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68화>
“그리고 일단 거리부터가 좀 멀기도 하고요.”
대성 웨일즈는 부산에 연고지를 두고 있는팀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서울에서 부산은 좀 멀다.
한 번 출장을 다녀오려면 사실상 하루를 통째로 할애해야 할 것이다.
뭐 내려간 김에 겸사겸사 바다나 보면서 놀다 올 수도 있겠지만···
심태윤이 말하는 건 그런 식으로 어쩌다 한 번 와달라는 게 아니라, 한하처럼 주기적으로 출장을 와달라는 것일 테니까.
사실 한하도 대전에 연고지를 두고 있기 때문에 제안을 받아들였을 뿐이지, 다른 지역에 있었다면 그리 깊게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전은 강태한의 고향이자 일이 없어도 거의 한 달에 서너 번은 내려가는 곳이었고, 오히려 한하로 출장을 나가는 게 소일거리에 가까웠으니까.
“그건 ··· 그렇기는 하죠.”
거리가 멀어서 힘들다, 라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강태한이 한가한 사람도 아니고, 방금 전 실장에게 듣자하니 며칠도 아니고 몇 주 단위로 예약이 꽉 차있는 사람이라고 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제가 사업 관련으로 한동안 바쁠예정이라, 일거리를 늘려놓고 싶지는 않네요. 죄송합니다.”
“···그렇군요. 이해했습니다.”
강태한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단호함이 실려있었다.
심태윤은 고개를 끄덕이며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역시 안되는 건가.'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좀 더 협상을 끌고 가보겠지만, 강태한 같은 유형의 사람은, 특히 이런 식으로 이미 확답을 내놓은 상황에선 이야기를 길게 더 끌고 가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 있었다.
‘좀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안마를 받고나서 푹 자고 일어난 뒤, 심태윤은 송남섭의 경험담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냥 침대에서 일어나 제자리에 서는 것만으로도, 안마를 받기 전과 후의 컨디션이 너무나도 달라 마치 자기 몸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던 것이다.
그뿐인가.
시험 삼아 손을 번쩍 들어 올려도 어깨가 아무렇지 않았을 때에는, 자기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싶어 뺨을 꼬집어봤을 정도였다.
그렇기에 그는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요 근래 한하가 폭발적인 기량을 펼쳤던 것이, 다름 아닌 강태한 안마사의 안마 덕분이라는 것을.
만약 한하가 알기 전보다 먼저 알았더라면.
아니, 미팅에서 처음 이야기가 나왔을 때, 하다못해 송 코치가 경험담을 말했을 때 곧바로 이곳에 와봤다면, 뭔가 바뀌었을 지도 모른다.
'너무 아쉽네···.'
팀에 한 번만··· 아니, 몇몇 선수들만이라도 받는다면, 정말 큰 도움이 될 텐데.
그런 생각 때문인지 심태윤의 얼굴에 맺힌 짙은 아쉬움은 좀처럼 걷히지 않고 있었다.
“다만, 가게에 찾아오는 손님들을 제가 따로 구분하거나 차별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런 와중, 강태한이 넌지시 말을 꺼냈다.
의사가 환자를 구별하지 않듯, 안마사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다.
“제가 부산까지 출장을 나가는 일은 아마 없겠지만, 선수 분들이 각자 예약을 해서 찾아오신다면 그건 제가 참견할 부분이 아니죠.”
말하자면, 직접 찾아가지는 않겠지만 찾아오는 사람은 마다하지 않겠다는 뜻.
그 말에 풀이 죽어있던 심태윤의 얼굴에 급격히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엇... 그렇습니까? 정말로요?”
“거짓말일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애초에 당연한 말이기도 하고요.”
강태한은 예의만 지켜준다면야 손님을 가리지 않는다.
단지 심태윤이 ‘웨일즈의 선수들은 안마를 해주지 않겠다.'라고 확대해석을 했을 뿐.
한편, 그 말에 심태윤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불가능한 것과 부분적으로라도 가능한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잠실구장에서 시합이 있는 날이 언제였지?’
대성 웨일즈는 부산에 있고 부산과 서울 사이에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서울에서 시합이 있는 날에는 서울로 올라와야 한다.
그러니 그 날에 미리 예약을 잡아둔다면, 자연스럽게 안마를 받고 나서 선수들을 경기에 내보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재성이랑 민재가 다시 폼이 좀 올라오고 남아있는 경기들을 전부 이긴다고 한다면.’
다시 5위까지 올라가 턱걸이로 가을야구를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상상만 해도 흥분이 되는지, 그의 가슴 속에 고양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선생님, 혹시 이 날과 이 날 오후에, 두어명 정도 예약 좀 할 수 있겠습니까?”
