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65화>
“뭐야, 지금 스카웃 제의를 하는 거야?”
“그런 거죠. 사업이라는 게 원래 혼자서 하기는 좀 힘든 일이잖아요?”
강태한의 말에 황 실장은 곁눈질로 슬쩍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긴 했지만, 그래도 다른 안마사들이 들락거릴 곳에서 말하기엔 부적합한 내용이었다.
“일단 차라도 한 잔 마실래?”
“좋죠.”
황 실장이 엄지손가락으로 복도 쪽을 가리키며 말하자, 강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사무실에서 서로를 마주보고 앉아있었고, 그 사이에는 황 실장이 구비해두고 있는 다구 세트가 올라와 있었다.
“그래서···.”
적당히 우려낸 첫 잔을 건네며, 황 실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태한 씨가 가게를 차릴 예정인데, 거기서 내가 같이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네. 맞아요. 일단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이야기는 별로 없지만, 정해져있는 것들을 말씀드리면···.”
건물의 위치와 대략적인 완공일, 가게가 들어가는 층의 위아래로 사우나와 호텔이 들어온다는 것, 그리고 임대가 아니라 가게를 소유하게 된다는 것.
여기까지 말해줬을 때, 황 실장의 표정은 그야말로 입이 떡 벌어지는 수준이었다.
“···말이 되나?”
솔직히 황 실장은 강태한의 가게가 망할 거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막말로 생판 모르는 지역에서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강태한의 실력이라면 금방 단골이 확보될 테니까.
안마원은 안마를 받으러 가는 곳.
그렇기에 안마사의 솜씨는 절대적인 성공기준이고, 강태한의 안마실력은 비교대상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그야말로 레벨이 다른 수준이다.
그런데 저런 상권에다가 임대료 문제까지 해결된다면야 가게가 망하는 게 말이 안될 정도다.
“인테리어 비용 같은 건 물어보나마나 겠네.”
이런 곳의 가게를 꾸민다면야 그 비용이 제법 만만치 않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상가 점포의 소유권 자체랑 비교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그걸 흔쾌히 내주는 사람이 그 정도도 해결해주지 않았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황 실장의 말에 강태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투자금 명목으로 받아둔 게 있습니다.”
‘가게는 아버지의 빚을 갚는 것이니, 초기 사업비용으로 내 빚을 갚도록 하겠다.'
박호연은 그렇게 말하며 거액의 돈을 그냥 넘겨주려 했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것까지는 조금 과하지 않나 싶어서 강태한이 투자 명목으로 바꿔놨을 뿐.
“그럴 것 같았지.”
그 말에 황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말만 전해들은 상황이었지만, 다 지어진 빌딩이 무너지기라도 하지 않는 이상 개업까지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런 자리면 더 짱짱한 사람들도 많이들 오려고 할 텐데, 왜 굳이 나를 데려가려는 거야?”
가기 싫다는 게 아니라, 순수한 의문이다.
그리고 황 실장의 물음에 강태한은 솔직하게 답했다.
“제가 알기로 가장 믿을만하고, 이쪽 업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황 실장님이 거든요.”
그의 말은 과장 같은 게 아니었다.
실제로 이곳에서 일할 때, 강태한은 다른 부분들은 염려하지 않고 그냥 안마에만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안마사가 안마에만 집중한다는 건 얼핏 당연하게 들리는 일이지만, 그러기 위해선 그 외의 부분들이 모두 원만하게 해결된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사용되는 비품관리, 시설물의 청결유지, 손님관리, 안마사들 간의 스케쥴 조정.
그 외에도 자잘하지만 문제가 생길만한 부분들 모두, 황 실장이 알아서 관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황 실장이 혼자서 일을 한 건 아니고 다른 직원들도 좀 있었지만, 결국 그걸 다 통솔하고 일이 굴러가게 만드는 것은 황 실장이었다.
‘딱히 문제가 생기는 걸 본 적이 없으니.'
본격적으로 나서서 바쁘게 일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지만, 그건 오히려 평소에도 일처리를 잘해놓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안마사들의 실수 때문에 클레임이 나온 적은 있어도 그 외의 문제로 클레임이 들어온 적은 없었으니까.
황 실장은 이것보다 더 큰 가게도 충분히 운영할 수 있을만한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만약 이 가게가 황 실장의 가게였다면 지금보다 규모가 더 커졌을 것이다.
다만 그렇게 되지 않은 건···
“여기 사장이랑도 요즘 사이 안 좋잖아요.”
“···뭐야.”
강태한의 말에 황 실장이 잠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었어?”
“대충은요.”
