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 안마하신다-44화 (44/286)

<천마님 안마하신다 44화>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걱정해야 된다 했는데···’

꽤 오랫동안 함께 선수생활을 보낸 사이지만, 김태평은 이광호가 저런 식으로 상냥한 목소리로 말하는 걸 두 번밖에 들어보지 못했다.

한 번은 형의 결혼식에 참석했을 때.

한 번은 완전 빡이 쳐서 다 엎어버리기 몇 초 전에.

그런 의미에서, 광호 형의 저런 목소리는 김태평에게 굉장히 낯설고 어색하면서도 공포스러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야, 그 표현 좋다. 회춘! 완전 회춘 당해버렸지 뭐냐! 지금 몸이 너무 가볍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육 년 정도 젊어진 거 같아.”

반면 이광호는 상쾌한 웃음을 지으며, 엄지손가락으로 도장을 찍듯 두어 차례 허공을 때렸다.

구체적이면서도 굳이 싶은 육 년이라는 수치.

하지만 광호 형이 에이징 커브가 두드러지고 점점 체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게 그때쯤부터라는 걸 알고 있기에, 김태평은 그게 얼마나 높은 평가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 정돕니까?”

“야. 태준이 말이 허풍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 이럴 게 아니라 너도 한 번 받아봐. 선생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난 그럼 스트레칭이라도 좀 하러 간다.

이광호는 그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 뒤에서 손을 흔들던 김태평은 당황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뭐 받아보면 알겠지.’

이쯤 되면 몰래카메라가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어쨌거나 직접 확인해보면 그만이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김태평은 휴게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 * *

“끄후으으억···”

김태평이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방 안쪽에서 묘한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고통과 쾌락이 적당히 섞여있는 느낌의··· 마치 기가 막힌 산해진미를 한 입 맛보다가 새끼발가락을 탁자에 살짝 찧은 듯한, 그런 느낌의 신음소리였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은 다름 아닌 수면실.

휴게실에서부터 공간을 분리하는 얇은 커튼을 열고 들어가니, 좌우로 쭉 나열되어있는 침대와 그 위에 누워있는 세 명의 동료 선수들이 보였다.

이보다 편안해보일 수 없는 표정으로 침을 흘리면서 자고 있는 두 명.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엎드린 채 안마를 받으며, 방금 들었던 묘한 신음소리를 내고 있는 중이었다.

‘···기호 형이었어?’

누가 내는 소리인가 싶어 살짝 얼굴을 봤더니, 이광호 선수와 동갑인 안기호 선수다.

예전에 손가락이 부러졌을 때도 허허 웃고 넘어갔던 형인데, 지금 이러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여긴 대정이고?’

그리고 뒤에서 곤히 자고 있는 사람은 곽대정.

예전부터 불면증이 있어 약까지 챙기고 다닐 정도고, 그렇다보니 수면실에서 낮잠을 자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너무나도 편안한 얼굴로 곤히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이게 말이 되는 광경인가?

이쯤 되면 사실 몰래카메라였다는 쪽이 더 신빙성이 높아지는 수준이다.

“김태평 선수인가?”

그때 앞에서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무게감이 실려 있는 중후한 목소리. 강태한이었다.

“아, 네. 맞습니다만···”

야구는 게임의 구조상 투수와 타자 간의 기 싸움이 있을 수밖에 없고, 또한 그 비중이 생각보다 큰 스포츠다.

그리고 김태평은 야구장에서 먼지 좀 마셔본 선수.

신입 때라면 모를까, 경기 중에 다른 선수에게 기가 눌려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밖에 없었고, 일반인들 사이에서는 뭐 말할 필요도 없었다.

허나 강태한과 눈을 마주친 순간, 김태평은 뒷덜미에 손을 올리고 자연스레 고개를 숙였다.

왠지 본능적으로 그래야할 것 같은 느낌이 든 것이다.

“잘 맞춰서 왔군. 이쪽 침대에서 조금만 기다리게.”

강태한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눈인사를 건넨 다음, 옆에 있는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바로 밑에 안기호 선수가 곤죽처럼 늘어져있는 모습과는 참 어울리지 않는, 그런 부드러운 얼굴이었다.

‘굉장히 동안이시네···’

느껴지는 분위기는 어디 ‘거장’ 같은 거창한 타이틀이 붙어있을 법한 느낌인데, 겉으로 보기엔 기껏해야 이십대 정도로 보인다.

하긴, 그 삭막하고 험상궂던 광호 형을 상냥한 쾌남으로 만들어놨을 정도니, 본인의 외모 관리정도는 식은 죽 먹기 아니겠는가.

김태평은 혼자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우··· 선생님. 이제 끝입니까?”

“그렇다네.”

그때 옆에 누워있던 안기호 선수가 상체를 일으키며 물었다.

강태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자, 그의 얼굴에 안도와 아쉬움이 동시에 얽혀있는, 다소 모순적인 표정이 떠올랐다.

