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64화>
“그러니까··· 새로 올라가고 있는 이 빌딩에다가, 제 가게를 내주시겠다는 말입니까?
“그래, 굳이 첨언을 하자면 예전부터 올라가기 시작해서 슬슬 완공식 날짜를 잡고 있는 빌딩이지.”
박호연이 서류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에는 예상완공일이 적혀 있었는데, 대략 다음 달 정도로 나와 있었다.
“내가 알기로 자네는 지금 다른 사람 가게에서 일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렇지 않은가?”
그 말에 강태한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내가 자네한테 직접 안마를 받아본 적은 없지만, 분명 그 솜씨도 뛰어나고, 손님들 사이에서의 평판도 높겠지. 그렇지 않은가?”
“으음. 그런 편이긴 하죠.”
자기 입으로 대답하기 머쓱한 질문이긴 했지만, 굳이 부정할 이유도 없다.
거의 매일 같이 예약이 꽉꽉 들어차는데 손님들의 평판이 별로라고 하면, 그건 지나친 겸손이 될 테니까.
"그러니 자네도 자기 소유의 가게를 필요로 하고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봤지. 어떤가?”
강태한은 잠시 대답을 미룬 채, 책상에 올라와있는 서류를 집고 그 내용을 간략하게 훑었다.
영등포의 당산동에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빌딩.
단순한 상가건물도 아니고 22층까지 올라가는 고층 빌딩이며, 5층부터 19층까지는 호텔이, 22층에는 사우나가 올라가는 것으로 내정되어 있다.
그리고 박호연이 짚었던 위치는 최고층에서 바로 아래쯤이었으니, 20층이나 21층에 자리를 잡아주겠다는 소리일 것이다.
'안마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군···.'
지금 강태한이 일하고 있는 곳은 대놓고 말해서 찜질방에 딸려있는 안마샵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꼭 안 좋기만 한 것은 아니다.
안마를 받기 전이나 받은 후에 뜨거운 물에 몸을 담글 수 있는 건, 상당한 메리트였으니까.
근육의 긴장을 풀어주고 안마의 효과를 보완해줄 수도 있을 뿐더러.
원래 뜨끈한 탕에 있다가 나오면 안마가 땡기고, 안마를 받고나면 탕에 들어가서 뜨끈하게 몸을 지지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이곳의 위치는 그야말로 적절하다고 할 수 있었다.
바로 위층에 사우나가 있으니 그곳 손님들이 자연스레 찾아올 수 있을 것이고, 또 안마를 받은 손님들이 사우나에 들를 수도 있었으니까.
거기에다 아래층에는 호텔까지 자리를 잡고 있으니.
위아래에서 찾아오는 손님들만 상대하더라도 기본적인 유입량은 어느 정도 확보될 터였다.
'원래라면 상상도 못할 위치겠지.'
그만큼 좋은 자리지만, 그런 곳은 임대료가 높기 마련이다.
강태한이 짧은 기간 내에 꽤많은 돈을 모아놓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런곳에 가게를 낼 정도의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부담스럽게 생각하지 말게.”
한편, 강태한의 침묵을 부담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마주 앉아있던 박호연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아버지께선 마지막 순간··· 자네에게 평생 동안 갚아야할 정도의 은혜를 입었음에도 갚지 못하는 걸 걱정하셨었지.”
그는 살짝 감상에 젖은 듯한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 빌딩과 관련된 권리는, 아버지가 마지막까지 갖고 계셨던 몇 안 되는 자산중에 하나라네. 그러니 이걸 자네에게 넘겨주는 건··· 어찌 보면 아버지께서 자네한테 빚을 갚는 것이기도 한 셈이지. 그럴듯하게 들리지 않는가?”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저 추상적인 의미 부여일 뿐이지만, 때로는 그런 것도 중요한 법이다.
특히 이미 죽은 사람에 관해서는 더더욱 말이다.
박호연의 마음을 이해한 강태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 가게라.'
슬슬 독립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강태한은 좀 더 나중의 일로 미뤄두고 있었다.
