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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 안마하신다-79화 (79/286)

< 천마님 안마하신다 79화 >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일단 지금은 거절해두도록 하겠습니다.”

강태한은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그렇게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나긋했지만, 그 안에는 쉽사리 바뀌지 않을 듯한 단호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렇습니까.”

약간 아쉬움이 남은 표정이기는 했지만, 서경우는 담담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럴 것 같기는 했지.’

강태한이 그의 질문을 예상하고 있었듯, 그 또한 강태한의 대답을 얼추 예상해두고 있었다. 단지 물어보지도 않고 억측을 하는 것보다는 직접 대답을 듣는 쪽이 확실하니까 물어보았을 뿐이다.

“혹시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렇기에 출연 의사에 대해 더 이상 캐물을 생각은 없었지만··· 그것과 호기심은 별개의 문제다.

까놓고 말해 방송에 출연하는 것은 상당히 매력적인 기회다. 일반인들 중에서도 방송에 한 번쯤 출연해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고, 특히 사업과 관련해서는 뒷돈을 찔러줘서라도 나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그걸 긴 고민도 없이 깔끔하게 거절한 이유.

서경우는 그런 강태한의 생각이 궁금했다.

“보시면 아시겠지만, 저희 가게는 아직 개업을 한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습니다.”

강태한은 방금 전과 같이, 나긋하면서도 단호함이 실려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하자면 아직 기틀이 잡히지 않았다는 뜻이죠. 이런 상황에서 방송에 나간다면··· 유명세는 얻을 수 있겠지만, 그만큼 본업에 소홀하게 되는 꼴이 되지 않을까 싶네요.”

강태한에게 사업을 해본 경험은 없다.

하지만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 정도는 어렴풋이 알고 있으며, 주변 인물들의 숱한 흥망성쇠를 지켜보며 간접적으로 느낀 바들이 있다.

무공을 익힐 때는 초식부터 단단하게 쌓아올려야 한다. 기초가 충실하다면 무엇이든 능히 익힐 수 있게 되고, 반대로 기초가 부실하다면 아무리 뛰어난 무공을 익혀도 모양만 흉내 내는 허울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일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기초를 다지고 내실을 가꿔야할 때는 거기에 집중해야한다. 그것들이 나중에 더 큰 걸음을 내딛는 밑바탕이 되어주는 것이니 말이다.

물론 이게 모든 상황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고, 상황이 절박하다면야 기초고 나발이고 할 수 있는 모든 걸 시도해보는 것이 맞다.

다만 지금의 강태한은 그렇게 절박한 상황도 아니었고, 외부에서 유명세를 떨치는 것보다 내실을 다져두는 쪽이 더 중요했을 뿐이다.

“···그렇군요.”

강태한의 말에 서경우는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은 정론이었고, 납득할 수 있는 말이었다.

‘방송출연하고 거짓말처럼 망하는 집도 많지.’

좀 더 정확히는, 아직 그럴 준비도 안 되어있는데 쓸 데 없이 욕심을 부렸거나 어중간한 유명세에 스스로 엎어져버리는 사람이 많았다.

몰려드는 손님을 감당하지 못해 오히려 악평만 늘거나, 장사가 잘 된다고 초심을 잃고서 본업에 소홀히 하다가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경우.

예전에 현장취재 교양프로에서 막내PD로 일할 때 꽤 많이 보아온 사례들이고, 예전부터 계셨던 선배들에게는 그보다 더한 사례들도 수도 없이 들어왔다.

그런 의미에서 강태한의 선택은, 사업적인 부분을 중심으로 놓고 생각했을 때 매우 현명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었다. 서경우 본인으로서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선생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이거, 괜한 말씀을 드려서 시간만 빼앗은 건 아닌가 싶네요.”

“아닙니다. 아까 전에 감사한 말씀이라고 한 건, 빈 말이 아니었으니까요.”

서경우의 말에 강태한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든 간에 선택지가 많다는 건 좋은 일이다. 그리고 방송출연이 꽤 매력적이면서 좀처럼 얻기 힘든 선택지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제안을 건네준 건, 강태한에게 그 자체로 충분히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가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그 말에 서경우 또한 한층 편해진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나중에 가게가 안정되었을 때도 좋으니, 방송에 출연하시는 것 자체는 괜찮으신 건가요?”

“음. 정확한 건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가게 일이 안정된다면야 괜찮을 것 같네요. 물론 이 자리에서 확답은 드릴 수 없고요.”

강태한의 말에 서경우가 손을 저었다.

“그야 물론이죠. 나중에 기획이 잡히거나 관련 아이템이 있으면 섭외전화를 드릴 테니, 부담 없이 선생님의 상황에 맞게 결정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나쁘지 않군요.”

어쨌거나 선택지는 이쪽에 주어진다는 뜻.