이야기는 단순했다.
강태한이 들어온 이후 가게에 손님이 몰리고 매출도 꾸준히 상승하니, 황 실장은 안마샵을 더 확장하고 싶었고 사장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예전에 상가 관련해서 좀 크게 투자했었다가 망한 적이 있는 양반이거든. 왜 그러는지 이해는 한다만, 답답하긴 하지.”
그 외에도 인테리어 교체라든가, 안마사들 계약 조건이라든가, 의견이 맞지 않는 일이 꽤잦았다.
강태한의 조건을 바로 올려주지 못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사적으로도 친한 사이에요?”
“친하다··· 까지는 아니고, 그냥 예전에 일좀 같이 하면서 생긴 인연이지.”
황 실장은 찻잔을 들고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입 안에 차의 향을 머금은 채 그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고민은 그렇게 길지 않았고, 그는 머지않아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태한 씨 나가면 나도 여기서 나갈 생각이긴 했어.”
“왠지 그러질 것 같기는 했어요.”
강태한이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애당초 그런 낌새가 보였으니 황 실장에게 이런 제안을 꺼낸 것이기도 했다.
“태한 씨 같은 사람이 들어온 건 진짜 둘도 없는 찬스가 제 발로 굴러들어온 셈인데. 그 기회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보내는 거잖아. 그런 곳에 미래는 없다고 봐야지.”
황 실장은 평소 잘 내지 않는, 오랜 고민이 묻어나오는 듯한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강태한과의 정이나 의리 때문이 아니라, 장기적인 시점으로 봤을 때 굳이 남아있을 필요가 없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그럼 이직하실 곳은 생각해두셨고요?”
“막연하게 생각해둔 거긴 하지만 몇 개 있긴 했지. 같이 일하자고 했던 사람이 좀 있었거든. 그런데···.”
황 실장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강태한을 보며 피식 얕은 웃음을 머금었다.
“여태 들어본 것 중에서 가장 망할 수가 없을 것 같은 사업이 있는데, 거기서 제안이 와버렸네. 그러면 별 수 있나, 거기로 가야지.”
황 실장의 미소에 강태한도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아직 계약서도 안 봤는데 그렇게 말해도 되요?”
“태한 씨가 알아서 챙겨주겠지, 뭐. 아니지, 이젠 태한 씨가 아니라 '강 사장님~’이라고 불러야 되나?”
“그냥 태한 씨라고 불러주세요."
영 어색하고 괜히 생색내는 느낌.
강태한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젓고는 조용히 차 한 모금을 마셨다.
“아, 아무리 이제 떠날 몸이라고 해도 남아있는 일들은 제대로 해야 해, 태한 씨. 알지?”
“그건 당연한 거 아닌가요.”
강태한이 어이없다는 듯이 답했다.
“그냥 노파심으로 한 말이지 뭐.”
황 실장은 피식 웃으며 카운터로 돌아갔다.
그가 말했듯, 당장 바뀌는 건 없다.
더 이상 예약이 추가되지 않을 뿐.
평소와 크게 다를것 없는 하루가 흘러갔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서, 선생님!”
“예? 무슨 일이십니까.”
“갑자기 무슨 일 있으세요? 혹시라도 그만두시는 거 아니죠?”
강태한을 대하는 손님들의 반응이다.
정확히는 평소처럼 안마를 받고 나와서 다음 예약을 잡으려고 하는데 더 이상 예약을 잡을 수 없다는 말을 들은 손님들의 반응이었다.
“그만두시면 안 됩니다···.”
왠지 모를 절박함이 실려 있는 목소리.
기껏 찾아놓은 삶의 오아시스가 사라진다는 생각에 부탁을 넘어서 호소를 하는 듯한 느낌이다.
“하하··· 그만두는 건 아니고요.”
강태한은 곁눈질로 주변을 살피면서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로비에 있는 다른 손님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집중되어 있었다.
지난 번 ‘도를 가르쳐주십시오.' 사건과 유사한, 왠지 데자뷰가 느껴지는 광경이었다.
“다른 곳으로 자리를 좀 옮기게 되어서요.”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좀 달랐다.
그땐 당황스럽기만 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으니까.
강태한은 가벼운 미소를 머금은 채로 나긋하게, 그러면서도 다른 손님들에게도 충분히 들릴만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다른 곳으로요? 어디로 가시는 데요?”
“당산동 쪽으로 가는데 아직 가게 이름도 정해지지 않아서 뭐라 말씀드리긴 힘드네요. 그래도 그만두는 건 아니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강태한은 그 말을 남기고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로비에 남은 손님들은 자연스레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뭐야, 강태한 선생님 가게 옮기는 거야?”
