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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 안마하신다-41화 (41/286)

<천마님 안마하신다 41화>

“···핫.”

그로부터 한 시간 뒤.

채은비는 눈을 뜨자마자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언제부터 잠에 들었었더라.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고는, 머리에 손을 올린 채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여러모로 당황스러운 경험이었기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생각을 정리해볼 시간이 필요했다.

‘···어라?’

허나 생각을 정리하는 것보다 몸의 체감이 빨랐다.

곳곳에 기운이 넘쳐나는 기분.

이게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젊을 때 혈기가 왕성하다고들 하는데 그 혈기가 왕성하다는 표현이 딱 어울리는 느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곳은 바로 허리.

워낙 기운이 넘치기에 스트레칭 삼아 가볍게 몸을 돌려봤을 뿐인데, 거짓말처럼 가볍고 부드러웠다.

아니, 단지 부드러워진 수준이 아니라 허리의 구조 자체가 살짝 바뀌기라도 한 것 같은···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느낌만은 그 정도에 준하는 수준이었다.

‘이 정도면 혹시···’

채은비는 긴가민가하면서도 자리에서 일어나, 주춤거리며 스윙자세를 잡았다.

만약 정말로 허리가 다 나았다면, 다시 골프를 칠 수 있게 됐다면···

“아니지, 아니야.”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침대에 앉았다.

그럴 가능성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 게 아니라, 단지 멋대로 몸을 움직였다가 다시 덧나기라도 할까봐 두려운 탓이었다.

가능성이 있는 상황이기에 오히려 더욱 조심해야하는 것이다.

‘괜히 호들갑 떨다가 망칠 수도 있잖아. 안 그래?’

허나 지금 당장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워낙 굴뚝같은 것도 사실이었기에, 채은비는 자기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이 두어 차례 뺨을 두드렸다.

“···어, 뭐야?”

그러다 문득 시야에 들어온 시계를 본 채은비가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본인이 생각하고 있던 시간과 시계에 나와 있는 시간 사이에 격차가 컸던 탓이다.

“한 시간이나 자고 있었다고?”

꿈도 꾸지 않은 깊은 잠.

체감 상으로는 잠깐 졸듯이 잠들었다가 바로 일어난 느낌이었는데, 막상 시간은 한 시간이나 지나있었다.

그녀는 스마트폰을 꺼내 다시 한 번 시간을 확인해봤지만, 시계가 잘못된 건 아니었다.

‘아··· 이러면 아저씨도 집에 갔겠네.’

처음엔 안마 자체에는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아저씨한테 밥 한 끼 얻어먹는 걸로 만족하자’라는 생각이었는데, 정작 안마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고 아저씨와의 밥 한 끼는 날아간 상황이다.

물론 저울질을 해보자면 당연히 지금 상황이 더 좋지만, 그래도 내심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녀의 눈꼬리가 시무룩하게 내려앉았다.

‘고맙다는 말도 아직 못했는데···’

채은비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딱 잘라 말하기 힘든 복잡한 심정에, 가슴 한 켠이 꾸욱 눌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일어났어요?”

허나 다음 순간.

닫혀있던 방문이 열리더니, 캄캄했던 방에 은은한 주황빛 불이 들어왔다.

곧바로 환한 백색광이 켜지면 눈이 아플 수 있기에 먼저 켜두는 조명등이었다.

불을 키고 방으로 들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강태한.

채은비와 눈을 마주친 그는, 가볍게 싱긋 미소를 지으며 들고 있던 다과를 작은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어··· 어?”

한편 채은비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은 거의 9시에 가까워진 시간.

원래는 7시면 퇴근한다고 했던 사람이 지금까지 남아있는 이유라고 하면···

“설마 저 기다린 거예요?”

채은비의 말에 강태한은 가볍게 실소를 터트렸다.

“원래 이렇게 차를 내와야하는 직원 분이 이미 퇴근하기도 하셨고··· 은비 씨가 아까 그랬잖아요.”

