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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 안마하신다-61화 (61/286)

<천마님 안마하신다 61화>

'이 영화 생각보다 너무 슬프네.'

그녀는 그 날의 일을 기억하고 있다.

예전에 어느 영화를 보며 그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비록 영화의 제목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그게 어느 장면이었는지는 떠올릴 수 있다.

남편을 잃고 홀로 살아가던 할머니가 쓸쓸히 돌아가시는 장면이었다.

그쯤이 한참 노후를 걱정하던 시기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그날따라 감수성이 예민했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장면에서 갑작스레 눈물이 나왔었다.

'걱정하지 마.’

그러자 옆에 앉아있던 그이가 그렇게 말했다.

이제 감명 깊게 봤던 영화의 제목도 제대로 기억할 수 없는 나이가 되었건만, 그때 그이의 얼굴표정과 목소리만큼은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당신이 죽을 땐, 내가 꼭 옆에 있어줄 테니까.’

그때 그이의 표정이 참 어울리지도 않거니와, 쓸 데 없이 진지해보여서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었다.

영화의 감상이나 울적해진 기분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질 정도로 한참을 웃었다.

오랜 세월을 함께 보내며 둘이서 차곡차곡 쌓아왔던, 수많은 추억들 중에 한 편일 뿐인 이야기.

하지만, 요즘 들어 그 날의 기억이 유독 자주 떠올랐다.

분명 그이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세심함이 없어 기념일 같은 건 죄다 까먹고 지내던 양반이었지만, 그래도 본인이 직접 말한 약속들은 놀랄 정도로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호연아.”

“어머니! 정신이 좀 드세요?”

침대에서 천천히 눈을 뜬 그녀는 희미하게 보이는 시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탁하고 뿌연 눈으로는 주변을 제대로 확인하는 것 조차도 힘들었다.

“호연아.”

“네. 저 여기 있어요.”

박호연은 혹시나 어머니의 말씀을 놓칠까봐 가까이 다가와 귀를 가까이했다.

코에 인공호흡기를 착용하고 있기도 했지만, 그녀의 목소리 자체가 너무 미약했던 탓에 멀리선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네 아버지는?”

“아버지는 아래층에 계세요.”

“···그래.”

예전부터 참으로 약속 시간을 못 지키는 양반이다.

그녀는 살짝 힘이 들어가 있던 고개를 다시 베개에 뒤인 다음,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박호연은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 최대한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 마세요. 곧 있으면 올라오실 겁니다.”

박호연의 말에 그녀는 미세하지만 분명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도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예전부터 약속시간도 참 못 지키고, 기념일을 제대로 챙겨본 적도 손에 꼽는 양반이지만 그래도 본인이 직접 꺼낸 약속들만큼은 반드시 지킨다.

설령 그게 영화를 보다 눈물을 흘리는 아내를 달래기 위해 즉흥적으로 꺼낸 약속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그녀의 남편, 박재성은 그런 사람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기다리기가 좀 힘드네···.'

본인이 늦은 것이니 잠시 잠을 자는 것 정도는 그도 뭐라 할 수 없으리라.

그녀는 다시 스르륵 눈을 감았다.

* * *

원기가 고갈된 몸은 사막에 심어진 나무와도 같다.

몸이 양분을 얻으려 해도 이미 근간에서부터 말라 붙어있으니 그럴 수가 없고, 체내의 순환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상태로 서서히 말라 죽어가는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사막의 나무는 다른 곳으로 옮겨 심거나 물을 퍼부어 억지로라도 되살릴 방법이 있지만, 사람의 몸은 그럴 수가 없다는 점이다.

본래 태어날 때 타고나는 사람의 원기.

그것은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시킬 수 없고,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고갈되는 속도를 늦추는 것 뿐이다.

그렇기에, 죽어가는 노인의 원기를 되찾게 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만약 아직 체내에 남아있는 원기가 있다면.

