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47화>
“성현아, 이거 받아라.”
“이게 뭔데?”
최성현은 강태한이 건넨 상자 모양의 보따리를 받아들었다.
겉을 둘러싸고 있는 천이 부드럽고 간간히 자수까지 들어가 있는 것으로 보아 꽤나 값이 되는 물건처럼 보였다.
“네가 지난번에 필요하다고 했었던 거.”
“그러니까 뭐냐고.”
자식. 뭘 또 이런 걸 다.
최성현은 약간 기대감이 서린 표정으로 보따리를 풀었다.
얼핏 복잡해보이지만 꼬다리만 당기면 매듭이 스르륵 풀어지는 구조.
그 안에서 나온 것은··· 홍삼 엑기스 선물세트였다.
"도대체 갑자기 왜?”
최성현의 표정이 벌써 홍삼 엑기스를 한 숟가락 퍼먹기라도 한 것처럼 미묘하게 구겨졌다.
사람에게는 예상의 범주라는 것이 있는데, 이 선물은 그 범위를 가뿐하게 벗어나 있었다.
적어도 이십대의 친구들이 주고받을만한 선물은 아니지 않은가.
“너 저번에 기운 없다고 그랬잖아.”
“그래서, 진짜 의도는?”
“이번에 선물을 좀 많이 받았거든. 혼자서는 다 못 먹을 거 같아서.”
한하의 선수들이 보내온 선물들.
그에게 안마를 받고 효과를 봤던 선수들은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아직 받지 않은 선수들까지도 ‘조금 먼저 해주실 순 없습니까'라며 선물을 보내왔다.
게다가 구단에 가이드라인이라도 있는 건지, 어찌된 게 하나 같이 한우 아니면 홍삼만을 보냈다.
그렇게 한우와 홍삼이 카톡 선물함에 쌓이게 된 것.
소고기는 보관 문제가 있으니 굳이 가져오기가 좀 그렇고, 홍삼은 어차피 영약도 따로있으니 주변사람들과 나누기로 한 것이다.
“어쩐지.”
강태한의 말에 최성현은 그럴 줄 알았다는듯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이 녀석이 아무리 이런 센스가 없다지만 느닷없이 홍삼선물이라니, 영 이상하지 않은가.
“근데 이거 그냥 먹어도 되나? 홍삼은 체질에 안 맞으면 함부로 먹지 말라고 했던 거 같은데.”
“넌 잘 맞는 편이라 괜찮아.”
"그래?”
예전에는 딱히 이렇지 않았는데, 왠지 요즘들어 강태한의 말이면 신용이 가는 느낌이다.
특히 건강과 관련된 이야기라면 더더욱.
최성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받았으면 잘 먹어야지. 고맙다.”
최성현은 옷을 넣어둔 캐비닛을 열고 선물세트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이것도 선물이다.”
“또? 홍삼 다음에는 뭐 수삼이라도··· 어?”
헛웃음을 터트리며 뒤를 돌아본 최성현.
헌데 그런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펴졌다.
강태한의 손에 쥐어진 야구공과 그 위에 적힌 싸인 때문이었다.
“이거 설마. 최태준 선수 싸인볼이냐?”
"오··· 한 번에 알아보네?”
“이야! 고맙다!”
홍삼을 받았을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
저번에 최태준이 샵에 다녀갔을 때, 최성현이 ‘그때 사인해달라고 말이라도 해볼 걸’이라 말했던 게 기억나서 따로 받아왔던 싸인볼이다.
아무래도 그러길 잘한 모양.
최성현이 사인볼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싱글벙글 웃는 모습에, 강태한도 나름의 보람을 느끼며 실소를 터트렸다.
“혹시 태한씨 와있나?”
그러는 와중 탈의실 문을 열고 황 실장이 들어왔다.
마침 황 실장에게도 선물을 건네야하는 참이었기에, 강태한이 화색을 지었다.
“잘 됐네요, 실장님. 드릴 게 있었는데.”
“어, 그래? 뭔데?”
캐비넷에서 상자 보따리를 하나 더 꺼낸 강태한.
그 보따리를 건네받자··· 황 실장의 얼굴에 조금 복잡한 기색이 나타났다.
“아··· 혹시 결심한 거야?”
홍삼이라 하면 한우와 함께 성의가 담긴 고가선물의 대표주자라 할 수 있다.
그런 걸 갑자기 선물한다는 건··· 뭔가 일이 있다는 것.
예를 들면 그동안 감사했다던가, 그런 미안한 인사를 할 때에 건네는 선물이 아니겠는가.
“태한씨라면 어딜 가든 잘 될 거라고 생각해. 그래도 어디로 가는지는 꼭 좀 알려주고, 나도 예약 좀 해두게.”
황 실장은 강태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는 훈훈한 미소를 지으면서도 어딘가 쓸쓸해 보이는 눈을 하고 있었다.