심태윤은 스마트폰에 경기일정표를 띄워놓은 다음, 특정 날짜 두 개를 가리키며 물었다.
다른 게 아니고 잠실에서 경기가 있는 날짜들이었다.
“음. 이걸 먼저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그러자, 강태한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뺨을 긁적였다.
“제가 곧 따로 가게를 차리게 되어서요. 새로운 예약은 받지 않고 있고, 기존에 잡혀있던 예약이 취소된 경우에만 제한적으로 받고 있습니다.”
“그, 그렇습니까?”
병 주고 약 줬다가 다시 병을 주는듯한 상황!
강태한이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덕분에 심태윤의 설렘은 빠르게 가라앉아 입 꼬리가 다시 밑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밖에 계신 실장님한테 한 번 여쭤보세요. 취소된 게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알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런 안마라면 어지간해서 취소가 나올 일이 없을 거라고, 본인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심태윤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그런데 선생님이 따로 차리신다고 한 가게는 어떻게 예약할 수 있습니까?”
그러다 문득 떠올린 듯, 심태윤이 살짝 허리를 숙이며 물었다.
이보다 더 진지할 수 없을것처럼 진중한 목소리였다.
“아직 정확한 일정이 나오지 않아서 예약은 받지 않고 있습니다만 나중에라도 알려드릴까요?”
“네. 꼭, 꼭, 꼭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강조하듯이 꼭이라는 말을 세 번이나 말했다.
진중함을 넘어 간절함마저 묻어나오는 목소리였다.
“실장님한테 연락드리라고 말씀드릴게요.”
그 반응에, 강태한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고서 입을 열었다.
* * *
수요일.
남들에게는 일주일의 중간에 해당되는 날이지만, 강태한에게는 휴일의 시작이 되는 날이다.
강태한은 쉬는 날을 맞아, 차를 몰고 한참 고속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허나, 평소와 다르게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대전이 아니라 가평이었다.
“태한 씨, 통감자 한 알 먹을래요?”
그리고 바로 옆의 조수석에 앉아있는 유세아.
그녀는 방금 들른 휴게소에서 사온 통감자를 우물거리다가, 큼직하면서도 딱 한 입 크기 정도 되는 적당한 감자를 찍으며 강태한에게 물었다.
“좋죠.”
“근데 그러려면 아~를 하셔야 하는···.”
유세아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을 하다, 말을 멈추고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말을 채 맺기도 전에 강태한이 '아’하며 입을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행동이 빠르시네요?”
“운전 중에는 손을 움직일 수 없으니까요.”
평소라면 조수석에 먹을 걸 내려놓고 허공접물로 음식물을 가져올 수도 있었겠지만, 보는 눈이 있을 때는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다.
강태한은 대답을 하고는 아~하고 입을 벌렸다.
'이런 거에 둔한 건지, 능글맞은 건지.'
처음에는 전자인 줄 알았지만, 요즘에는 헷갈리고 있는 유세아다.
그녀는 통감자를 찍은 이쑤시개를 쥐고 잠시 망설이고 있었다.
이야기는 자기가 먼저 꺼냈건만, 막상 먹여줄려니 여러모로 쑥스러운 것이다.
“좀 식긴 했는데 뜨거울 수 있으니 조심하세요.”
그러다 마침내 통감자 한 알을 강태한의 입안에 넣는데 성공한 그녀는 왠지 모를 성취감을 느끼고는 괜히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금 표정이 좀 이상하게 보일 것 같은 탓이었다.
“근데, 왜 가평으로 가자고 하신 거에요?”
그렇게 좀 침묵이 흐르고 있던 와중, 먼저 입을 연 것은 강태한이었다.
그의 말에 유세아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냥 한 번쯤 가보고 싶었어요. 다들 대학생 때 가평 한 번씩은 놀러 가보잖아요.”
가평은 휴양지로서 인지도가 높고, 특히 여름철 계곡가에 위치한 펜션들은 예약자체가 힘들 정도다.
그 중에서도 대학생들은 엠티를 간다고 하면 일단 가평부터 떠올릴 정도로 자주 오고, 덕분에 대학생 시절 가평에 관한 추억쯤은 하나씩 있는 경우가 많은데..
“근데 전 이번이 처음이에요.”
“그래요?”
“네. 알바하느라고 바빴거든요.”
유세아의 집이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기에, 학업과 함께 아르바이트를 병행해야 그나마 개인적으로 쓸 수 있는 용돈이 나왔다.
게다가 소속사가 생기기 전에는 알아서 연기지도도 받고 오디션도 보러 다녀야했으니.
덕분에 그녀의 캠퍼스 라이프는 학생 특유의 여유보다는 고되고 빡빡한 기억으로 남아있었다.
“공강이나 휴일에는 보조출연 나가고, 수업 끝나면 맥도날드로 가서 손님 받고 그랬었죠.”