본능조차도 거스르고 간직해둔 원기가 있고, 그 양이 충분하기만 하다면, 그걸 순환시켜 잠시만이라도 몸의 상태를 회복시키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중요한 건 본인의 의지긴 하지만.’

외부에서 아무리 깨우려고 해도 본인의 의지가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마저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적어도 이 경우에는 그럴 걱정은 할 필요가 없어보였다.

강태한이 그의 명문혈에 손을 올려 체내에 기감을 펼치는 순간, 단전에 남아있던 원기가 반응하여 미약하게나마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으니까.

'···대충 알겠군.’

기력이 쇠해 거의 고갈되어가던 순간, 노인은 무의식적으로 명문혈에 있는 원기를 일부 떼어내어 하단전에 남겨두었다.

그건 그 자체로 대단한 일이었지만, 정작 그걸 어떻게 활용해야 할 줄을 몰라 어쩌지도 못하고 그냥 간직해둔 상태로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원래라면 그저 그 상태로 버티고만 있다가 아무도 모르게 서서히 사그라질 운명이었겠지만···

누군가가 상단전까지 이어지는 길을 뚫어놓고 그곳까지 이끌어 낼 수만 있다면, 그 뒤에는 충분히 스스로 뜻을 이뤄낼 수 있을 터였다.

그리고 강태한에게 그 정도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강태한은 체내에 뻗어낸 기감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혈도의 상태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아직 살아있는 혈도들을 파악한 다음, 하단전에서부터 상단전까지 이어지는 가상의 선을 이어낸다.

그리고 그 선을 이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다.

충분한 가능성을 찾아낸 강태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명문혈에 올려뒀던 손을 떼어냈다.

그리고 곧바로 노인의 몸 곳곳을 지압하여 각각의 혈자리들에 탁기가 빠져나갈 숨구멍을 틔워놓기 시작했다.

“조금 힘드실 수도 있습니다, 영감님.”

다만 그의 손은 평소와 다르게 섬세하면서도 상당히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강태한이 평소에 하는 안마는 기본적으로 회복되는 것을 전제로 깔아두고 하는 것.

허나 노인의 몸은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있고, 회복 또한 어려웠기에 기본조건부터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

“···흐으.”

허나 다행히 그 효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침대에 앉아있던 노인, 박재성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온 것이다.

물론 이성과는 관계없이 본능적으로 뱉은 탄성이고, 아픔을 호소하는 외침이었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감각이 되살아났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었다.

'잘 풀려나가고 있어.'

어찌됐거나 긍정적인 표식임에는 틀림이 없다.

혈도 곳곳에 숨구멍을 틔워낸 강태한은, 각각의 혈에 손을 얹어 탁기를 빼낸 다음, 천천히 전신을 주물러 혈류의 순환을 활성화시키는 일을 반복했다.

그렇게 탁기를 제거하고 전신을 주무르기를 두 번, 세 번, 여섯 번쯤 반복되었을까.

'···길은 뚫렸다.'

어느 순간부터 노인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기 시작하더니, 퀭하게 처져있었던 탁한 눈에도 빛이 맺히기 시작했다.

하단전에서부터 상단전까지 이어지는 길이 뚫리고 상단전에 원기가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는 증거.

그렇게 시간이 좀 흘렀을까.

강태한이 한참 그의 어깨 쪽을 주무르고 있었을 쯤.

“···시원하군.”

처음 듣는 진중한 목소리가 병실에 울렸다.

강태한이 어깨를 주무르던 손을 놓고 앞으로 나오자, 박재성은 또렷하게 총기가 맺혀있는 눈으로 강태한을 쳐다보았다.

두어 시간 전까지 그는 폐인처럼 퀭한 눈을 하고 침대에 걸터 앉아있을 뿐이었지만, 지금은 눈빛이 맑을 뿐더러 전에 없던 품위마저도 느껴지고 있었다.

잠시 동안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침묵.

박재성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젊은이··· 아니, 나랑 동년배쯤 되는가?”

“지금은 젊은이로 합시다. 영감님.”

