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69화>
텐트를 완전하게 치고 난 후.
강태한은 차에 남아있던 짐들을 텐트 안으로 옮겨놓고, 챙겨온 장작과 화로를 꺼내 불을 피울 준비부터 하기 시작했다.
‘잘 곳이 준비됐으면 그 다음은 역시 불이지.'
야외에서는 모닥불 하나 있고 없고의 차이로 야영지의 수준이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음식을 따뜻하게 덥혀 먹을 수도 있을 뿐더러, 해가 진 야간에 체온을 유지하는데 굉장히 유리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그는 생존을 위한 야영지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여가활동으로 캠핑을 나왔을 뿐이지만···
오랜 야지생활경험이 있는 강태한으로선, 그래도 역시 불이 있어야 안정감이 드는 것이다.
“불 피우시게요?”
“네. 조금 이따가 저녁도 먹어야하니, 고기 구울 숯도 준비해둘 겸 미리 피워두려고요.”
강태한이 슬슬 서쪽으로 기울어가는 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직 저녁을 먹기엔 꽤 이른 시간이었지만, 산에서의 저녁은 평소보다 빠르게, 아직 해가 지지 않은 시간에 먹는 편이 좋으니까.
“혹시 도와드릴 거 있어요?”
“음··· 딱히요?”
“그럼, 옆에서 구경해도 돼요?”
강태한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구경할만한 일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렇다고 감출만한 일도 아니었으니.
“저 이런 식으로 불 피우는 거 처음 보거든요.”
유세아는 기대감이 서린 표정으로 빙긋 웃으며, 캠핑용 의자를 가져와 그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다가··· 슬쩍 옆을 쳐다봤다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정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생각보다 가깝잖아.'
별 생각 없이 강태한의 옆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 거리가 생각보다 가까웠던 탓이다.
고개를 돌리면 바로 가까이 강태한의 옆 얼굴이 보였으니까.
물론 굳이 따지자면 운전석과 조수석에 앉아있는, 딱 그 정도의 거리감이긴 했지만.
차에 앉아있는 것과 이렇게 탁 트이고 넓은 공간에서 굳이 바로 옆에 붙어 앉아있는 것은 완전히 느낌이 달랐다.
굳이 말하자면 좋다.
괜스레 입술이 씰룩이고 있을 정도로 좋다.
하지만 그만큼 쑥스러운것도 사실이기에, 그녀의 귀 끝이 살짝 빨갛게 물들어있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에요. 아, 여기 공기가 참 좋네요.”
그러면서 유세아는 괜히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확실히 공기가 맑긴 하네요.”
그녀의 말에 강태한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장작 위에 올려놓은 불쏘시개에 불을 붙였다.
날씨도 꽤 건조하고, 바람도 살살 불어주는 좋은 날씨.
불쏘시개에서 금방 불이 피어오르더니, 옆에 세워둔 마른 장작에도 옮겨 붙으며 모닥불이라 부를만한 불이 완성되었다.
'좋아.'
처음에 불길이 거세게 올라오다 슬슬 안정기에 접어들면, 모닥불 안으로 따로 가져온 숯들을 집어넣는다.
모닥불에 쓴 장작들과는 다르게, 바베큐용으로 사용할 숯들이었다.
'이 정도면··· 한 이십 분 정도면 되려나.'
일련의 과정들을 마치면,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강태한은 모닥불의 세기를 보며 숯이 준비되기까지 필요한 시간을 얼추 가늠했다.
“이제 막 캠핑 시작이지만.”
그렇게 좀 있었을까.
옆에 앉아있던 유세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는 그가 불을 지피는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다가, 지금은 강태한과 마찬가지로 타오르는 모닥불을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되게 좋네요.”
“그래요?”
“네. 도시랑 다르게 조용한 분위기도 좋고, 적당히 불어오는 바람도 산뜻하고, 바람이 불때 들려오는 숲 소리도 좋고, 그리고···.”
조용히 집중한 상태로 불을 피우고 있던 강태한의 모습이 너무 멋있었다, 라고 생각했지만, 차마 입 밖에 내지는 못해 뜸을 들이는 유세아다.
“···모닥불도 좋아요.”
결국 그녀는 하려던 말을 꺼내지 못해 적당히 얼버무렸다.
* * *
“어라. 화로가 두 개에요?”
“네. 저건 모닥불용, 이건 요리용.”
타오르는 숯의 표면에 하얀 재가 서리기 시작하자, 강태한은 다른 화로를 꺼내 숯을 옮겨담았다.
화려한 불꽃은 사그라들었지만, 여전히 잔잔하면서도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숯은 넉넉하게 가져오길 잘했네.'
슬쩍 화로 위로 손을 대보자, 뜨거운 열기가 곧바로 손바닥을 타고 전해졌다.
강태한은 화로에 석쇠를 올리고, 그 위에 곧바로 고기를 올렸다.
치이이이이~
숯불 위에서 익어가는 큼직한 돼지고기 목살.
