일이 있더라도 싱글생글해지는 유세아였다. 서로 조용히 손만 잡고 있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동, 동, 뛰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다음 캠핑에서 같이 쓸 물건들을 고르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때의 기억이 새삼스레 떠오르며 괜히 들뜨는 기분이었다.
“세아 씨, 이쪽으로 와보실래요?”
“뭔데요?”
이번에는 강태한이 그녀를 불렀다. 유세아는 살짝 기대를 품은 얼굴로 강태한에게 다가갔다.
“오늘 이게 필요해서 왔잖아요.”
강태한이 서있는 곳은 다름 아닌 텐트 코너.
지난 번 텐트가 처음부터 찢어져있었던 탓에, 강태한과 같이 한 텐트를 써야했던 유세아였다. 이번에 캠핑용품을 보러온 것도 바로 이 때문.
“아··· 그랬었죠.”
허나 정작 유세아의 표정에는 애매한 기색이 남아있었다. 아쉬움이나, 안타까움 같은, 그런 살짝 부정적인 느낌이 섞인 얼굴이었다.
‘조금 아깝기는 한데···’
당연하게도 텐트 값이 아깝다는 것은 아니다.
그녀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함께 있었던 그 날의 풍경. 운치가 느껴지는 저녁풍경이긴 했지만, 그 풍경이 특별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같은 텐트 안에, 바로 옆에 강태한이 앉아있었기 때문이었다.
텐트가 불량품이었던 것은 결코 의도한 바가 아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대만족이었던 것.
‘하지만 텐트를 새로 사게 되면···’
다시 그렇게 같이 밤을 보낼 수 있을까.
자연스럽게 같이 있을 수 있는 명분이 사라져버리는 꼴은 아닌가. 다소 억지스럽기는 하지만, 유세아의 마음 한 켠에서는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최대한 불량률이 높아 보이는 걸 사야하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가장 저렴한 가격라인 쪽으로 관심을 보이고 있던 와중···
“그래도 좀 아쉽긴 하네요.”
“네?”
강태한이 먼저 넌지시 말을 건넸다.
살짝 바보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탓일까, 유세아는 저도 모르게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때, 같이 한 텐트에서 빗소리 듣고 있는 게 제법 좋았거든요. 운치도 있었고.”
그러자, 강태한이 싱긋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모든 사람이 이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유세아에게는, 순간적으로 숨을 멎게 만들기에 충분한 미소였다.
“크흠, 흠. 그래요?”
덕분에 유세아의 대답은 한 박자 늦었다. 그녀는 잠시 헛기침으로 목을 골랐다.
“그 정도는 상관없죠! 텐트는 따로 써도, 그렇게 같이 시간을 보내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니까요.”
방금 전까지 비슷한 내용을 아쉬움을 느끼고 있었으면서, 그다지 큰일이 아니라는 듯이 말하는 유세아다. 허나 말과 달리 그녀의 입 꼬리는 계속해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태한 씨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나.’
같은 자리에서 함께 본 똑같은 풍경.
그 경험을 강태한도 좋은 기억으로 갖고 있었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기쁘면서도 안심이 되는 일이었다.
‘반응이 참 귀엽다니까.’
한편, 강태한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유세아의 기분을 읽어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무룩해져있었다가, 강태한이 말을 꺼내자 어깨를 피면서 입술을 씰룩이고 있는 모습. 그러면서 귀는 또 점점 빨갛게 물들어가는 것이, 참 알기 쉬운 반응이었다.
* * *
“야, 진짜 오랜만에 보는 거 같다.”
한하 호크스의 최태준.
그는 지금 유명세에 비해 다소 후줄근해 보이는 사복차림으로, 동네 주변의 호프집에 와있었다.
“오랜만이긴 하지, 뭐.”
그리고 먼저 와서 자리에 앉은 채로 손을 흔들고 있는 남자. 그는 다름이 아니라 프리미어 리그에서 큰 활약을 보여줬던 한국 축구계의 떠오르는 샛별, 강주완 선수였다.
“네가 웬일로 연락을 하나 했지. 이 정 없는 놈아.”
“정이 없는 게 아니지. 내가 한국에 없는 걸 어떻게 하냐? 그러면 네가 먼저 연락을 하든가.”
“원래 이런 거는 임마, 더 잘나가는 놈이 먼저 연락을 해줘야하는 거야!”
“새끼, 말은.”
같은 중학교를 나온 두 친구. 게다가 부모님끼리 사이가 가까웠던 탓에 어렸을 적부터 좋건 싫건 붙어 다니는 일이 많았던, 그야말로 절친이라 할 수 있는 사이였다.
“요즘 일은 할 만하냐?”
“나? 시즌 끝난 거 모르냐?”
최태준은 피처에 담긴 맥주를 잔에 따르며 담담한 말투로 대꾸했다.
“그럼, 요즘 일은 할 만했냐?”
“나쁘지 않았지 뭐. 나도, 팀도.”
그러고는 방금 따른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이번 시즌 말에 갑자기 터진 한하 호크스의 활약은, 야구팬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대이변이었다.
시즌 초기 성적이 조금만 더 좋았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2승만 더 챙겼더라면 간만에 포스트시즌에다 한하 호크스의 이름을 올릴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나쁘지 않은 수준이 아니던데?”
“크하아.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쑥스럽잖아~”
방금 마신 맥주의 탄성을 터트리며 최태준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다만 그 이후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으레 이런 말이 나오면, ‘너는 일 좀 할 만하냐?’라는 말로 되묻는 것이 순서지만, 그렇게 물어볼만한 상황이 아니었던 탓이다.
“···그러는 너는, 다친 데는 좀 괜찮고?”
최태준은 안타까운 기색이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모르는 척 둘러가며 물어보는 것보단 이렇게 직접 물어보는 편이 차라리 나았다.
강주완의 부상과 지지부진한 성적에 관한 이야기. 이건 대한민국에서 스포츠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내용이었으니까.
“괜찮으면 지금 여기에 있겠냐.”
그 말에 강주완은 웃음을 터트렸다. 언뜻 보기엔 털털해 보이지만, 그 안에는 깊은 탄식이 묻어나오는 씁쓸한 웃음이었다.
안 그래도 예전부터 문제였던 무릎인대의 상태가 악화되고 있었던 상황. 그런 와중에 경기를 뛰다 왼쪽 발목에 부상까지도 입었다.
상대방 선수의 태클이 발에 정통으로 들어왔는데, 넘어지면서 그대로 발목의 인대가 쭉 늘어나버린 것.
지금은 그나마 일상생활 중에 아무런 지장이 없고, 연습에도 참가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예전의 감각이 좀처럼 돌아오질 않고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바로 물어보니 마음은 편하네.”
강주완은 씁쓸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고는, 잔에 담긴 맥주를 한 번에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