“그랬···다뇨?”

“같이 밥 먹어야 된다고.”

강태한에게 수혈(睡穴)을 짚이고 쓰러진 직후, 채은비는 끙끙 앓는 듯한 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이미 잠들었기에 잠꼬대처럼 발음도 뭉개지고, 집중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강태한에게는 분명하게 들려왔던 것이다.

“아마··· ‘오빠랑 밥 먹어야 되는데.’ 이렇게 말했었죠. 발음은 좀 많이 다르긴 했지만.”

“에? 어, 정말로?”

“네. 그래서 기다리고 있었죠.”

그 말을 들은 강태한은 피식 웃고는 이불을 덮어주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곤 피트니스 클럽에서 평소처럼 운동을 한 다음,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뭐 서울까지 오라고 했고, 실제로 올라왔으면 밥 한 번 정도는 같이 먹는 게 맞긴 하죠.”

“그, 그쵸? 하하, 그냥 헤어지면 너무 정 없으니까! 서울까지 먼 길 왔으니까!”

당황한 채은비가 어색하게 웃으며 횡설수설했다.

아까 받았던 안마의 영향이 남아있는 건가, 괜히 얼굴과 귀에 붉은 기운이 올라왔다.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요?”

“그, 글쎄요?”

“이 시간까지 여는 식당이 별로 없기는 한데··· 감자탕 혹시 괜찮으시려나?”

“아, 감자탕 좋아해요. 뼈해장국도 좋고.”

“다행이네요. 그럼 천천히 차 좀 마시다 나오세요.”

강태한은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주황빛 조명등을 환한 백색등으로 바꿔 키고는 밖으로 나갔다.

채은비는 닫힌 문을 한동안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으···”

그녀는 그러다 괜히 머리를 박박 문질렀다.

머리를 문지르는 손길이 꽤 거칠었으나, 정작 그녀의 표정은 입 꼬리가 올라간 채로 히죽거리고 있었다.

‘아쉬울 뻔했네.’

허리도 나아지고 밥도 먹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상황.

혼자 잠꼬대를 했다는 말은 들었을 땐 좀 창피했으나, 결과가 좋으면 뭐 아무렴 어떤가.

“근데 그럼··· 이제 오빠라고 불러도 되나?”

아직 나이를 물어보진 않았지만, 사실 강태한이 아저씨라고 불릴만한 외모는 아니다.

왠지 묘하게 연륜이 담긴 분위기가 있긴 하지만, 단지 그 뿐.

뭔가 관계에 한계치를 그어놓는 느낌이 들기도 해서, 도중에 호칭을 바꿀 타이밍을 재고 있었는데··· 얼떨결에 그 시작을 끊어놓은 셈이다.

“태한 오빠인가···”

태한 오빠. 태한 오빠.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채은비는 새삼 누굴 오빠라고 불러본 적이 별로 없었다는 걸 깨닫고, 괜스레 두어 차례 발음을 연습하다가 테이블에 놓여진 찻잔을 들어올렸다.

“어, 뭐야 이거.”

생각보다 맛있다.

인스턴트 녹차 정도로 생각하고 마셨는데, 뭔지 모를 달콤 쌉쌀한 맛이 입 안에 착 달라붙는다.

약간 기성품이 아닌 수제의 맛.

···혹시 이것도 나를 위해 따로?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너무 갔다.

채은비는 살살 고개를 저으며 다시 차 한 모금을 들이켰다.

* * *

“흠흠. 저, 그··· 아저씨.”

채은비는 괜히 목을 가다듬은 다음, 다시 원래대로 아저씨라는 호칭으로 강태한을 불렀다.

분명 아까 전에는 ‘그냥 오빠라고 부르면 그만이지’라고 간단히 생각했었는데, 막상 부르려니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은 탓이다.

“왜 그래요?”

“별 건 아니고··· 사실 아저씨가 아저씨라고 불릴만한 나이는 아니잖아요? 아까 스물여섯이라 했나?”