빅맥 세트에 음료는 커피로 변경 맞으신가요.
유세아는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당시에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그래도 나름 추억이라고 부를만한 기억이었다.
그때의 경험이 연기에도 적잖이 도움이 되고 있었으니까.
“저도 가평에 놀러가는 건 처음이네요.”
“어, 태한 씨도요?”
“네. 몇 번 와보긴 했었는데.”
강태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떤 일로 왔었는데요?”
“군 복무를 여기서 했었거든요.”
“아하.”
흥미롭게 물어보던 유세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로서는 잘 알지 못했지만, 남자들 사이에서는 본인이 군 복무를 했던 지역에 대해 애증 같은 묘한 감정이 있는 모양이었으니까.
“그럼 오기 좀 그러셨던 거 아니에요? 그··· 이쪽 방향으로는 침도 안 뱉는다, 막 그런것처럼.”
“그런 거 없어요. 특히나 이제와선 뭐··· 워낙 오래전 일이라.”
강태한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에게는 말 그대로 육십 년 전의 일이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는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답한 다음,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는 좀 설레는 기분이네요.”
“···네?”
“저도 가평으로 와서 좋다고요.”
운전 중이기에 강태한의 고개는 계속 앞을 향하고 있었지만, 한쪽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었다.
'분명 다른 말이었던 것 같은데···'
유세아는 괜히 입술을 씰룩이며, 다시 창가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바깥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 * *
“예, 지금 도착했는데요.”
[그럼 일단 안쪽으로 들어 가보시겠어요? 캠핑구역 앞쪽에 관리사무실이 보일 텐데, 거기 직원이 안내를 해줄 겁니다.]
“관리사무실이라면 저 2층짜리 건물이요?”
[예, 예. 맞습니다. 거기서 체크인부터 이용방법까지 설명을 드릴 겁니다.]
“알겠습니다.”
담당자와의 통화를 마친 강태한은 스마트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들어가면 된대요?”
“네. 사무실에서 체크인만 하면 될 것 같아요.”
유세아의 질문에 강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일단 가볍게 텐트만 챙겨들고서, 앞에 보이는 관리사무실을 향해 걸어갔다.
체크인은 별 거 없었다.
말 그대로 예약자가 왔다는 것만 체크할 뿐.
음수대와 화장실 같은 시설들의 위치만 안내를 받은 후, 두 사람은 곧바로 지정된 캠핑 자리에 도착했다.
“그럼··· 이제 뭐부터 하죠?”
“텐트부터 쳐야겠죠. 근데··”
그렇게 말하며, 강태한은 물끄러미 유세아를 쳐다봤다.
'혼자서 텐트를 칠 수 있겠냐'는 질문이 담긴 시선이었다.
“아, 걱정 마세요! 이거 원터치에요.”
던져놓거나 최소한의 절차만으로도 칠 수 있는 텐트, 규모가 크면 원터치 텐트도 꽤 치기 힘들다고 들었지만, 이건 일인용으로 나온 물건이라 그런 걱정도 없을 터였다.
“그럼 저는 제 거 먼저 치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기세등등한 유세아의 목소리에 강태한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가방에 들어있는 텐트의 부품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확실히 관리되는 곳은 다르구만.'
강태한은 주변의 땅을 발로 꾹꾹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에는 고운 자갈들이 깔려있고, 밑으로는 적당히 단단한 땅이 받쳐주고 있다.
야영을 하기에 그야말로 적합한 지형.
그 위에 텐트를 펼쳐놓고, 강태한은 느긋하게 폴대들을 결합하기 시작했다.
유세아가 저번에 사줬던, 혼자 쓰기에는 상당히 넓고 큰 텐트였지만, 강태한은 혼자서도 그리 어렵지 않게 텐트를 완성시켜나갔다.
먼저 뼈대와 이너텐트를 올리고, 그 위로 천막 역할을 해주는 플라이를 씌운다.
그리고 이제 적당히 각을 잡고, 핀을 박아 텐트를 고정시키려는 와중···
“···태한 씨.”
옆에서 텐트를 만지고 있던 유세아가 다가오더니, 굉장히 시무룩해진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거, 아무래도 불량인 것 같은데요.”
“어떤 게요?”
“텐트 자체가요.”
원터치 기능이 잘 작동을 안 한 걸까.
핀을 박기 위해 앉아있던 강태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텐트 쪽으로 다가갔다.
그의 예상과 달리 텐트는 잘 펴져있었지만.
“이걸 어떻게 찢으셨어요?”
“제가 찢은 거 아니에요!”
유세아가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땅 위에 펼쳐진 그녀의 텐트는 밤하늘이 잘보일 것 같은 디자인이었다.
천장 부분이 찢어져 있다는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