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53화>
“태한 학생이라···."
박호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 이름을 되뇌었다.
예전에 계룡산에서 우연히 만난 학생의 이름.
그는 실족하여 언덕에서 굴러 떨어진 친구, 신준호를 구해줬을 뿐만 아니라, 사고 이후 의식을 찾지 못하고 병실에 누워있자 A/S서비스마냥 직접 찾아오더니 의식마저도 되찾아준 학생이었다.
박호연은 특히 그때 강태한이 그의 친구, 신준호의 의식을 깨우던 순간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뒷덜미에 손을 얹고 맥박이라도 짚는 건가 싶었는데, 갑자기 ‘할 수 있겠네요.'라고 말하더니 머지않아 정말로 신준호의 의식이 되돌아왔던 것이다.
두 눈으로 봤지만 그럼에도 믿기 힘든 광경.
일반인이 봐도 믿기 힘들었겠지만, 의사가 봤을 때는 더더욱 믿기 힘든 광경이었다.
알고있는 의학적 지식들로는 설명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의사로선 차라리 우연의 일치로 일어난 일이라고 치부하는 쪽이 오히려 납득하기가 편할 정도.
이런 식으로, 뭐라 잘 설명하긴 힘들었지만, 강태한이라는 사람에겐 의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강태한이 채서윤에게 큰 도움이 될지도 몰랐다.
채서윤이 앓고 있는 질환들은 하나같이, 의학적적인 치료로는 눈에 띄는 효과를 내기가 힘든 만성적인 질환들뿐이었으니까.
"물론 만나본 적은 있죠. 그런데 왜요?”
다만 박호연은 방금 떠올린 생각들을 굳이 입에 담지 않고 다른 말을 꺼냈다.
그날 있었던 일을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의 능력이 무엇이고 어느 부분까지 활용될 수 있는지 알고 있는 건 아니었다.
자칫 오지랖을 부렸다가 태한 학생이 ‘그런건 할 수 없다' 라고 말하면 얼마나 난감하겠는가.
그렇게 되면 서윤 씨도 괜한 기대를 품었다가 실망하게 될 수 있으니, 여러모로 말을 아끼는 편이 좋았다.
“아, 내일 태한 학생이 저희 집으로 오기로 했거든요.”
한편 채서윤은 박호연의 말에 가볍게 손뼉을 마주치며 조금 들뜬 목소리로 대답했다.
“원래 남편이 밖에서 본다고 했었는데, 듣자하니 남편이 신세진 것도 있고, 저도 한 번 만나보고 싶은 것도 있고 해서, 아예 집으로 초대해서 식사라도 한 번 대접해드리자고 했었죠.”
“아하. 그랬군요.”
박호연은 조그맣게 탄성을 터트리고는, 피식 웃으며 뒤에 말을 덧붙였다.
“준호 녀석은 진짜 복 받은 놈이라니까요.”
집으로 손님을 초대해서 식사대접이라니.
근래에 들어서는 좀처럼 듣기 힘들어진 말이다.
게다가 제수씨의 요리솜씨는 한 번 먹어본 사람들은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뛰어났으니, 단순히 마음씨만 고운 수준이 아닌 것이다.
“후후, 별 말씀을 다 하시네요.”
박호연의 말에 채서윤은 쑥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젓다가, 괜스레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러다 문득 뭔가를 떠올린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호연 씨 부모님께서는 요즘 좀 어떠세요? 괜찮아지셨어요?”
그녀의 말에 순간 커피 잔을 들어 올리던 박호연의 손이 멈춰 섰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으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뭐, 항상 비슷하시죠.”
"꼭 쾌차하시길 바라요.”
“감사합니다.”
순간 박호연의 얼굴에 내려앉은 어두운 기색.
채서윤은 머쓱한 표정으로 화제를 마무리했고, 두 사람 사이엔 잠시 동안의 침묵이 흘렀다.
* * *
“흐으으응?!”
강태한이 양쪽 어깨를 지그시 누르는 순간, 의자에 앉은 김씨의 입에서 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양반 좀 보게. 뭔 엄살이야?”
“아니, 엄살은 아플 때 하는 말이고, 이건 아픈 게 아니라··· 허어엉?”
옆에 있던 최씨가 나무라듯이 말하자 거기에 반박을 하던 김씨였으나···
강태한의 손이 어깨 안쪽을 주무르자 다시 한 번 괴상한 소리가 새나왔다.
당혹감과 쾌락이 반쯤 섞여있는 목소리.
거기에다 표정은 또 어찌나 묘한지, 마치 이목구비가 따로 움직이는 것 같은 생생한 표정이었다.