목소리를 참지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순간도 있지만, 그 뒤에 찾아오는 그 이상의 시원함···

받는 도중에는 끝나는 순간만을 기다렸지만, 지금은 좀 더 받고 싶다는 아쉬움이 더 컸다.

“지금은 더 받아도 별 효과가 없을 걸세.”

“···그렇습니까?”

“그래. 그러니까, 일단은 한 숨 자고 일어나게나.”

톡. 어딘가를 가볍게 치는 소리.

다음 순간, 반쯤 일으켜져 있던 안기호 선수의 몸이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 광경을 옆에서 생생하게 지켜보고 있던 김태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저거. 살인 사건?’

에이. 설마.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정자세로 누운 안기호의 숨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김태평은 스마트폰의 통화 버튼에서 좀처럼 손을 떼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자, 그럼···”

직후, 강태한은 김태평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방금 전의 짧은 오해 때문인가, 김태평은 자기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켰다.

“예전에 탈골로 어깨에 오랜 후유증이라.”

강태한은 옆에 내려뒀던 서류를 읽으며 다가왔다.

사전에 코치진에게 건네받았던, 오늘 안마를 받을 선수들의 명단과 그들의 주요 부상 내역이었다.

김태평 같은 경우는 예전에 외야수를 뛰다 탈골을 한 번 제대로 겪은 이후, 주기적으로 부상 부위가 욱신거려 컨디션이 떨어지는 날이 있었다.

특히 근래에 들어서는 년 수가 지날 때마다 타격률이 계단식으로 내려가고 있는 상황.

아직 현역으로서 충분한 전력이긴 하지만, 반대로 말하자면 딱 그 정도일 뿐이다.

“흐음···”

한편, 물끄러미 김태평과 눈을 마주하고 있던 강태한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어깨 쪽 근육에도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어 보이는군.”

“···그렇습니까?”

김태평의 목소리가 다소 의문스러웠다.

자기 부상 경력은 자기가 더 잘 알고 있는 법.

물론 그동안 겪은 부상이 어깨 탈골 하나였던 건 아니지만, 그 외에는 자잘한 부상들에 불과했다.

“일단 엎드려보지.”

허나 지금까지 의문스러웠던 게 한둘이었던가.

김태평은 얌전히 침대에 엎드렸고, 강태한은 그의 등 위아래로 각각 왼손과 오른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끄헉!”

강태한의 왼손과 오른손이 양쪽을 죽 당기자, 김태평의 입에서 짧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동안 굳어있던 척추가 원래의 모습으로 쭉 펴지는 느낌.

그와 동시에, 그 주변의 신경들이 동시에 깨어나는 듯한 강렬한 감각이 찾아왔다.

척추를 가볍게 펴줌으로써 이어진 신경과 몸 전체의 혈도를 가볍게 자극해주는 방법.

허나 이건 일종의 밑작업에 불과하다.

강태한은 곧바로 두 엄지손가락을 꼬리뼈 쪽으로 옮긴 다음, 척추를 따라 십여 개의 혈들을 순식간에 자극했다.

“흐어어윽!”

자기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비명.

몸의 기둥을 타고 올라가는 갑작스런 자극에, 그의 등이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아찔한 와중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단어는, 다름이 아니라 최태준의 경험담에서 언급된 적이 있었던 전류였다.

‘태준이 자식··· 찌릿한 수준이 아니잖아?’

방금 전까지 그의 말을 허언으로 여기고 있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축소해서 말한 것이라고 느끼고 있는 김태평이다.

“아까 말했듯 어깨도 어깨지만··· 자네는 여기, 태양혈이 더 큰 문제로 보이는군.”

한편 척추의 혈을 풀어내 혈도를 활성화시켜놓은 강태한은, 누워있는 김태평의 머리 쪽으로 다가오더니 양손의 손가락으로 그의 머리를 붙잡았다.

‘···어?’

반사적으로 고개를 움직이려던 김태평은 순간 당황했다.

손가락으로만 잡고 있을 뿐인데다 그리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았는데, 어딘가에 고정이라도 시켜놓은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 태양혈이 어디입니까?”

“쉽게 말하면, 관자놀이지. 눈의 신경과 밀접한 관계로 이어져있는 혈이라네.”

뭔가 안 좋은 예감.

허나 머리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강태한의 두 엄지손가락이 그의 양쪽 관자놀이에 살포시 올라왔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식은땀의 감촉을 느낀 순간.

“끄하아아아악!”

김태평은 단말마에 가까운 비명을 지르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물든다는 게 어떤 것인지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옆에 누운 두 사람이 숙면을 취하고 있는 모습은 꽤나 이질적인 광경이었다.

* * *

한하에는 ‘마리한하’라는 별명이 있다.

한때 나름 성적이 괜찮았던 시절, 초반에 밀린다 싶다가도 어느새 보면 따라붙고, 아슬아슬하게 역전을 터트리는 맛이 마치 마리화나처럼 중독적이라면서 붙었던 별명.

허나 성적이 지지부진해지고 연패의 상징이 된 요 근래에는, 보고 있으면 정신건강에 해로운데 안 보면 또 뭔가 허전한, 그런 의미로 변질되어 있었다.