조금 있다가 고기를 뒤집으니, 숯불 향을 머금은 고기의 향기가 코끝을 자극하는 동시에, 고기에 선명하게 박혀있는 석쇠무늬가 눈을 사로잡았다.
“우와··· 너무 맛있겠는데요?”
슬쩍 화로 위를 쳐다본 유세아가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말했다.
시뻘건 숯불 위에서 익어가는 고기는, 그 자체로 식욕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태한 씨가 고기 잘 굽는 건 알았는데, 야외에서도 잘 구우실 줄은 몰랐네요.”
“뭐.. 어찌 보면 이쪽이 더 전공이라.”
강태한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실내에서 고기를 굽는 것과 이렇게 야외에서 고기를 굽는 데에는 꽤 많은 차이점이 있었지만, 애당초 이런 식으로 밖에서 고기를 구운경험이 더 많은 강태한이다.
“그러는 세아 씨도 요리 좀 하시는 것 같은데.”
그러다 강태한이 유세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그녀는 따로 가져온 버너와 재료들로 냄비밥을 하더니, 지금은 된장찌개를 끊이고 있었다.
차돌박이에다 애호박, 두부를 숭숭 썰어놓고, 거기에다 청양고추까지 썰어 넣어, 고소하면서도 칼칼한 맛이 나는, 냄새만 맡아도 입맛이 도는 차돌된장찌개였다.
“아직 맛도 안 봤으면서.”
“된장찌개가 잘 끓여졌는지 아닌지는 냄새만 맡아도 알 수 있죠, 뭐.”
강태한의 말에 유세아의 입 꼬리가 삐죽 올라왔다.
빈 말인지 진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듣기만 해도 뿌듯해지는 말이었다.
잠시 후, 모닥불 옆에 펴놓은 식탁에는 먹음직스러운 한 상이 차려졌다.
숯불 향을 머금고 있는 야들야들한 고기, 고소하면서도 칼칼한 맛이 냄새로도 느껴지는 차돌 된장찌개, 뜸까지 딱 맞게 들어간 고슬고슬한 냄비밥까지.
여기에 강태한이 따로 챙겨온 김치에 상추까지 올라오니, 캠핑 느낌이 물씬 느껴지면서도 호화로운 한 상이 완성되었다.
“와, 고기가 왜 이렇게 맛있어요?”
목살인데 퍽퍽한 느낌은 조금도 없이 부드럽게 씹히고, 씹을 때마다 배어나오는 육즙에는 숯불향이 입혀져 있어 더욱 더 깊은 감칠맛을 자아낸다.
“찌개도 너무 잘 끓이셨는데요.”
감탄을 터트리며 박수까지 치는 유세아에게, 강태한 또한 미소를 지으며 칭찬 한 마디를 던졌다.
찌개에다 차돌 한 점을 같이 떠서 흰 쌀밥에다 슥슥 비벼 먹으니, 고소하면서도 짭짤한 찌개의 맛이 고슬고슬한 쌀알과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고기랑 같이 밥 한 술, 찌개랑 같이 한 술.
그렇게 먹다보니, 두 사람은 어느새 차려놓았던 상을 깔끔하게 비워냈다.
상 위에는 상추 한 장, 김치 한 쪽마저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 너무 잘 먹었네요.”
“세아 씨 덕분에 잘 먹었습니다.”
“에이, 태한 씨가 고생했죠.”
그녀의 말에 강태한은 싱긋 웃으며, 동그랗게 말려있는 호일을 벗겨냈다.
모닥불을 지필 때 유세아가 따로 챙겨왔다면서 집어넣었던 것들.
호일을 벗겨내자, 그안에서 포슬포슬하게 익은 감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근데, 저 텐트는 어떻게 하죠.”
한편, 유세아는 그때까지 일부러 언급을 피하고 있던 주제를 조심스레 던졌다.
슬슬 해가 저물어가고 있었기에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죠. 아까도 말씀 드렸잖아요.”
강태한은 담담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며, 따로 떼어내 식혀두고 있던 감자조각을 입 안에 넣었다.
“그래도 될까요?”
“세아 씨가 고른 텐트니 아시잖아요. 혼자 쓰기에는 좀 많이 넓어요.”
백화점에서 유세아가 고르고 구매까지 한 텐트.
그녀가 그걸 고른 이유는, 이 텐트가 두명이 들어가도 충분할 정도로 컸기 때문이었다.
'텐트 크기가 문제가 아닌데.'
강태한과 한 텐트를 쓴다는 것!
좋은 일이냐 나쁜 일이냐를 따진다면 좋은일에 속하겠지만, 그래도 이건 예상에도 없었던 일이다.
한 번도 열어본 적 없는 텐트가 찢어져 있었다니, 이걸 누가 예상할 수 있겠는가.
“엇.”
그러는 와중, 식탁 위에 톡,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물방울 자국이 하나 생겼다.
그러더니 주변에서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하나둘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라. 일기예보에서 비 소식은 없었는데.”