마치 본인의 감각을 본인이 주체하질 못해 얼굴로 빠져나오는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그동안 이십 년 정도 봐온 사이지만···.'
그런 최씨도 김씨의 이런 표정은 처음 봤다.
그쯤 되자, 옆에 있던 최씨도 이게 엄살이나 과장이 아니라 진짜 반응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대체 어떤 느낌이길래.
약간의 공포.
하지만 그 이상의 기대감.
그렇게 지켜보고 있는 사이, 김씨의 안마는 마무리를 향해 달려가고···
"흐아아."
안마가 끝나자, 김씨는 깊은 한숨을 뱉으며 테이블 위에 엎드렸다.
달리 말은 없었지만, 노곤하게 풀어진 표정이 그의 만족감을 대신 표현하고 있었다.
“그럼, 이번엔 아저씨 차례죠?”
“아, 어. 그래.”
테이블 위에 늘어져있는 김씨의 표정.
어떤 느낌인지는 상상하기 힘들지만, 적어도 굉장히 기분이 좋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강태한에게 등을 돌리는 최씨의 기대감이 한층 올라갔다.
헌데.
“끄어어어억!”
기분 좋은 신음에 가까웠던 김씨 때와 달리, 최씨의 입에선 절규와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왠지 모를 배신감에 뒤를 돌아보려는 최씨였으나···
강태한이 어깨를 짚고 있으니, 왠지 힘이 빠져 고개가 잘 돌아가질 않았다.
“아저씨는 좀 많이 뭉쳐있네요.”
반면 강태한은 아까 전과 같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없이 손을 움직일 뿐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안마라는 건 대상에 따라 조금씩 바뀔 수밖에 없다.
몸의 체질과 상태는 사람마다 다르고, 설령 같은 사람이 다시 온 것이라 해도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
그런 의미에서.
“좀 아플 수 있습니다.”
앞에 김씨 아저씨는 스트레칭을 꾸준히 해온 모양인지, 근육과 혈도에 기력이 쇠해지긴 했지만 뭉쳐있는 곳은 별로 없었다.
그렇기에 몸에 탄력을 더해주고 생기를 되찾도록 하는, 비교적 고통이 덜한 안마를 주로 했지만.
이 최씨 아저씨 같은 경우는 작은 호두마냥 단단하게 뭉친 곳이 어깨와 허리에 몇 군데 있었다.
당연하지만, 여길 누르면 상당한 고통이 수반될 수밖에 없다.
만약 가볍게 어깨만 주무른다면야, 적당히 피해서 하면 되겠지만.
‘아버지의 지인 분들인데 대충 할 순 없지.'
하나하나 꼼꼼하게 성실히 풀어주는 강태한이다.
물론 샵과는 달리 안마 후 수면시간이 없기에 적당히 힘 조절은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고통은 비명을 터트리고도 남을 정도였다.
"흐어어어."
어느 순간부터는 비명도 없이 앓는 소리만 내고 있는 최씨 아저씨.
그는 김씨 때와는 다르게 일그러진 얼굴을 짓고 있었다.
“나도 표정이 저랬나?”
“아니. 김씨는 그냥 온화했지.”
"하긴, 최씨가 엄살이 좀 많어.”
그런 최씨의 모습이 김씨와 강호연에게는 그냥 이상하게만 보일 뿐.
다만 고통을 견디기에도 벅찬 탓에, 최씨의 귀에 둘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안마가 아니라 고문을 당하고 있는 중이라고 해도 믿을만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최씨, 괜찮어?”
“괜찮은 수준이 아니라··· 완전 날아 다니겄는디."
안마가 끝나고, 통증이 가실 정도로 충분한 시간이 지나자, 최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활기찬 얼굴로 팔다리를 움직였다.
“나는 태한이가 나만 아프게 하는 줄 알았지!”
솔직히 안마를 받는 도중에는 ‘태한이가 나한테 악감정이 있나’, ‘김씨보다 용돈 덜 줘서 이러나 하는 의심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어찌됐거나 효과는 만족스러웠으니까.
그 효과를 만끽하고 있는 지금에 와선, 오히려 좀 더 안마를 받고 싶을 정도다.
“최씨 아저씨는 근육이 좀 많이 뭉쳐있어서, 그걸 풀어놓으려면 어쩔 수 없었어요.”
“그치? 하긴, 태한이가 나한테 그럴 리가 없지, 암.”
“대신 안마 전후 차이는 최씨 아저씨가 좀더 크게 실감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네요.”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강태한.
그러자, 옆에서 최씨의 반응을 지켜보던 김씨가 은근슬쩍 다가와 물었다.
