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 안마하신다-49화 (49/286)

<천마님 안마하신다 49화>

식당에 붐비던 저녁 손님들이 빠져나가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적해지는 느지막한 시간.

강태한의 아버지, 강호연이 운영하는 태한 반점은 이때쯤이 되면, 동네에서 알고 지내던 단골손님들이 남아 느긋하게 담소를 나누는 공간이 되곤 했다.

동네에 오랫동안 남아있는 식당들의 특징이라고 할까.

요 근래 새로운 손님들이 많아지긴 했어도, 이런 특유의 분위기는 아직까지 어렴풋이 남아있었다.

“이야, 요즘 한하 녀석들이 이상할 정도로 잘해.”

그러던 와중, 지인들과 앉아있던 한 아저씨가 스마트폰을 쳐다보며 감탄을 터트렸다.

화면에는 실시간으로 하고 있는 야구 경기의 중계가 나오고 있었다.

딱! 때마침 터진 안타가 파울라인을 거쳐 깊숙이 날아가더니, 2루에 있던 주자가 홈으로 들어왔다.

초반실점을 만회하고 동점을 따오는 깔끔한 플레이였다.

“김씨, 아직도 야구 봐?”

“원래 한동안 안 봤었지. 근데 요즘 좀 볼 맛이 나더라니까? 특히 김태평이랑 안기호, 이런 애들이 갑자기 폼이 확 올라왔어.”

“걔네가? 에이. 슬슬 은퇴한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인데. 내가 믿겠냐고.”

언급된 선수들은 본인이 한참 경기를 챙겨보던 때나 활약했던 선수들이다.

그래도 어차피 마침 할 일도 없었기에, 혹시나 하며 오랜만에 옆에서 경기를 좀 보고 있었는데.

“뭐야. 여기서 삼진을 날려버리네?”

“최태준이가 요즘 참 잘 한다니까.”

“캬! 저걸 잡네! 그래 이게 수비지!”

연달아 깔끔하게 아웃을 잡아내고 공수교대를 하더니, 공격에서도 금방 1점을 따와 역전을 이뤄내는 한하 호크스다.

시큰둥하게 보고 있던 최씨도 어느새 감탄을 터트리며 몰입을 하고 있었다.

“야, 진짜 잘하네. 이게 이럴 수가 있나?”

경기 자체는 오래간만에 보지만, 그래도 한하의 연패, 부진한 성적 같은 건 간간이 스포츠뉴스로 접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실력이라니.

옆에 있던 김씨도 신기해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번 주였나, 그때쯤부터 갑자기 폼이 확 올라오더라고, 요새는 질 땐 지더라도 야구 같은 야구는 보여준다니까.”

본래 야구라는 게 보고 있다 보면 울화통이 터지는 순간이 많은 스포츠지만, 한하의 팬들은 다른 팀의 팬들에 비해 유독 그런 순간을 많이 겪어왔다.

그러다 보니 '야구다운 야구만 하면 된다'라는 것이 한하팬들의 소박한 기준이었는데··

요즘엔 그 정도는 기본 조건으로 깔고 가는 것이다.

“뭐 도핑이라도 한 건가?”

“안 그래도 얼마 전에 기사 났더라. 상대 팀에서 도핑의혹 제기해서 검사 한 번씩 더 했다고.”

“그래서, 안 나왔대?”

“이 사람도 참. 안 나왔으니까 지금 여기서 뛰고 있지, 나왔으면 뛰고 있겠어? 징계라도 받았겠지.”

최씨의 말에 김씨가 답답하다는 듯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최씨는 머쓱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왜 갑자기 이래 잘한대? 시즌 초면 합숙이라도 기가 막히게 했나보다 하겠는데, 지금은 시즌 말이잖아.”

“그거 내가 알려줄까?”

그러자, 주방정리를 하고 있던 강호연이 나와 씨익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말을 꺼내기도 전부터 뿌듯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거, 다 우리 태한이 덕분이야.”

“태한이? 강 사장 아들?”