서경우가 먼저 손을 내밀었고, 강태한은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이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 셈이었다.

“그럼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오늘 만나서 굉장히 반가웠습니다, 서 PD님.”

“예.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 아!”

강태한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고, 그 뒤를 따라 일어나던 서경우. 그는 뒤늦게 남아있는 용건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터트렸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저, 그게···”

강태한의 말에 서경우는 잠시 망설이며 뜸을 들였다. 이대로 가면 후회할 것 같지만, 그렇다고 가보겠다는 사람을 붙잡을 정도의 용건은 또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혹시, 아까 마셨던 차가 뭔지 알 수 있습니까?”

“···저것 말인가요?”

강태한이 테이블 위에 놓인 찻잔을 가리키며 말했다. 황 실장이 손님에게 내온 차였다. 차의 색깔과 향기로 보아, 아마도 육안과편(六安瓜片).

하지만 강태한의 말에 서경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안마가 끝나고, 잠에서 일어났을 때쯤 나왔던 차요. 왠지 모르게 자꾸 생각이 나네요.”

“아하.”

그제야 강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칡청으로 만들어낸 칡차입니다.”

“칡차··· 그렇군요. 칡차, 칡차.”

서경우는 머릿속에 되새기듯이 두어 차례 같은 단어를 반복했다.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던 모양. 그의 반응에 강태한이 싱긋 웃음을 띠었다.

“아마 몸에 잘 받긴 하셨을 겁니다.”

사람에겐 체질이란 게 있고, 그에 따라 몸에 유난히 잘 맞는 것들이 있기 마련이다.

황 실장에겐 육안과편이 잘 맞았고, 유세아에겐 서호용정이 잘 맞았듯이, 서경우에게는 칡차가 어울리고 몸에도 잘 받는 체질이었다.

그걸 감안하면··· 이렇게 이야기가 끝나가던 와중에 다시 붙잡은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칡청을 어디서 사온 게 아니라 여기서 수제로 만든 것 같은데, 맞습니까?”

“예. 제가 직접 담그고 있죠.”

“혹시 좀 사갈 수 있을까요?”

서경우가 기대를 품은 표정으로 말했다. 강태한과 눈을 마주쳤을 때, 왠지 이런 자신의 모습을 충분히 이해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아뇨. 안 됩니다.”

허나 강태한의 대답은 즉각적인 거절이었다.

이번에도 나긋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였다.

“그렇습니까···”

“···다만.”

눈에 띄게 실망한 기색을 얼굴에 담은 서경우. 허나 바로 다음 순간 강태한이 말을 덧붙였다.

“다음번에 오시면 뭐··· 적당한 크기로 한 통 정도는 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한 건, 지금 구비되어있는 칡청의 양이 그렇게 여유가 없는 탓이었다.

하지만 몇 주 뒤, 아니 다음 주만 되도 여유는 충분해질 터였다. 이번에 산행을 가면 정말 작정하고 칡을 캐올 생각이었으니까.

‘대수로운 일도 아니고··· 관계를 이어가서 그리 나쁠 건 없어 보이니.’

그때가 되면 칡청 한 통 선물하는 것 정도야 별 것도 아니다. 한편, 강태한의 말에 서경우는 곧바로 화색을 지었다.

“정말입니까?”

여기서 나가자마자 다음 예약을 잡아둬야겠다고,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서경우였다.

* * *

“아버지, 저 왔어요.”

“그래, 왔냐! 일단 아무데나 앉아봐라!”

강태한이 문을 열고 들어서자, 주방 안에 있는 강호연이 큰 소리로 외쳤다. 안쪽에서는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뭔가를 볶는 소리가 한참이었다.

“밥 안 먹었지?”

“예. 먹지 말고 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래, 좀 이따 이거 맛 좀 봐봐라.”

수요일에는 가게를 쉬기로 하면서 집에서 보는 일이 많아졌지만, 오늘은 강태한에게 곧장 가게로 오라고 한 강호연이었다.

처음에는 무슨 일인가, 또 아저씨들한테 붙들려있기라도 하신 건가 했지만··· 이렇게 와서 분위기를 보니 곧바로 파악할 수 있었다.

‘메뉴개발이라도 하시나보네.’

방금 전 그냥 먹으라고 하지 않고 굳이 맛 좀 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으니, 사실상 확실하다고 봐도 무방한 수준이었다.

강태한은 어깨를 으쓱이며 주방 가까이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슬쩍 주변을 둘러보니, 새삼 가게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는 게 느껴졌다.

‘활력이 넘치시는구만.’

가게 안에서는 먼지를 찾아보기가 힘들었고, 구석구석 신경 써서 관리를 하신다는 게 느껴졌다. 애당초 쉬는 날에 주방에서 메뉴연구를 하신다는 것 자체가 열정의 표출이 아니겠는가.