“그 안마 좀 더 해주면 안 되나?”
“하긴 뭘 더 해! 태한이한테 안마 받을 거면 그 뭐야, 서울 올라가서 돈 내고 받어!”
그러자 옆에 있던 강호연이 그를 붙잡았다.
“아니 왜 그래? 그냥 좀 더 받고 싶다는 건데.”
“오늘 태한이 쉬는 날이라고! 지금 안 그래도 내가 태한이한테 얼마나 미안한데!”
듣고 보니 강호연의 말도 맞다.
그 말에 김씨는 물론이거니와 최씨도 머쓱한 표정이 되었다.
휴일에 서울에서 대전까지 내려온, 조카뻘 되는 애한테 안마를 조르는 게 그렇게 어른스러운 모습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괜찮아요, 아버지. 근데, 혹시 시장하진 않으세요?”
강태한은 싱긋 웃으며 손을 젓더니, 눈으로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슬슬 점심을 먹을 시간이 된 것이다.
“그러고 보니, 밥 때가 됐네."
“왠지 평소보다 더 허하기도 하고.”
안마를 받으면 아무래도 배가 좀 허해지는 법.
최씨와 김씨가 살살 배를 문지르며 시계를 쳐다보자, 강태한이 빙긋 웃으면서 문 쪽을 가리켰다.
“이렇게 된 거 다 같이 식사나 하러 가시죠. 제가 한 끼 대접해드리고 싶네요.”
“네가 밥까지 산다고? 에이.”
“안마도 받았는데, 아저씨들이 살게.”
손을 저으며 말리는 최씨와 김씨.
하지만 강태한 또한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저 첫 휴가 때 용돈까지 챙겨주셨는데, 제가 그 정도는 대접해드려야죠. 이 근처에 새로 생긴 소고기집이 있는데, 좀 괜찮더라고요."
일단 가시죠.
그러고 강태한은 앞장서듯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먼저 가게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다
그 뒤를 지켜보고 있던 김씨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강 사장이 ··· 아들 하나 참 잘 키웠네.”
“우리 민수가 태한이 반만 닮았으면.”
"에이, 뭘. 혼자 잘 컸지. 그보다 애 무안하게 하지 말고 빨리 가자고.”
강호연은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아들 자랑을 애써 억누르며, 재촉하듯이 최씨와 김씨의 등을 떠밀었다.
* * *
다음날, 목요일 아침.
오늘은 한하가 어웨이 경기로 부산에 내려가 있어 출장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강태한은 일찌감치 일어나 차를 끌고 집을 나섰다.
그가 향한 곳은 신준호의 야산.
그 목적은 당연히 약초를 캐가고 영약을 보충하기 위함이었다.
'이번에는 좀 많이 가져가는 게 좋겠지.'
이젠 마음대로 운용할 수 있는 내공의 양도 꽤 되기 때문에, 한 번에 소화시킬 수 있는 영약의 양도 크게 늘어나 있었다.
그 양은 대충 어림잡아도 대략 두 배 정도.
거기에 영기를 흡수하는 속도 또한 더욱 빨라져서, 직접 만드는 환약 정도는 예전처럼 따로 자세를 잡을 것도 없이 그냥 씹어 삼키면 될 정도다.
물론 그렇다고 기의 갈무리도 하지 않고 허겁지겁 영약을 퍼먹는 짓은 할 수 없지만, 예전보다 영약의 소모속도가 빨라진 것도 사실이었다.
“어째 갈수록 더 요령이 붙는 느낌인걸.”
다만 영약이 부족할 걸 걱정할 필요는 없어보였다.
방금 캐낸 야관문의 흙을 털어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강태한.
매번 새삼스레 느끼는 거였지만, 배낭을 채우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사실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단순히 요령이 붙는 것을 떠나, 내공이 쌓인 만큼 기감을 펼칠 수 있는 횟수도, 그 범위도 늘어나 있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차가 있다.
예전에는 배낭 하나를 채우면 돌아갈 준비를 하거나 캠핑 준비를 해야 했지만, 이젠 자동차 트렁크에 실어놓고 다른 배낭을 들고 올라오면 되는 것이다.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양이 확 늘어난 것.
이미 캐놓은 양만해도 원래 들고 다녔던 양의 두배가 넘었으니, 대충 계산해 봐도 한동안은 약초를 캐러 오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그래도 일단 속도 좀 더 내볼까."
시간을 확인한 강태한이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오후에는 신준호와의 점심 약속이 있었기에, 강태한은 산을 오르는 발걸음에 좀 더 박차를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