“그렇다니까? 얼마 전에 그러더라고. 거기 감독한테 부탁을 받았다나, 뭐라나.”

그 말에 김씨와 최씨 모두 입가에 웃음을 머금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옛적부터 부모의 자식 자랑은 못 말리는 법이다.

“그럼 뭐, 태한이가 한하 코치라도 된 겨?”

“하긴 태한이가··· 스포츠 무슨 과였지?”

“스포츠의학과. 아무튼 코치까지는 아니고, 뭐라고 그러더라··· 선수들 컨디션 관리, 부상치료, 이런 쪽으로 도와주는 거 같더라고.”

"에이. 뭐 그런 건 다른 팀에서도 다 하는 거 아니여? 그런 걸로 바뀔 거였으면 진즉에 바뀌었지.”

강호연의 말에 두 사람이 고개를 저었다.

지극히 상식적인 선에서의 이야기였다.

허나 다음 이어진 강호연의 말은 그 둘도 혹할만한 말이었다.

“아냐. 우리 태한이 솜씨가 제법 신통해. 내 어깨도 태한이가 고쳐준 거라니까? 말 안했나?”

"그래?”

강호연이 예전에 어깨수술을 받고 고생을 했다는 건 그들도 다 알고 있었던 사실.

본인이 그렇게 뽐내던 수타면도 못 치게 되서 안타까워 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다시 수타면을 치고 있어 참 다행이라 생각했었다.

게다가 요즘 들어 회춘이라도 한 것 마냥 기운도 좋고, 얼굴에 주름도 점점 사라져가서 무슨 비결이라도 있나 싶었는데···

그런데 그게 태한이의 안마 덕분이었다니.

원래라면 그저 허황된 아들자랑이 빚어낸 흰소리로 치부했겠지만, 실제로 강호연의 변화를 지켜보던 입장이었기에 왠지 믿음이 갔다.

“에이···암만 그래도 그게 말이···”

“크흠. 그럼 나도 한 번 받아볼 수 있남?”

손을 저으며 고개를 흔드는 최씨.

하지만 옆에 있던 김씨는 짧게 헛기침을 뱉더니 냉큼 줄을 댔다.

“나한테 물어봐도 난 모르지? 태한이 일인데.”

“에이, 그래도 내가 태한이 학교 가는 것도 봤는데, 괜찮지 않나? 첫 휴가 때 용돈도 줬는디.”

흔쾌히 호언장담을 할 법도 하지만, 혹시라도 아들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음을 염려하여 일단 선을 그어놓는 강호연이다.

그러자 김씨는 자신과 강태한과 있었던 추억과 훈훈한 미담들을 늘어놓으며 자기 어필을 시작했다.

“김씨, 지금 뭐하는 거여?”

그러던 와중, 옆에서 듣고 있던 최씨가 정색을 하면서 끼어들었다.

“태한이 용돈은 내가 더 많이 줬지. 그리고 태한이는 우리 아들놈이랑 유치원 때랑 그 초등학교 2학년 때였나 4학년 때였나. 아무튼 두 번이나 같은 학급이었구만.”

시원한 안마에다가 혹시 모르는 회춘까지.

처음엔 짐짓 점잖은 체 했지만, 혹여나 하는 마음에 김씨와 마찬가지로 태한이와의 인연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최씨였다.

* * *

“캠핑장비라는 게···."

유세아는 입을 다물지 못한 채로 주위를 둘러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했던 거보다 엄청 많네요?”

커다란 구획 하나가 온통 캠핑장비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테이블, 의자는 물론이거니와 코펠과 버너 같은 요리기구들부터 스탠드같은 조명들까지.

꽤 넓은 공간을 활용하여 실제 캠핑장처럼 텐트를 펼쳐 진열해놓은 곳도 있었고, 그 외에도 소형 커피머신이나 대형 배터리처럼, 흔히 캠핑용품하면 잘 떠오르지 않는 자잘한 상품들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요즘 아웃도어 스포츠랑 캠핑이 유행하고 있다는 말은 들었는데.”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테마기획처럼 꾸며놓은 것도 아니고 단지 물품들을 진열해놨을 뿐인데, 마치 보는 것만으로도 압도되는 듯한 느낌.