무림에서 돌아오고 처음 아버지를 뵈러 이곳에 왔을 때.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전혀 다른 가게라도 해도 무방할 정도로 분위기가 달랐다.

그때는 음울한 기운이 가득하고, 솔직히 말해 영업을 하고 있는지도 확신을 갖기 힘들 정도였으니까.

‘좋군.’

강태한은 슬쩍 주방 안쪽을 들여다보았다.

거기에는 이마에 땀이 맺힌 채로 불 앞에서 큼직한 중식팬을 흔들고 계시는, 그러면서도 입가에 선명한 미소를 띠고 계신 아버지의 모습이 있었다.

그야말로 열정이 느껴지는 광경.

그런 아버지의 모습에, 강태한은 저도 모르게 소박한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보기만 해도 마음 한 켠이 뿌듯해지는 광경이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지?”

“예. 고생 좀 했습니다.”

“허허? 그래, 와줘서 고맙다, 이 녀석아.”

이제는 이 정도 농담은 자연스레 오가는 부자관계다. 강호연은 털털하게 웃으며 들고 온 그릇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짬뽕 괜찮지?”

“네. 요즘 날도 쌀쌀한데 딱 좋죠.”

강태한은 젓가락을 집어 천천히 면과 재료들을 섞었다. 그러는 동안 평소 아버지의 짬뽕에선 느끼지 못했던 차이점이 보였다.

“파기름을 따로 내셨네요.”

“으잉. 그걸 바로 알아낼 수가 있냐?”

“네. 향부터가 다르니까요.”

단순히 파만 먼저 볶았을 뿐인 어설픈 파기름이 아니라, 따로 파맛 자체를 쭉 뽑아낸 제대로 된 파기름이었다. 거기에 적절한 불향까지 어우러지니, 이미 냄새만으로도 칼칼함이 느껴질 정도였다.

후루룩.

강태한은 적당히 면을 집어든 다음, 곧바로 입 안으로 가져갔다. 이윽고, 그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얼굴이 나타났다.

“어떠냐?”

“음. 좋네요.”

냄새로도 느껴졌던 칼칼한 맛과 함께 매콤함이 가볍게 입 안을 달구고, 달궈진 입 안에 불향과 함께 깊은 감칠맛이 곳곳으로 스며든다.

그리고 그 감칠맛 사이에서 어우러지는 면발. 여기서 핵심은 면발에도 국물의 맛이 스며들어 있어 따로 겉돌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그래? 얼마나 좋은데?”

“아버지 예전 짬뽕보다 훨씬 맛있네요.”

강태한은 솔직한 감상을 입에 담았다. 그 말에 강호연은 고개를 끄덕이다, 잠시 갸웃거렸다.

“그럼 예전 짬뽕은 맛이 없었다는 건가?”

“맛이 없진 않았는데, 짜장만은 못했죠.”

“그건··· 사실이지.”

주문표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기에, 강호연은 순순히 인정했다. 짜장이 세 그릇 나갈 때 짬뽕은 한 그릇 나가는 정도였으니까. 그가 이번에 괜히 짬뽕 연구를 시작한 게 아닌 것이다.

“어쨌거나 맛있었다는 거지?”

“네.”

강태한은 단답으로 대답을 마치고 그릇을 들어 국물을 들이켰다. 그 반응에 강호연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후후. 그거 먹으면서 좀 기다려봐라. 생각해놓은 레시피가 두 가지 더 있거든?”

“···예? 이거 하나 아니었어요?”

“그럴 거면 공복으로 오라고도 안했지.”

그 말을 남기고 강호연은 곧장 주방으로 들어갔다. 강태한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다, 저도 모르게 피식, 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거의 뭐 청춘이시네.’

열정이 좀 과한 느낌. 하지만 그게 나쁜 기분은 아니다. 강태한은 다시 불앞에 서서 중식팬을 휘두르는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다, 짬뽕 한 젓가락을 다시 집어 들었다.

* * *

아버지의 짬뽕 시식회는 갑작스레 영감이 떠올랐다는 네 번째 짬뽕까지 맛보고 나서야 끝이 났다.

시범용으로 만든 만큼 양이 좀 적기는 했지만··· 그래도 얼추 삼인분 정도는 먹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럼, 배도 좀 꺼트릴 겸 일 좀 해볼까.”

그로부터 조금 시간이 지난 뒤.

차에서 내린 강태한은 가볍게 기지개를 피고, 스트레칭을 하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앞에 있는 것은 영기가 흘러넘치는 신준호의 영산.

오늘 그는 전날 생각해뒀던 것처럼, 이 차의 뒷좌석을 칡뿌리로 가득 채워갈 심산이었다.

강태한은 열댓 개 되는 큼직한 배낭들 중에서 하나를 메고, 예전에 봐뒀던 칡뿌리가 넘쳐흐르는 지점을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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