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62화>
함께한 시간이 오래된 인연끼리는, 때로 말한 마디만으로도 수많은 의미를 나눌 수 있다.
오랜 친우나 동료끼리는 눈짓만으로도 서로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친우와 동료 사이에서도 그럴진데,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온 노부부는 어떻겠는가.
혼자 살아온 나날보다 같이 살아온 날이 더 길어졌을 정도로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온 인연.
두 사람 사이에 긴 대화는 필요하지 않았다.
단지 얼굴을 보고 건넨 ‘사랑한다’는 한 마디의 말로도, 노부(老夫)가 노부(老婦)에게 전하고 싶었던 마음은 충분히 전달되었던 것이다.
다만, 그럼에도 가슴 한 켠이 먹먹해지는 이 상실감만큼은 어쩔 수가 없다.
노인은 힘없이 떨어져 있는 아내의 다른 손을 쥐고 몇 차례 더듬거리다, 앞서 올려뒀던 손 위에 포개어 가지런히 올려두었다.
“그래도 웃으며 갔으니 마음은 편하네.”
그러고는 눈을 감은 그녀의 뺨을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다행히 먼저 떠나간 아내는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고통 같은 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표정이, 아내를 먼저 보낸 노인에게는 정말로 큰 위안이었다.
노인은 복잡한 감정이 담긴 미소를 짓고는, 아내의 어깨를 토닥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호연아.”
“···네, 아버지.”
아버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뒤에 서있던 박호연의 몸이 순간 움찔거렸다.
아버지가 이름을 부르기는커녕 자길 알아보는 일조차 없을 것이라고, 이미 예전부터 체념하고 있었던 탓이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고마워.”
“···아닙니다. 괜찮아요, 아버지.”
박호연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본인은 단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거기서 아버지가 '고생했다' 라고 한 마디 해준 것만으로도··· 이미 기적과도 같은 보상을 받은 셈이었다.
“아이처럼 우는구나.”
“그러게요.”
흐느낌은 없었으나 그의 눈에선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이미 적지 않은 나이를 먹은 몸이었지만, 울음을 참기에는 너무 많은 상황들이 한꺼번에 일어나고 있었다.
“너는 항상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단다.”
“아버지도요. 아버지도 항상 자랑스러운 아버지셨어요.”
박재성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지금이 기적과도 같은 시간인 건 박호연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아이처럼 우는 아들을 꽉 끌어안았다.
“사랑한다.”
“저도 사랑합니다. 아버지.”
그는 아들의 등을 토닥여준 다음, 앞으로 걸어갔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반드시 인사를 해둬야 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의 뒤를 따라 병실로 들어와 있었던 강태한.
강태한의 앞에 멈춰선 박재성은 악수를 권하듯 오른손을 내밀었다.
강태한이 내민 손을 붙잡자, 이윽고 양손으로 그 손을 꼭 붙들었다.
“귀인 덕분에, 이룰 수 없는 소망을 이뤘습니다. 정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그러고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진심이 절절하게 배어나오는, 그런 목소리였다.
“다만 평생 동안 잊어서는 안 될 은혜를 입었는데, 정작 이 늙은이의 평생은 얼마 남지 않지 않았으니, 어떻게 감사를 표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노인의 진심에 강태한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지금 그 말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그렇습니까.”
강태한의 말에 노인은 푸근한 미소를 지었다.
“다시 한 번 고맙습니다, 귀인. 덕분에 편히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마지막 힘을 짜내듯이 강태한의 손을 꽈악 쥐어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몸은 천천히 앞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강태한은 노인의 몸을 받쳐 들었다.
그의 몸에서는 이미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남아있던 기운을 바닥까지 긁어모아 억지로 버텼던 것이다.
화려하게 타오르고 꺼져버린 작은 촛불.
그리 길지는 않았지만,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노인에게는 필시 힘겨운 시간이었으리라.
허나, 그럼에도.
노인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표정과 함께 선명한 미소가 남아있었다.
* * *
“정말··· 고마웠네. 하지만 한동안 바쁠 것 같아서 말이야. 일이 좀 정리되면 연락하도록 하겠네.”
아버지까지 그렇게 숨을 거두고 난 후, 박호연은 강태한에게 그렇게 말했다.
부모님 두 분이 함께 돌아가신 셈이니, 앞으로 할 일도 많을 뿐더러 심적으로도 힘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강태한 또한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었다.
‘태한 씨한테 연락하길 잘했다고 생각하고 있어.’
다만 그나마 다행인건, 박호연의 표정이 힘들어 보일지언정 어두워 보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어머니와 아버지 모두 마지막에 해후를 하면서 소원을 이루셨고, 덕분에 두 분 다 웃으면서 돌아가셨으니, 그야말로 최선의 결말을 맞은 덕분이었다.
“밤을 샌 보람은 있었군.”