유세아는 천장에 매달려있는 텐트를 올려다보며, 신기하다는 듯이 감탄을 터트렸다.

‘확실히 종류가 많긴 하네.'

강태한은 앞에 진열된 화로 하나를 들어올렸다.

모닥불 하나 지펴놓으면 딱 좋을 것 같은 크기.

게다가 묵직해 보이는 외견과 달리 생각보다 가벼워서 휴대하기에도 그리 어려움이 없어보였다.

처음엔 침낭이나 테이블 정도만 좀 보려는 생각이었지만, 이렇게 쭉 나열된 물건들을 보고 있자니 나름 흥미가 생기는 강태한이었다.

‘무림에서 팔았으면 정말 대박이었겠군.'

왠지 무림인들이라 하면 편리를 추구하지않고 소탈한 차림으로 여행을 다닐 것 같지만 그건 지나치게 왜곡되어있는 이미지다.

물론 내공이 있어 어지간한 일로는 탈도 나지 않겠지만, 편하고 따뜻한 잠자리에서 잠들고 싶고 좋은 음식을 먹고 싶은 마음은 똑같은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캠핑 코너에 갖춰진 몇몇 물건들은 그야말로 문파의 비보(寶)처럼 여겨질 만한 것들이었다.

비를 맞더라도 젖지 않는 방수텐트에, 바닥의 냉기를 막아주는 단열매트, 밖으로 열이 새나가지 않는 보온침낭, 원터치 텐트.

하나만 있어도 야숙(野宿)의 질이 달라질만한 물건들이었으니까.

강태한은 상품들을 살펴보다, 한때 숲 속에서 야숙을 하다 그대로 얼어 죽을 뻔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태한 씨, 이거 어때요?”

그때 유세아가 캠핑의자 하나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강태한이 슬쩍 보아하니, 팔걸이가 없고 좌판도 평평하면서 널찍한 것이, 그 위에서 가부좌를 틀어도 무리가 없을 것 같아보였다.

"좋네요."

"그렇죠?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요."

강태한의 말에 유세아가 히죽 웃었다.

물론 그녀는 단지 색감이 좋고 디자인이 세련되어서 골랐을 뿐이었지만, 결과는 좋았으니까.

“태한 씨는 뭐 보고 있었어요?”

“저는 이 텐트가 좀 괜찮아보여서.”

강태한이 앞쪽에 펼쳐진 채 진열되어있는 텐트를 가리키며 말했다.

편의성은 좀 떨어져 보이지만, 방수도 달려있고 혼자서 쓰기에 딱좋아 보이는 크기의 텐트였다.

"아, 텐트···."

그 텐트를 유심히 바라보다, 유세아는 그 옆에 있는 텐트를 가리켰다.

같은 회사의 비슷한 상품인데, 크기가 거의 두 배 이상으로 큰 텐트였다.

"음, 이게 좀 더 좋지 않아요? 아무래도 작은 것보다는 큰 게 낫죠."

“혼자 쓰기에는 너무 넓지 않나?”

“혹시 모르잖아요. 나중에 다른 사람이랑 같이 쓸 일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유세아는 별 생각 없이 말했다가, 뒤늦게 귀가 빨개지며 고개를 돌렸다.

의도는 없었지만 이상하게 해석할 수도 있는 내용이었다.

'하긴, 아버지랑 같이 갈 수도 있으니까.’

얼마 전 드라이브를 나갔었을 때, 아버지가 같이 등산을 가거나 캠핑을 하러가도 좋겠다는 이야기를 꺼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린 강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조만간 갈 일이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네?”

순간 강태한과 눈을 마주치자, 자기도 모르게 화들짝 놀라는 유세아다.

그리고 강태한은 가볍게 웃으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저번에 말씀하셨거든요.”

“아···."

빠른 속도로 열기가 가라앉는 귀 끝.