강태한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박재성 또한 희미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어느 쪽이건 자네한테 큰 신세를 진 것 같은데··· 아무래도 조금만 더 부탁을 해야 할 것 같아.”

그는 눈짓으로 문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에겐 지켜야하는 약속이 있네. 초면에 미안하지만, 나를 아내에게 좀 데려다 줄 수 있겠나?”

“물론이죠.”

강태한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어깨를 침대 높이에 맞춰 숙였다.

잠시 후, 노인은 강태한에게 부축을 받긴 했지만, 그래도 자신의 두 발로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 * *

“원장님, 죄송하지만···.”

“그래, 나도 알고 있네.”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할 수도 있다.

담당의사가 굳이 꺼내지 않은 말에 박호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또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침대 옆에 놓여있는 모니터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순간 외면하고 싶어질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방금 전에 의식을 차리시고 짧지만 대화도 나누셨기에 고비를 넘긴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아무래도 헛된 기대였던 모양이다.

어머니는 머지않아 다시 의식을 잃으셨고 기계들은 부정적인 수치들을 모니터에 기록하기 시작했다.

'아니, 조금이라도 어머니랑 대화를 나눈 게 다행인 건가.'

박호연은 애잔한 눈으로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옆에서 그를 지켜보고 있던 담당의사는 조용히 자리를 피했다.

이럴 때는 가족끼리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편이 바람직했다.

“박 선생.”

“네, 원장님.”

그런 그를 박호연이 불러 세웠다.

따로 부탁할 일이 있는 탓이었다.

“간호사들한테 아버지 좀 여기까지 모셔다 달라고 전해주겠어? 아무래도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아버지는 아무것도 못하고 가만히만 앉아있는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어머니의 병실에 찾아오셨다.

분명 당신께서도 어머니의 모습을 지켜보고 싶어 하실 것이라고, 박호연은 생각했다.

물론 강태한에게 부탁한 일도 있고, 아직 희망을 버린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이 항상 생각대로만 풀리지는 않는 법이었다.

“알겠습니다. 간호실에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고마워.”

담당의사는 꾸벅, 고개를 숙인 다음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잠시 동안 병실에는 조용히 기계음만 울리고 있었다.

“···어머니?”

그때, 어머니의 눈이 천천히 뜨이기 시작했다.

허나 모니터의 수치는 그대로였기에, 박호연은 기뻐하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그리 좋은 징조가 아님을 직감한 것이다.

“워, 원장님.”

그런 와중에 방금 나갔었던 박 선생이 다시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병실인 만큼 그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왜인지 모르게 굉장히 당황한 기색이었다.

하지만 박호연은 머지않아 그가 당황하고있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복도에서 병실 안으로.

한 노인이 두 발로 걸어들어온 것이다.

“···아버지?”

그 노인, 박재성은 허리와 어깨를 편 채로 뚜벅뚜벅 걸어와 병실을 가로질렀다.

아들이 기억하고 있던 예전의 아버지와 똑같은 걸음걸이였다.

“임자.”

그는 침대에 누워있는 아내의 옆에 섰다.

그는 한쪽 무릎을 꿇어 아내와의 눈높이를 맞췄다.

“나 왔소.”

감정이 절제된 담담한 목소리.

그러자 침대에 누워있던 그의 아내, 신미경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드리워졌다.

“···그래도 아예 늦지는 않았네.”

“임자가 기다려준 덕분이지.”

아내의 미소에 그 또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는 아내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쥐고서 말했다.

“그동안 임자 덕분에 행복했어. 내가 많이 사랑해.”

그 말에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 마음은 다 알지. 그래도, 이렇게 얼굴보고 말로 들으니까 참 좋네그려.”

그리고 그녀는 더욱 선명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소녀와도 같은, 그런 맑은 미소였다.

그녀는 한동안 조용히 남편을 바라보다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 다음에는 평소처럼 느지막하게와··· 암만 늦어도, 내 화 안 낼 테니까.”

알았지?

그녀는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리다, 그대로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박재성은 그런 아내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 들고 있던 손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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