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66화>
“···이건 액수가 너무 큰데요.”
강태한이 난감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에는 수표가 백만 원짜리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다시 보니 두 번째 반점 앞의 숫자가 1이 아니라 10이었다.
삼백만도 꽤나 큰 금액인데 그 열 배인 삼천만이었던 것.
물론 돈이라는 건 많을수록 좋지만, 그래도 갑자기 이렇게 나오면 당황스러운 기분이 되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저희 부부가 태한 씨한테 신세를 많이 졌잖아요.”
살짝 부담스러워하는 듯한 강태한의 반응에, 채서윤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다른 거 다 떠나서, 제 관절통만 해도 원래 평생 동안 달고 살 각오를 하고 있었어요. 아무리 많은 돈을 준다 해도 고칠 방법이 없었으니까요.”
병원에서 관절통의 통증을 일시적으로 완화시킬 수는 있었지만, 완전히 치료할 방도는 사실상 없다고 봐야했다.
그게 남편과 함께 전국에 나름 용하다는 병원들을 찾아다니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근데 그걸 안마 한 번 받아서 이렇게까지 효과를 본다니 그야말로 기적 같은 일이었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일이 일어났으니, 그게 기적이 아니고 뭐겠는가.
“게다가 이건 제 이야기고 남편 일은 또 별개잖아요. 그러니까 부담 가지실 필요 없이 그냥 성의 표시로 받아주시면 될 것 같아요.”
자신들이 도움을 받은 것에 비하면 삼천만원은 오히려 터무니없이 적은 돈이다.
받은 만큼 돌려준다기 보다는 단지 감사를 표하는 수준에 불과하다.
신준호와 채서윤 부부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니면 그냥 정신 나간 사람이 팁으로 주고 갔다고 생각하면 어때요? 이게 더 부담스럽나?”
“생판 처음 보는 사람이 팁으로 삼천만원을 주면 무슨 꿍꿍이인지 의심부터 해야겠죠.”
강태한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는 반쯤 빼냈던 수표를 다시 봉투 안에 다시 집어넣고, 구겨지지 않도록 조심해서 주머니 안에 넣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 사모님.”
“받아주시니 저도 기뻐요. 사실, ‘받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되돌려주면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거든요.”
강태한이 가볍게 목을 숙여 감사를 표하자, 채서윤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주는 돈은 마다하지 않긴 합니다. 돈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돈이라는 건 기본적으로 많을수록 좋은 물건이고, 강태한도 굳이 돈을 마다한 적은 없었다.
손님이 주는 팁을 거절한 적도 없었으니까.
단지 팁을 더 줬거나 안 줬다고 해서 손님을 더 우대하거나 차별하지 않을 뿐이다.
“후후, 역시 태한 씨는 믿을만한 사람이네요.”
“그래요? 왜요.”
“개인적으로 돈 싫어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믿지 못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흐음··· 틀린 말은 아니네요.”
강태한이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채서윤이 풉~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그보다. 혹시 저한테 하셔야 되는 말씀이나 건네 줘야할 물건이 더 있습니까?”
“음··· 딱히 없는데요. 근데 왜요?”
“주무셔야할 시간이거든요.”
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 채서윤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동안, 강태한은 자연스레 그녀의 양쪽 어깨에 손을 올리고 뒤쪽의 혈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채서윤의 눈꺼풀이 허물어지듯 스르륵 내려앉더니, 그녀는 강태한의 손에 기댄 채로 자연스레 베개 위에 머리를 뉘였다.
'하마터면 타이밍을 놓칠 뻔했군.'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 법.
안마로 근육이나 혈을 풀어놓은 후에도, 휴식과 회복의 효율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때가 따로 있다.
거금을 받은 것도 좋고 훈훈한 분위기도 좋지만 안마사로서 일을 하는 만큼 당장에 가장 중요한 일은 안마에 집중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 운동 좀 했다가 돌아올까.”