“아버지랑 사이가 참 좋으시네요.”

유세아는 머쓱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시큰둥한 반응.

허나, 다시 생각해보니 괜히 가슴이 답답해지는 유세아였다.

"태한 씨, 그럼 제가 이 텐트 사드릴게요.”

“네?”

그녀의 말에 강태한이 손을 저었다.

“에이, 찻잎 한 통 사주고 텐트를 받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른 게 사기인가, 그게 사기지.”

“아뇨, 괜찮아요, 대신에.”

유세아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살짝 측면으로 시선을 피하며 말을 덧붙였다.

"···대신 다음에 저도 데려가줘요.”

"······."

시선을 피한 것은 오히려 하책이었다.

눈은 선글라스가 가리고 있지만, 고개를 돌리는 바람에 붉게 물든 귀가 드러난 것이다.

잠시 동안 흐르는 정적.

강태한은 잠시 그녀를 지켜보다,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의자도 두 개 사야겠네요.”

* * *

“아, 그거 아세요, 태한 씨? 저 블미션 나가요.”

“블미션이면··· 블라인드 미션이요?”

블라인드 미션이라 하면 꽤 오랫동안 인기를 끌며 삼 년 넘게 장수하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특정 장소에서 출연자들이 미션을 받아 이를 수행하는데, 그 중에 한 명은 다른 출연자들을 잡으라는 미션을 받아 서로 도망가고 쫓는, 그런 내용.

“네, 맞아요. 이번에 같이 촬영한 조찬혁 선배랑, 최선희 선생님이랑 나가는데, 저 사실 블미션 예전에 진짜 좋아했었거든요. 그래서 좀 기대돼요.”

강태한의 말에 유세아가 유독 밝은 표정으로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블미션 출연이 기대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방금 전 캠핑코너에서 있었던 일 때문인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저번에 태한 씨 골프 친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러다 골프용품 코너를 지나가던 중, 유세아가 강태한을 보며 넌지시 물었다.

강태한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뇨. 저번에 한 번 쳐봤을 뿐이에요.”

“어? 그래요?”

유세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얼마전, 강태한에게 골프 좀 아는 척 해보려는 생각 하나로 아는 언니에게 강습을 받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골프를 안 친다니!

아까까지 밝았던 얼굴에 살짝 시무룩한 기색이 스쳐지나가는 유세아였다.

“어? 태한 오빠.”

그때, 앞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 듣는 여성의 목소리.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유세아의 귀에는 똑똑하게 들려왔다.

“이런 데서 다 만나고, 우연이네요!”

한편 그 여성은 반가운 기색을 터트리며 강태한에게 종종 걸음으로 다가왔다.

강태한 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반겼다.

“뭐야, 은비야. 서울에 왜 있어?”

“저 이제 다시 프로 준비해야 되잖아요. 좀 인사드려야 될 곳이 있어서, 잠깐 올라왔죠. 근데··· 여긴 일행분이세요?”

반갑게 인사를 하던 채은비는 강태한의 옆에 서있는 여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묘한 직감을 느낀 탓일까, 그녀의 목소리가 살짝 긴장으로 떨렸다.

이럴 땐 양쪽 다 알고 있는 사람이 중간에서 소개를 하는 것이 맞다.

강태한은 먼저 채은비쪽을 가리키며 유세아에게 말했다.

“아, 이쪽은 은비 씨라고, 골프연습장에서 알게 된 동생이에요. 그리고···."

다음으로 유세아를 채은비에게 소개하려다, 순간 강태한의 말이 멈췄다.

정체를 감추려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건데, 지인이라고 해도 소개를 하는 게 맞는 건가 싶었던 것이다.

허나 다음 순간.

"안녕하세요. 배우 유세아라고 해요."

유세아는 자기 손으로 선글라스를 살짝 내리고, 미소를 지으며 채은비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얼굴은 웃고 있었지만···

그 눈빛에는 마치 영역에 침범한 늑대를 경계하는 호랑이와도 같은 기세가 담겨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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