“근데 그게 어떻다고?”

“오늘 마리한하 맛이 너무 달달하다고, 임마!”

친구의 말에 남자는 어깨를 툭 건드리며 강조하듯이 외쳤다.

주변의 함성 소리가 큰 탓에 작게 말해서는 들리지도 않았다.

오늘은 한하의 홈경기가 있는 날.

평소에는 약간 허한 느낌이 날 정도로 비어있는 관중석이 많았는데, 요 일주일 사이에는 홈경기가 있을 때마다 빽빽하게 관중들이 들어찼다.

관중들이 모이는 가장 큰 이유는 심플했다.

한하가 이길 것 같으니까!

최태준의 슬럼프가 끝난 걸 기점으로 쭉 좋은 성적을 거두기 시작하면서, ‘또 속겠냐’라고 생각하던 팬들의 분위기도 반전되기 시작했다.

“그럼 뭐하냐, 이제부터 다 이겨도 사실상 가을 야구는 날아갔는데!”

“야! 이 자식 뭘 모르네. 가을야구? 한하 팬들은··· 그냥 이겨주기만 해도 고마워!”

많은 건 바라지 않는다.

그냥 야구다운 야구만 해주면 될 뿐!

그 정도만 되도 다 같이 구장에 모여 응원하는 맛이 나고, 혹시나 이기기까지 한다면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쳤다! 또 쳤어!”

와아아아아!

오늘은 무슨 일인지 그 중에서도 최상의 텐션!

1점 홈런을 뽑아내고 또 연이어 터지는 안타에, 관객석의 열렬한 함성이 터져 나왔다.

뭔가 팀의 폼 자체가 달라진 느낌이라고 할까.

특히 경력은 오래 됐지만 최근 성적은 지지부진했던, 나이가 꽤 되는 팀의 터줏대감 선수들의 활약이 오늘따라 돋보였다.

“후우···”

그 다음 타석에 오른 김태평.

그는 손을 탁탁, 털고는 타격 자세를 취했다.

‘확실히 다르다.’

오늘 세 번째로 오르는 타석.

안마를 받고 일어났을 때부터 느끼긴 했지만, 이렇게 타석에 서있으니 더욱 실감이 났다.

오늘 자신의 컨디션은 최상이라는 걸.

부드러운 어깨와 가벼운 다리, 확 넓어진 시야.

신입 때는 경험이 부족하고, 경험이 쌓이면 피지컬이 떨어지는 게 자연스러운 구조지만, 지금의 자신은 그 구조에서 한 발자국 정도 벗어나 있었다.

물론 아무리 그래도 전성기 시절의 몸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그동안 쌓은 경험에다 피지컬까지 얼추 회복된 상황이라고 할까.

‘그리고 가장 큰 차이는.’

바로 동체시력이다.

투수가 공을 던지는 순간, 공의 궤적이 선을 그리듯이 또렷하게 보였다.

다시 되돌아온 동체시력과, 그동안 수많은 구질을 보아온 본인의 경험이 합쳐지면서 이뤄내는 광경.

동체시력은 나이를 먹으면서 자연스레 떨어질 수밖에 없는 부분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강태한의 손을 거친 지금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관자놀이가 깨질 것 같은 극심한 고통을 견디고 얻어낸 달콤한 결실이라고 할까.

‘지금이다.’

선을 그리며 다가오는 공을 보고, 거기에 맞춰 방망이를 휘두르는 순간.

꾹 쥐고 있는 배트를 타고 묵직한 손맛이 전해졌다.

“으아, 선생님! 약속은 지켰습니다!”

아직 공이 날아가고 있는 와중이었지만, 김태평은 타석에서 그렇게 먼저 외친 다음 힘차게 1루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안마가 끝나고 낮잠까지 푹 자고 일어난 이후.

확 달라진 컨디션을 느끼며, 강태한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서 ‘오늘 꼭 홈런 한 방 치겠습니다.’라고 호언장담을 하고 나왔던 것.

그 덕분일까, 쭉 뻗어나가던 공은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기어코 관중석을 넘어 앞좌석 사이로 톡 떨어졌다.

‘얼마 만에 홈런이냐!’

우와아아아!

터져 나오는 함성 속에서 여유롭게 한 바퀴를 돌아오는 맛!

그야말로 홈런을 친 타자만의 특권이라 할 수 있는 즐거움이었다.

‘성현이가 왜 챙겨 보는지 알겠네.’

한편, 강태한은 중앙에 위치한 프리미엄 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관계자에게 티켓도 받았으니, 기왕 여기까지 온 거 경기도 조금 보고 갈까 해서 자리를 잡았던 것.

근데 막상 이렇게 경기장에 앉아 지켜보고 있자니, 꽤 보는 맛이 있어 어느새 치킨과 맥주까지 차려놓고 앉은 강태한이다.

다만 그가 느끼는 재미는 일반적인 관중들의 재미가 아니라···

선수들을 육성해놓고 시합 결과를 지켜보는, 그런 게임 같은 재미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