몇 시간 전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강태한은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전에도 몇 번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구체적인 뭔가를 바라고 호의를 베풀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전화로 그의 사정을 들었을 때, 안타까운 일이라는 생각이 순간 들었을 뿐이다.
그렇지만 마지막 순간, 노인에게 진심어린 감사를 받았을 때, 강태한은 대전으로 내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떠올렸다.
생각 이상의 보람을 느낀 것이다.
'물론 성인군자 행세를 할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옛 스승이 말했던, ‘다른 사람에게 감사를 받을 수 있는 삶을 살라'는 가르침대로는 살아가고 있지 않나.
그런 느낌이 들었다.
.
“이게 다 웬 거냐?”
그때, 방에서 나온 누군가가 눈을 비비며 물었다.
강태한의 아버지, 강호연이었다.
그는 느지막한 걸음으로 강태한이 있는 부엌으로 걸어왔다.
“아버지랑 먹을 아침밥이요.”
“밥상 차려놓은 거는 보면 알겠는데··· 그런데 네가 어쩌다가 지금 시간에 집에 있는 거냐? 새벽부터 내려온 거야?”
“대전에 볼 일이 좀 있었어요. 그보다 마침 타이밍 좋게 딱 일어나셨네.”
강태한은 대답을 대충 얼버무리며 압력밥솥의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하얀 김과 함께 고소한 냄새와 쌉쌀한 한약재 냄새가 함께 퍼져 나왔다.
“그게 다 뭐냐?”
“백숙이요. 아버지 몸보신 좀 시켜드리려고요.”
압력밥솥 안에서 푹 익은 닭고기를 꼬챙이로 찍어 넓은 접시에 옮겨 담고, 그 위에 뽀얗게 우러난 육수를 뿌리고 삼을 건져 올린다.
저번에 캐뒀던 십오 년 정도 묵은 산삼.
굵기도 굵고 단단한 것이, 얼핏 보기엔 산에서 자란 게 아니라 사람이 기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튼실한 놈이었다.
아버지에게 드릴까 싶어 안 그래도 따로 챙겨뒀었는데, 이참에 아예 보양식을 해드리기로 결심한 강태한이었다.
“뭔 아침부터 백숙을···.”
“오늘 같이 등산이나 갈까 해서요. 그래도 산에 오르려면 아침은 든든하게 먹고 가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준비 좀 해봤죠.”
사실은 새벽에 박호연의 병원에 있는 동안 문득 자신의 아버지가 생각난 탓이었지만, 강태한은 적당히 말을 둘러대며 옮겨둔 백숙을 식탁으로 가져왔다.
“이건 인삼이냐?”
“네. 어제 마트에 갔는데 백숙 세트라고 따로 파는 게 있어서 사뒀어요.”
“마트에서 샀다고? 허, 서울은 인삼도 튼실한 놈들로만 파는 모양이구나.”
물론 거짓말이었다.
산삼을 넣었다고 하면 괜한 부담을 가지실 것 같아 꺼낸 말이다.
보양식도 편한 마음으로 먹는 게 훨씬 흡수가 잘됐으니까.
“여기, 다리부터 드세요.”
강호연이 잠시 머뭇거리다 가슴살 쪽으로 젓가락을 뻗으려하자, 강태한이 닭다리를 뜯어 강호연의 그릇 위에 올렸다.
그것도 양쪽 다리 모두를 말이다.
그러자 강호연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뭐하는 거냐, 이게?”
“아버지 드시라고 만든 백숙이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임마. 백숙에서 양쪽 다리를 다 주는 건 장모님 이후로 처음이다.”
그 갸륵한 마음은 알겠으니 마음만 받기로 하며, 강호연은 다리 한 쪽을 강태한의 접시로 돌려놓았다.
그러고는 남아있는 닭다리를 집어 들어 한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잠시 후, 강호연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동그랗게 뜨였다.
'이 녀석··· 요리 솜씨가 제법 괜찮네?'
살짝 힘을 주면 뼈에서 고기가 스르륵 발라질 정도로 푹 익혔지만, 그러면서도 고기의 씹는 맛은 야들야들하게 잘 살려놓았다.
여기에 안쪽까지 고기의 밑간이 적당하게 스며 들어있고 인삼과 대추의 향도 적절히 배어있으니, 굳이 따로 소금을 찍어먹지 않아도 싱겁다는 생각은 들지 않을 정도였다.
압력밥솥의 특성상 한 번 불 위에 올려놓으면 다시 확인을 할 수도 없으니, 처음부터 간을 잡아두고 조리시간까지 딱 맞게 맞췄다는 뜻이었다.
“요즘은 대학에서 요리도 가르쳐 주냐?”
“아뇨? 왜요.”
“왜긴··· 맛있어서 그러지.”