단순히 금전적인 부분의 문제도 있거니와, 다른 사람에게 고용되어서 일하는 것과 본인이 직접 사업을 벌이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사장이 음식 잘한다고 해서 식당이 다 잘되는 것도 아니고, 문파의 문주(門主)가 무공만 잘한다고 해서 문파가 잘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젊은이가 본인의 실력만 믿고 일을 벌이는 것은 필패(必敗)의 대표적인 공식이다.
때문에 강태한은 좀 더 신중하게,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 당황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갑자기 너무 규모가 큰 이야기가 나와 버렸으니까요.”
“이해하네.”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씀을 하시는데 받지 않을 수도 없죠. 원장님이 말씀하셨던 대로, 저에게 필요한 선물이기도 하고 말이죠.”
적절한 수준을 넘어서도 한참 넘어선, 가히 천재일우(千載一遇)라 부를만한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던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기회는 왔을 때 잡아야하는 법.
강태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들고 있던 서류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아 기쁘군.”
“마음에 들지 않을 수가 없지 않습니까.”
박호연이 웃으며 손을 내밀자, 강태한도 미소를 지으며 그 손을 잡아 서로 악수를 나눴다.
“오늘 시간 내줘서 고마웠네.”
카페에서 나온 후, 박호연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사람이 가는 방향이 달랐기에 여기서 인사를 해둘 필요가 있었다.
“별 말씀을 다하십니다. 이런 약속이라면 세상 사람 모두가 시간을 내고 싶어 할 걸요?”
“하하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만.”
강태한의 말에 박호연이 소소한 웃음을 터트렸다.
“오늘 말한 일들은 내가 알아서 진행해 놓을 테니, 번거로울 건 없을 거야. 물론 나중에 자네가 확인하고 사인 정도는 해줘야겠지만.”
“그렇게 해주시면 저야 편하죠.“
“나도 그쪽이 편하니 서로 좋구만.”
그럼, 다음에 보세다.
박호연은 그 말을 덧붙이고는 뒤돌아서 주차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고, 강태한도 갈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좀 걸었을까.
방금 있었던 제안이 새삼 거짓말 같았다.
‘가게라··· 그것도 서울에다가.'
원래는 대전으로 내려가 가게를 내는 것도 생각을 했었다.
물론 손님이야 서울이 압도적으로 많을 것이고, 이미 쌓아둔 인지도도 있었지만, 그래도 초기비용에서 워낙 크게 차이가 나니까.
그런데 영등포에 이제 막 생기고 있는 신설 고층 빌딩에 가게라니.
말 그대로 기대조차 할 수 없었던 커다란 기회라고 할 수 있었다.
'위치도 좋았지.'
지도로만 확인 해봤을 뿐이었지만, 여의도쪽과 인접해 있으면서 역이랑도 가깝고, 가로막는 건물만 없다면 한강도 충분히 보일 수 있는 위치였다.
물론 안마샵에 한강 뷰는 직접적인 상관이 없을 수도 있겠지만, 사우나와 호텔에 손님이 몰리면 그만큼 샵에도 손님이 올 테니 플러스 요소였다.
“왠지 요즘 알아서 일이 딱딱 맞아 떨어질 때가 있단 말이지.”
딱히 의도한 것도 아닌데,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알아서 굴러들어오는 경우가 몇번 있었다.
영약, 자동차··· 그러다가 이번에는 가게까지.
물론 그냥 굴러들어온 건 아니고, 그만큼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좋은 인연을 맺은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으리라.
그리고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인연의 계기는 모두 강태한의 선행이었다.
뭘 바라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서 베풀었을 뿐인 선행들.
'그렇게 생각하니 뭔가 묘한 기분이네.'
신기하면서도 뿌듯한 느낌.
무림에 있을 적에는 느껴볼 수 없었던, 꽤나 낯선 기분이다.
그래서 그게 좋은 기분이냐, 안 좋은 기분이냐고 누군가 물어본다면.
좀 머쓱하긴 하지만 썩 나쁘지 않은 기분이라는 게, 강태한의 대답이었다.
* * *
다음 날.
갑작스럽게 가게를, 그것도 생각해뒀던 것보다 훨씬 세련된 가게를 갖게 된 강태한이었지만 그렇다고 당장의 일상이 바뀌는 건 아니었다.
'자세한 내용은 차후에 차차 얘기하도록 하지. 다음에는 필요한 서류들도 가져오도록 하겠네.'