강태한은 슬쩍 시계를 확인한 다음, 평소와 같이 안마침대의 온도를 조절하고 담요를 꺼내 목까지 덮은 다음, 방의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 * *
그로부터 며칠 뒤.
“하참··· 이게 맞는 건지 나는 아직 모르겠다.”
목욕탕의 뜨거운 온탕에서, 한 중년의 남성이 옆에 있는 남자에게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아까부터 연신 고개를 좌우로 갸웃거리고 있었다.
“진짜라니까요, 감독님. 혹시나, 정말 혹시나 제가 거짓말한 거라도 목욕하고 안마 한번 받는 거 뿐이잖아요.”
그러자 옆에 있던 남자가 살짝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꽤 여러 번 말한 듯 답답한 기색이 담겨있는 목소리였다.
그는 프로야구팀 대성 웨일즈의 트레이닝 코치인 송남섭.
그리고 방금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하던 중년의 남성은 대성 웨이즈의 감독인 심태윤이었다.
“뭐야, 그럼 그냥 별 거 없고 목욕 한 번 하고 안마 받고 끝이라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아무리 최악의 경우라고 해도 감독님이 손해 볼 건 크게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거죠. 물론 그럴 일도 없겠지만요.”
심태윤이 추궁하듯이 묻자, 송남섭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방금 전보다 답답해하는 기색이 한층 더 짙어져있었다.
둘이 서울까지 올라와서 목욕탕에 들어와있는 이유는 단순했다.
한하의 수준이 급격하게 올라온 비법을 알아내기 위해 직접 찾아온 것이다.
“진짜 받아보시면 안다니까요.”
지난 번 안마를 받고 나왔을 때, 송남섭은 말도 안 되는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단순히 몸이 좀 풀린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활력이 샘솟는 듯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송남섭은 그 상태로 며칠 동안은, 그때 자기가 임기응변 삼아 둘러댔던 말처럼 마라톤 대회에 나가도 괜찮을 정도로 컨디션이 좋았다.
그 또한 나름 운동으로 밥벌어먹고 사는 직업.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효과이고, 더 나아가 경기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만약 이게 별 게 아니라면··· 도핑도 별 게 게 아닌 셈이다.
까놓고 말해 어지간한 도핑보다도 효과가 좋다고 봐도 무방했으니까.
'은퇴할 때가 가까워진 선수들을 전성기 시절처럼 되돌려놓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지.'
그렇게 생각하면 감독이 계속 믿지 못하고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간다.
때로 세상에는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는 일도 있었으니까.
송남섭 또한 직접 여기까지 와서 안마를 받아보기 전에는 반신반의하고 있었으니 똑같은 꼴이다.
“근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안마가 전부일 것 같지는 않아. 한하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연승을 할 수 있었겠냐고.”
심태윤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세수를 하고는, 팔짱을 낀 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그렇게 말했다.
물론 한하는 시즌 초기와 중기 때 성적이 너무 저조했던 탓에 한계가 명백했지만.
그래도 연패만 간간히 끊고 있던 꼴찌에서 순식간에 6위까지 치고 올라온 일은, 그야말로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만약 이대로 다음 시즌이 시작된다면?
한하가 시즌 내내 1등으로 군림하고 있는것도, 마냥 터무니없는 상상이 아닐 것이다.
그야말로 평행세계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지만 충분히 가능했다.
그런데 그 모든 게 안마사 한 명의 안마솜씨 덕분이라니.
심태윤의 머릿속에서는 두 이야기가 잘 연결되지가 않았다.
“우리도 안마사는 있잖아? 송 코치도 스포츠마사지 실력이 제법 뛰어나고.”
“아휴, 됐습니다. 안마 받으러 가실 시간도 거의 다 됐으니까, 일단 받고 나서 이야기해보시죠.”