"예? 무슨 소리에요?”
그의 생각을 짐작도 하지 못한 강태한은 그저 황당한 표정으로 되물을 뿐.
“뭐··· 다른 샵으로 가려는 거 아냐?”
“아뇨. 그냥 홍삼 선물인데요.”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황 실장은 멍하니 선 채 강태한과 보따리를 번갈아가며 쳐다보다가, 머쓱한 표정으로 두어 차례 헛기침을 내뱉었다.
“흠흠. 잘 먹을게, 태한 씨. 근데 곧 손님 오실 시간이라, 카운터로 나가봐야겠네?”
쪽팔릴 때는 상황을 피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
황 실장은 홍삼엑기스 세트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탈의실을 빠져나갔다.
* * *
'아··· 뭔가 조금 부족한데.’
웹툰 작가 이병호는 침대에 누운 채 고민에 빠져있었다.
지금 그가 있는 곳은 예약해뒀던 안마샵의 방.
허나 그의 머릿속엔 방금 목욕탕에서 떠올렸던 에피소드의 플롯과 신 캐릭터에 관한 생각뿐이었다.
뭔가 딱 떠올라서 마무리가 되기 직전인데,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 남아있는 것이다.
'아까 그 사람 느낌이 딱이었는데.’
목욕탕에서 마주쳤던 그 사람.
그를 본 순간, 반로환동을 거친 청년이라면 딱 저런 느낌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딱 들었던 것이다.
다만 거기서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있는 것도 영 남사스러운 일이기에 도중에 시선을 피했었지만.
그 때문인지 영감도 딱 끊겨버린 것.
“하긴 내가 신 캐릭터나 짜고 있을 때냐.”
본편 콘티도 아직 완성을 못시켰으면서.
이병호는 씁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똑똑.
그때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이병호가 노크에 대답하자, 문을 열고 안마사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헛.”
순간 안마사의 얼굴을 본 이병호가 헛숨을 들이켰다.
들어온 사람이 다름이 아니라 목욕탕에서 봤던 바로 그 사람, 강태한이었던 것이다.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예? 아··· 아뇨.”
이병호는 고개를 젓는 와중에도 시선은 계속 강태한에게 향했다.
이런 말을 하면 이상하겠지만.
그에게선 왠지 무림인의 느낌이 물씬 느껴지고 있었다.
“흠··· 전체적으로 몸의 기력이 쇠해져있군.”
한편, 마찬가지로 그를 살펴보고 있던 강태한이 위턱을 가볍게 쓸어 만지며 말했다.
“의자에 오랫동안 앉아서 일을 하고··· 요 몇 달 동안 아침에 자고 낮에 일어나는 생활을 이어왔던 모양이지. 그렇지 않은가?”
“···마, 맞습니다.”.
거짓말처럼 딱딱 들어맞는 내용.
이병호는 혹시 사전에 자기가 설문조사 같은 걸 했었는지 생각해봤지만, 그랬던 기억은 없었다.
“일단 엎드려 보게.”
“알겠습니다.”
처음에는 약간 신비한 느낌만 있었지만, 방금 전 문답(問答)때문인지 거기에 신용까지 더해져버렸다.
이병호는 얌전히 그 말에 따라 침대 위에 몸을 엎었다.
“허윽···."
그리고 그 등 위에 강태한이 손이 올라오는 순간.
이병호는 자기도 모르게 짧은 숨을 들이마셨다.
묵직한 무게감과 함께 퍼져가는 따스한 온기.
마치 한 손 만으로도 온몸이 제압된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도, 동시에 몸 구석구석을 덥히고 긴장을 풀어주는 듯한, 서로 상반된 두 느낌이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주인공이 스승에게 비급을 전수받았을 때의 느낌이 이런 느낌이었을까···.'
그 오묘한 감각에, 이병호는 자연스레 작품속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그가 연재하고 있는 작품의 장르는 퓨전무협.
단지 등 위에 손이 올라왔을 뿐인데, 이것만으로도 영감 같은 것이 팍팍 터져 나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음··· 확실히 힘이 많이 쇠해져있는데.'
한편, 그의 몸 상태를 확인하던 강태한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심력, 기력 모두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는 상태.
거기에 운동을 거의하지 않았는지 근육들도 거의 힘을 잃고 축 늘어져 있었다.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낮과 밤이 바뀐 채로 오랫동안 생활한 게 큰 영향을 미쳤으리라.
“손목 쪽 상태가 특히 좋지 않군.”
“예? 아··· 네. 일 때문에 좀.”
이병호는 대답을 하면서도 의문 하나를 떠올렸다.
이 사람이 내 손목을 확인해봤던가?
아니, 단지 등에 손 하나를 올려놨을 뿐이다.
참으로 신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야말로 무림고수 같은 ···?’
허나 이병호의 생각은 도중에 끊어졌다.
“흐아아아악!”