카페에서 헤어지기 직전, 박호연은 그런 말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산이라는 게 원래 주고 싶다고 해서 주고 끝나는 게 아닌 것이다.
애당초 빌딩의 공사도 아직 내부공사가 좀 남아있는 모양이었으니, 개업은 조금 나중의 일이었다.
말하자면, 당장은 바뀐 게 아무것도 없다.
그렇기에 강태한은 어제도 평소와 같은 하루를 보냈다.
집으로 돌아가 환약 하나 집어먹은 다음, 저녁 먹고 일찍 잤던 것이다.
그리고 아침에는 평소와 같이 출근.
일찌감치 나와서 목욕탕에서 느긋하게 몸을 풀어준 다음, 샵으로 나오는 것까지 평소대로인 모습이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안녕하세요, 실장님.”
“태한 씨, 왔어?”
강태한과 인사를 나누는 황 실장의 표정이다.
그는 축하를 하는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움으로 슬퍼하는 듯한, 그런 오묘한 표정으로 강태한을 맞이하고 있었다.
“일단 태한 씨가 전화에서 부탁한 대로, 새로 추가되는 예약들은 안 받고 있어.”
다른 게 아니라 전날 강태한과 나눴던 통화 때문.
강태한은 전날 황 실장에게 전화를 걸어, ‘자기 앞으로 예약들을 거절해 달라.'고 말해뒀다.
예약은 손님과의 약속.
이곳에서의 계약은 언제 그만둬도 상관없는 구조였지만, 그래도 예약을 남겨둔 채로 떠날 수는 없으니, 기존의 예약까지만 남겨두고 더 이상 늘어나게 되면 곤란했다.
하지만 그걸 말하면 바보가 아닌 이상 눈치를 챌 수밖에 없다.
드디어 다른 곳으로 가는구나라고.
“축하해, 태한 씨. 더 좋은 곳으로 가는 거지?”
황 실장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전히 상반된 감정이 섞여있는 묘한 표정이었다.
“그래서, 어디 샵으로 가는 거야? 이제는 나도 손님으로 당당하게 안마 받을 수 있으니 좋네.”
“하하··· 사실, 그 일과 관련해서 실장님이랑 이야기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래서 조금 일찍 왔고요.”
강태한은 곁눈질로 슬쩍 시계를 쳐다보며 말했다.
첫 예약 손님이 오기까지는 아직 삼십 분이 남아있는 상황.
원래라면 목욕탕에서 한참 몸을 담그고 있을 시간이지만, 황 실장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탕에서 평소보다 일찍 빠져나온 강태한이다.
“나랑?”
“네. 일단 이야기 먼저 드리면, 다른 샵으로 가는 게 아니라 제 가게를 차리게 됐어요.”
“···어, 진짜로?”
강태한의 말에 황 실장의 표정이 감탄으로 물들었지만, 그러는 와중에 의심하는 기색도 살짝 올라왔다.
“태한 씨라면 알아서 잘 구분했을 거라 생각하긴 하는데··· 수상한 손님한테 투자받고 계약서 사인하고 그런 건 아니지?”
가끔 안마사들한테 이런저런 제안을 하는사람들이 나오곤 한다.
대부분은 다른 가게에서서 스카웃을 하는 거지만 간혹 사기를 치를 치려는 양반들도 나타난다.
‘안마 솜씨가 너무 마음에 든다, 자기 건물에 방이 좀 남는데 독립할 생각은 없냐.' 뭐이런 식으로 말이다.
“뭐 아직 확실하게 정해진 바는 없긴 한데··· 그래도 제가 사람 보는 눈은 좀 있잖아요.”
강태한이 오른손으로 자기 눈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가 봤을 때 박호연은 적어도 그런 부분에서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거짓말은 커녕 과장을 붙이는 것도 못하는, 그런 부류의 인간인 것이다.
“하긴, 태한 씨가 그럴만한 사람은 또 아니지.”
강태한의 말에 황 실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제가 말씀드리려고 했던 건 이게 다가 아니고, 본론이 따로 있는데.”
“본론? 뭔데.”
“제가 따로 가게 차릴 때, 황 실장님도 좀 같이 가시면 어떨까 해서요.”
강태한이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제가 다른 건 몰라도 사람 욕심은 조금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