“아, 어쩐지 더 이상 예약이 안 된다고 하더라니. 그럼 새로 예약은 이제 못 넣고 이미 들어가 있는 예약까지만 받는 건가?”
“후후, 난 3주 뒤로 이미 예약 잡혀있지롱.”
“근데 그럼 어디로 가시는 거래?”
“잘 못 들었는데, 당산동? 그쪽으로 가신다고 들었던 거 같아. 여의도 옆에 있는 동네 아닌가?”
“가게 이름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고 했으니까, 새로 생기는 안마샵이겠다.”
“강 선생님이 안 보일 쯤에 당산동에 새로 생기는 안마샵. 열리자마자 바로 예약 박으러 간다.”
그만둔다는 말에 손님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가, 강태한의 말에 과연 어느 가게로 옮기는 것일지 저마다 생각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 * *
저녁 7시 10분,
평소라면 강태한은 이미 퇴근을 했거나 목욕탕에서 한참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을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아직 대기실에 남아있었다.
다른 게 아니라 따로 찾아올 손님이 있기 때문.
“나 먼저 퇴근한다, 태한아.”
“그래. 조심히 가.”
요 근래에는 몇 번 있었던 일이기에, 수상하게 생각했던 최성현도 별 생각 없이 먼저 퇴근을 했다.
그렇게 몇 분 더 있었을까.
“오랜만이에요, 태한 씨.”
“어서 오세요, 사모님.”
신준호의 아내인 채서윤.
출산후유증으로 인한 관절통은 그때 얼추 마무리를 해놓았지만, 골반과 척추는 한 번에 되돌릴 수가 없어 다음을 기약했었다.
그리고 그 다음 안마를 받기 위해 오늘 서울로 올라온 것.
강태한은 그녀를 복도로 안내를 하면서 가볍게 말을 걸었다.
“신 사장님은요?”
“남편은 아들이랑 키즈카페에 갔어요. 대충 한두 시간 정도 돌다가 오기로 하고요.”
“아드님도 같이 오셨군요?”
“집에 혼자 두기에는 영 불안해서. 후후.”
“하긴 그것도 그렇네요.”
강태한은 그녀의 말에 대꾸하며 방문을 열고 안쪽의 침대를 가리켰다.
“오, 침대에 구멍이 나있네요?”
“거기에 얼굴을 놓고 엎드리시면 됩니다.”
“요가매트보다 훨씬 낫네.”
그녀의 말에 강태한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지난 번 거실에다가 요가매트를 깔고 안마를 했었던 기억이 난 것이다.
“몸 상태는 많이 좋아지셨네요.”
“그렇죠? 선생님이 한 번 봐주신 후로 관절통도 거의 사라졌어요. 어쩌다가 가끔 정도?”
몸에서 생기가 마르질 않는 기분이라고 할까.
원래 집안일 도중에 간간히 휴식도 취해줘야 하고, 저녁 설거지까지 마치고 나면 살짝 퍼지는 감이 있었는데···
이젠 집안일을 전부 해치우고 나서도 힘이 남아, 오랫동안 쉬고있었던 필라테스까지 하는 상황이다.
“효과를 보셨다니 다행이네요.”
“다행인 수준을 넘어섰죠. 살맛이 난다니까요.”
강태한은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몸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막힌 혈이나 뭉친 근육들은 저번에 다 풀어놨기에, 지압의 강도는 적당한 수준이었다.
“아으··· 역시 시원하고 좋네요.”
고통 없는 개운함!
지압의 아픔으로 인해 비명을 지르던 손님들과 달리, 채서윤은 저번과 마찬가지로 굉장히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느긋하게 안마를 즐기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좀 지났을까.
얼추 마무리 단계에 들어섰을 때쯤.
“아, 저 근데 드릴 게 있어요, 태한 씨.”
“지금 말입니까?”
“예. 이따가 잠들고 나면 못 드리니까···.”
그러면서 그녀는 들고 온 장지갑을 뒤적거리더니, 봉투 하나를 집어서 강태한에게 건넸다.
“이거 우리 부부가 드리는 선물이에요.”
“뭔데요?”
강태한은 별 생각 없이 봉투 안의 내용물을 살짝 꺼냈다. .
그 안에는 세 장의 종이가 들어있었는데···
“···수표?”
“이번에 태한 씨가 자기 가게를 열게 됐다고 전해 들었었거든요.”
살짝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강태한에게, 채서윤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창업 초기에는 돈이 좀 많이 들 테니까, 거기에 좀 보태시면 좋을 것 같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