송남섭은 슬쩍 시계를 쳐다본 다음, 탕에서 몸을 일으켰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일단은 경험을 해봐야 이야기가 진행될 것 같았다.
* * *
“그러니까, 내가 들은 말을 정리하자면···.”
왼쪽으로 고개를 기울인 채, 꽤 오랫동안 생각에 잠겨있던 최성현이 입을 열었다.
“일단 네가 자기 가게를 연다. 맞지?”
“그렇지.”
확인하듯이 묻는 최성현에게 강태한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답했다.
“근데 그게 한 개 층의 3할 정도를 먹을 정도로 규모가 커서, 다른 안마사들도 뽑아야한다. 그래서 나도 같이 일하면 좋을 것 같다. 맞냐?”
“잘 들었네, 뭐.”
“아니, 이게 참···.”
강태한이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최성현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말의 의미는 알겠는데 이해가 안 되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는 알겠지만, 순순히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분명 네 달 전쯤에는 방 월세는 커녕 미납된 교통비를 고민하고 있었던 녀석이었는데, 갑자기 금수저 동기나 꺼낼법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로또라도 된 거야?”
“로또 급의 행운을 만난 거 같긴 해.”
강태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비록 자신의 선행에 대한 보답이라고 하지만, 원래 선행의 보답이라는 것은 운에 따라 달린 것이다.
작은 선행에도 큰 보답이 돌아올 수 있고, 반대로 성인군자 수준의 선행을 베풀어도 아무런 보답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그렇기에 강태한이 이걸 행운으로 비유하는 것은, 단순한 겸손이 아니라 나름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 할 수 있었다.
“듣고도 믿기지가 않네.”
“그래서, 어떻게 할래?”
“별 거 있나. 네가 나 따라서 여기 온 것처럼, 이번에는 내가 너 따라서 거기로 가야지.”
최성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사실 황 실장님도 같이 가기로 했어.”
“아, 그래? 어쩐지. 며칠 전부터 표정이 좀 밝아지셨다 싶었었지.”
강태한의 말에 최성현이 이제야 납득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도 눈치가 빠른 그였기에, 사장과 황 실장 사이에 뭔가 문제가 있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럼 뭐, 이제 강 사장님이라고 불러야하나?”
“그냥 평소처럼 불러라.”
황 실장한테도 잠깐 들었던 말이지만, 영 어색한 호칭이다.
강태한은 눈살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저었다.
“태한 씨, 손님 모셔놨어. 2번방이야.”
“네. 바로 갈게요.”
그러던 와중, 대기실의 문을 열고 황 실장이 강태한을 불렀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에, 강태한은 바로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녀오십시오, 강 사장님.”
“그래, 최 사원도 고생해.”
꼴을 보아하니 질색하면 오히려 계속할 모양새다.
강태한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에이, 쯧.”
오히려 자기가 질색하는 최성현, 얼굴을 찌푸리며 혀를 차는 그 모습에, 강태한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대기실을 나와 복도 쪽으로 걸어갔다.
'2번방이라고 했었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는 강태한.
그러자, 선글라스를 끼고서 자기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손님과 눈을 마주쳤다.
'···뭐지, 이 데자뷰.’
예전에 비슷한 상황을 겪은 것 같은데.
강태한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하 호크스의 오재윤 감독.'
그 사람도 방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이쪽을 이렇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이 손님의 정체 또한 바로 떠올릴 수 있었다.
‘대성 웨일즈의 심태윤 감독이잖아.'
그를 알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오재윤 감독은 그래도 평소에는 선글라스를 잘 착용하지 않지만···
심태윤 감독은, 매시합마다 쓴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자주 선글라스를 착용했으니까.
'굳이 이러지 말고 차라리 선글라스를 끼지 않는 쪽이 더 알아보기 힘들 것 같은데 말이야.’
그런 생각을 떠올리면서, 강태한은 손님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쨌거나 그의 할 일은 안마였고, 손님의 정체는 중요하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