유세아가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나마 다행인건 식사 후 정리를 끝마친 상태라는 것이었다.
“테이블은 제가 접어둘 테니, 세아 씨는 텐트에 먼저 들어가 계세요.”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기 시작하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강태한이 텐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의자는 제가 옮겨 놓을게요.”
“그러면 좋죠.”
유세아가 의자 두 개를 접어 천막 아래에 내려놓고 텐트 안으로 들어가자, 머지않아 강태한도 안으로 들어왔다.
“휴. 방금 전까지 맑았는데, 갑자기 난리네요.”
“그러게요. 모닥불은 어떻게 해요?”
“저대로 빗속에 내버려두면 되죠. 불이 번지면 그게 문제지, 꺼지는 건 아무런 문제도 안 되니까요.”
강태한은 그녀의 질문에 답하며 바닥에 앉았다.
“그래도 조금 아까워서.”
“괜찮아요. 대단한 것도 아닌데요.”
두 사람은 텐트 안에 나란히 앉아, 말없이 함께 입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둘 사이에는 천막을 두드리는 빗소리만이 조용하게 울려퍼졌다.
'어떡하지···.'
겉으로 보기엔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보였지만, 유세아는 긴장으로 몸이 굳어있는 상태였다.
안이 넓다고는 해도 기껏해야 텐트다.
그래서 그런가, 옆에 있는 강태한의 존재감이 평소보다도 크게 느껴졌다.
굵은 팔뚝은 또왜 그렇게 잘 보이는지.
한 번 의식을 하고나니, 곁눈질도 못하고 있는 유세아였다.
“좋네요.”
“...네?”
“이렇게 천막 안에서 빗소리를 듣는 거요. 예전부터 좋아했거든요.”
강태한이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로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긴장한 그녀와 달리 평소와 다를 것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만 의식하고 있는 건가...'
순간 그런 강태한의 반응에, 자기도 모르게 시무룩해지는 유세아다.
그가 이런 쪽에 둔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고 생각하니 조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허나 그러던 와중.
바닥 위에 올려놓고 있던 오른손 위로, 살짝 거칠면서도 따스한 감촉이 살포시 덮어졌다.
어느새 자신의 오른손을 덮고 있는 강태한의 왼손.
유세아는 포개어진 두 손을 살짝 내려 봤다가, 자기도 모르게 강태한을 쳐다보았다.
순간 눈이 마주치자, 강태한은 눈웃음과 함께 싱긋 미소를 짓고는, 다시 텐트 입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후후후.”
그러자, 유세아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소소하게 터져 나오는 작은 웃음이었다.
“왜요?”
“저도 좋아서요. 이렇게 빗소리 듣는 거.”
강태한의 담담한 목소리에, 유세아도 담담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고는 포개어진 오른손을 뒤집어, 위에 올려져있는 강태한의 왼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한동안 같은 곳을 바라보며, 말없이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 * *
다음 날 늦은 오후.
“허허.”
택시에서 방금 막 내린 강태한은, 앞에 세워진 빌딩을 올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완공된 지 얼마 되지 않는, 새것 티가 풀풀나는 빌딩.
처음부터 호텔을 주 목적으로 설계되었다더니, 건물의 외관도 나름 세련된 디자인이었다.
'22층보다 높은 거 같은데?'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고개를 들어야 꼭대기가 보였다.
하지만 세어본 결과 층수는 들었던 것과 똑같은 22층.
그렇다는 것은, 각 층들의 층고가 제법 넉넉하게 잡혀있다는 뜻이리라.
“혹시, 강태한 선생님 되십니까?”
그렇게 생각보다 훌륭한 외관을 보며 감탄을 하고 있던 와중, 옆에서 다가온 누군가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네. 맞습니다만.”
“오늘 뵙기로 한 인테리어 디자이너, 황윤수라고 합니다. 카페에서 뵙기로 했었는데, 오다보니 선생님께서 눈에 들어와서 말이죠.”
“아아. 안녕하세요.”
황윤수가 명함을 건네며 목례를 하자, 강태한 또한 명함을 건네받으며 마주 목례를 했다.
'업계에서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었지.'
채서윤의 안마가 끝나고 함께 저녁을 먹었을 때.
가게의 이야기가 나오고 인테리어가 언급되자, 신준호는 본인이 알고 있는 유명한 업자 한 명을 소개해주겠다고 했었다.
그리고 지금 건네받은 그의 명함.
거기에 적혀있는 회사는, 강태한이 얼마 전에 따로 찾아보고 연락을 했었던 회사였다.
업계에서는 이미 꽤 유명하고, 이름만대도 알 법한 체인점들의 매장 설계도 담당하고 있다는 모양.
허나 그때는 분명, 이미 일정이 꽉차있어 한동안 의뢰를 받기 힘들다고 했었다.
그랬는데.
‘확실히 신사장님 인맥이 넓긴 한가봐.'
신준호의 연락이 닿자, 흔쾌히 수락하고는 이렇게 나와 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