강호연은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한 번 긁적이고는, 날갯죽지 쪽을 큼직하게 뜯어 접시로 가져왔다.
그걸 보는 강태한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
“왜.”
“제가 백숙 같은 것도 종종 해드리고, 안마도 자주 해드릴 테니까, 오래오래 건강하게 사십쇼.”
강호연은 강태한을 빤히 쳐다보다, 씹고 있던 고기를 삼키고서 한 마디 했다.
“혹시 볼 일이 있었다는 게 상갓집이냐?”
“예? 아니··· 뭐 어찌 보면 비슷하긴 한데.”
왠지 속마음을 들킨 거 같아 쑥스러운 기분이다. 강태한이 어깨를 으쓱이자, 강호연이 피식 웃으며 덧붙이듯이 말했다.
“걱정하지마라. 예전에 사주 봤을 때, 적어도 100살까지는 살 팔자라고 했으니까.”
그러고선 강호연은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대화 주제가 조금 낯간지러웠던 탓일까, 아니면 맛이 생각보다 좋았던 탓일까, 두 사람은 말없이 식사에 집중했다.
“아흐, 잘 먹었네.”
마지막으로 닭의 목까지 알뜰하게 발라먹은 강호연이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말했다.
그걸 본 강태한이 넌지시 말했다.
“아직 배부르시면 안 되는데.”
“왜? 아니, 뭘 또 준비했어?”
“백숙을 먹었으면 닭죽도 먹어야죠.”
그러면서 강태한은 미리 물에 불려두고 있던 찹쌀과 잘게 썰어놓은 야채를 꺼내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강호연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주 그냥 제대로구나.”
“배부르시면, 뭐··· 안 드셔도 되고요.”
“안 먹겠다고는 말 안했다.”
기껏 정성으로 육수를 우려냈으면 써먹어야하지 않겠는가.
백숙을 먹었으면 닭죽.
그걸 강태한에게 가르쳐준 게 다름 아닌 강호연이었다.
그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가볍게 입맛을 다셨다.
* * *
프로야구선수들은 경기가 있는 날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코칭스태프들과 간단한 미팅과 함께 컨디션 체크 시간을 필수적으로 갖는다.
그 날의 몸 상태가 어떠한지, 좋지 않다면 그래도 시합에 나갈 순 있는 수준인지, 아니면 내보낼 수 없는 상황인지.
피지컬적인 부분과 함께 멘탈적인 부분까지도 함께 체크한다.
비유를 들자면 그날 하루 일과의 첫 단추를 꿰는 중요한 과정이라고 할까.
이는 대전의 한하 호크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헌데, 요즘 들어 한하에서는 목요일마다 불편함을 호소하는 선수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해당 현상은 다른 곳으로 원정을 나가는 어웨이 경기 때는 아무런 일도 없지만, 홈에서 경기를 할 때에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이쪽 어깨가 뻐근하다고?”
“아유, 그렇다니까요. 아이고, 아이고! 그렇게 누르시면 아픕니다, 코치님. 잠을 잘못 잤나, 영 뻐근하다니까요.”
배터리 코치가 바깥쪽의 어깨를 누르자, 이광호가 호들갑을 떨며 몸을 흔들었다.
“스읍··· 경기에 지장 없겠어?”
“경기 나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을 것 같긴한데··· 그래도 컨디션에는 영향이 있을 수밖에 없다고 할까, 좀 풀고 나갔으면 좋을 것 같다고 할까···.”
배터리 코치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이광호는 슬쩍 눈치를 보면서 말을 늘였다.
그러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본론을 꺼내놓았다.
“그러면 안마라도 좀 받으면 풀리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좀 드는데요! 그러고 보니 오늘 강 선생님도 오시지 않습니까? 코치님이 감독님한테 말씀이라도 한 번 좀 드려보면 어떤가···.”
이광호는 말을 하던 도중에 말을 흐렸다.
배터리 코치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얼굴에 냉소를 짓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아까부터 다시 누르기 시작했는데, 눈치 못 챘나봐?”
코치는 아까 살짝만 눌렀는데 이광호가 호들갑을 떨었었던 곳과 똑같은 위치를, 말없이 꾹꾹 누르고 있었다.
물론, 이광호는 아무렇지 않았다.
이광호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저 안마 한 번만 더 받고 싶습니다, 코치님.”
“안 돼.”
“에이. 어떻게 안 됩니까?”
“괘씸해서 더 안 돼. 컨디션은 괜찮은 거지?”
“···예. 전에 안마 받은 이후로는 잠도 푹잡니다.”
그제야 사실대로 털어놓는 이광호다.
배터리 코치는 이상 없음을 체크하며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클대로 큰 어른이 안마 한 번 더 받아보겠다고 꾀병을 부리고 있는 상황.
이 비슷한 상황을 오늘만 세 번째로 겪고 있는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