강태한이 진단을 마치고 그의 두 손이 양쪽 어깨 뒤에 있는 날개 뼈를 자극하는 순간, 이병호의 입에서 삼류 졸개의 단말마 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픈가?”
“예, 예!”
이병호가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는 팔도 좀 움직일 생각이었는데, 방금 전의 지압 때문인지 팔이 좀처럼 움직이지를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군. 정말 심각한 상황이라면 아픔조차 느껴지지 않는다네.”
“그럼 차라리 심각할 때··· 흐어억!”
심각할 때 받는 게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런 말을 꺼내려 했지만, 이번에도 그의 말은 도중에 끊어졌다.
한껏 뭉친 근육을 단번에 헤집어놓는 그 느낌은, 그야말로 머릿속을 새하얗게 물들이기에 충분한 감각이었다.
“허억, 허억···."
처음에는 지압이 들어갈 때마다 계속해서 몸을 꿈틀거렸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그저 축 늘어진 채 가쁜 숨을 몰아쉴 뿐이다.
그렇게 어깨를 풀어낸 다음 척추를 지나, 허리, 종아리까지···
곳곳의 뭉쳐있는 근육들을 풀어놓자, 서서히 이병호의 안색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뭐, 뭐지···?'
안마의 손길이 전체적으로 한 차례 훑고 지나간 몸.
마치 근육이 다 찢겨진 것처럼 전신이 욱신거리고 아프다. 아픈데.
몸 곳곳에서 시원한 감각이 샘솟기 시작하더니, 마치 헤집어놓은 밭에 물이 스며들듯 온몸으로 서서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서서히 온몸이 정화되어가는 듯한 느낌.
처음엔 고통에 찬 가쁜 숨만 몰아쉬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의 호흡에는 옅은 쾌감이 함께 실려 있었다.
‘마치···· 전신의 혈들이 다 열려있는 것만 같아.'
조금 정신이 돌아오자, 바로 무협에서 있을 법한 내용과 연결을 짓는 이병호다.
허나 그가 결정적으로 착각하고 있는 부분이 하나 있었으니.
‘몸은 얼추 끝났으니, 슬슬 혈도를 손보기로 할까.'
아직 강태한은 근육 위주로만 풀어놨을 뿐, 혈자리는 제대로 건드리지도 않았다는 점이었다.
척추부터 시작하여 곳곳의 혈들을 뚫어 탁기가 빠져나갈 구멍을 틔워놓고, 단전에 고여있던 생기를 풀어 혈도를 깨우고 활성화시킨다.
그 모든 과정이 일어나는 것은 이병호의 몸.
근육을 풀어놓는 정도야, 이 일련의 과정들을 위한 전초전에 불과했다.
결국, 이병호가 다음으로 생각다운 생각을 떠올릴 수 있었던 건 강태한의 안마가 전부 끝났을 때였다.
* * *
슬슬 오후가 시작될 시간.
“아, 태한 씨! 홍삼 잘 먹었어."
“고마워. 덕분에 몸보신 좀 한 기분이네.”
강태한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가자, 주변의 다른 안마사들이 강태한에게 감사인사를 건넸다.
그가 선물세트를 전달한 건 최성현과 황 실장, 둘 뿐이었지만, 그래도 다른 사람들도 있는데 달랑 둘만 주는 것도 좀 미안한 일이지 않겠는가.
어차피 본인은 딱히 쓸 데도 없겠다, 그 외에도 낱개로 나눌 수 있는 세트들을 좀 챙겨와, 대기실에 열어놓고 다른 안마사들이 맘대로 가져갈 수 있도록 해놓았던 것이다.
“별 말씀을요.”
그들의 인사에 강태한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딱히 감사를 받자고 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아 참.’
그러다 문득 황 실장에게 볼 일이 있었다는게 생각나, 대기실 밖으로 나왔는데···
“선생님!”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가, 강태한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종종걸음으로 다가왔다.
‘세 타임 전에 받았던 손님이군.'
웹툰 작가 이병호, 강태한이 아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모르는 얼굴도 아니다.
강태한이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선생님, 저, 혹시 부탁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남자는 왠지 간절해 보이는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단순히 안마를 좀 더 받고 싶다, 예약을 빨리 할 순 없냐··· 그런 부류의 부탁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들어보고요."
강태한이 고개를 끄덕이자, 이병호는 곧바로 90도로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부디 저에게 도를 가르쳐주십시오!”
"···예?”
순간 강태한은 자기도 모르게 주변의 기색을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몇몇 손님들의 시선이 이쪽으로 향해 있었다.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이야' 라는 시선.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물론 무림에선 마교의 우두머리가 된 적이 있긴 하지만··· 적어도 현대에서는 어디 수상한 종교와 연루된 적도, 연루될 생각도 없었다.
얼핏 보기엔 침착해 보였지만, 강태한은 현대로 돌아오고 난 이후 가장 당황한 표정으로 손을 저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