“맞아요. 스물여섯.”

“그럼, 그··· 아저씨보다 더 적절한 호칭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그렇지 않나?”

그렇게 말하면서 채은비는 넌지시 강태한의 눈치를 살폈다.

강태한은 이번에도 의문스런 표정을 지었다.

너무 당연한 부분을 물어본 느낌이 들은 탓이다.

“그럼 오빠라고 부르면 되잖아요.”

“그···렇죠? 헤헤. 이게 오빠라는 말이 좀처럼 입에 잘 안 붙어서.”

“뭘 새삼스럽게 그래요. 아까도 불렀으면서.”

“아니, 그때는 그냥 잠꼬대였잖아요. 맨 정신이랑은 다르지. 그보다, 전 스무 살이니까 말 편하게 해요.”

“나는 상관없지. 그럼 그렇게 할까?”

강태한이 싱긋 미소를 지었다.

동생이 생긴 것 같아 나쁘진 않은 기분.

그는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놨다.

‘아, 이게 뭐라고 참.’

호칭 하나 바꾸는데 이렇게까지 긴장을 할 줄이야.

겨우 목표한 바를 이룬 채은비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그렇고, 허리는 좀 어때?”

“아, 진짜 많이 좋아졌어요. 느낌부터가 달라졌다고 해야 되나? 굳이 비유를 들자면··· 보급형 골프채 쓰다가 하이엔드급으로 바꾼 느낌이에요.”

채은비가 가볍게 허리를 좌우로 비틀며 말했다.

그녀의 말은 과장이 섞여있을지언정 거짓은 아니었다.

실제로 혈도의 배치가 개선되면서, 본래 그녀가 건강했을 때보다 더욱 상태가 좋아졌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완치가 된 건 아니다.

강태한은 웃고 있는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도 한동안은 무리는 하지 마. 골프는 충분히 회복기간을 둔 다음에 치도록 하고.”

“음··· 몇 주 정도요?”

짐짓 엄하게 말하는 강태한의 목소리에, 채은비의 얼굴에 긴장의 기색이 맴돌았다.

허리는 생각보다 섬세하고 예민한 곳이며, 때문에 어지간한 부상은 완전히 회복되기까지 꽤 긴 시간이 소요된다.

디스크 같은 경우에는 사실상 평생 관리를 해줘야하는 수준이니까.

지금 허리의 느낌은 굉장히 좋다지만, 관리를 잘못하면 갑자기 악화되거나 다시 원상태로 되돌아가는 일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정도는 채은비도 염두에 두고 있던 부분.

다시 프로골퍼로 복귀할 수만 있다면야, 설령 몇 개월, 아니 몇 년은 회복에만 집중해야 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글쎄. 한 사흘 정도는 일찍 자는 게 좋겠네.”

“···사흘이요?”

허나 강태한의 입에서 나온 건, 그런 그녀의 각오가 무색해질 정도로 짧은 단위였다.

채은비는 자기도 모르게 강태한에게 되물었다.

“왜. 밤에 꼭 봐야하는 프로그램이라도 있어? 그래도 회복에 충분한 수면은 필수라고.”

“···풉.”

하하하하하.

순간 채은비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터무니없는 말을 진지하게 꺼내는 강태한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너무 웃으면 허리에 압박이 갈 수도 있겠는데?”

“아니··· 킥킥, 아. 어이가 없잖아요. 사흘이면 된다니. 하하하하.”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웃음을 터트리는 채은비.

강태한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넌지시 티슈를 건넸다.

막연하게 소망해왔던 일이 이뤄진 덕분일까.

웃고 있는 그녀의 눈에선 어느 순간부터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 * *

“···뭐지?”

태국 해안가에 위치해있는 한 열대 섬.

섬의 바닷가 인근에서 촬영대기를 하고 있던 유세아는, 문득 느껴진 기운에 고개를 돌렸다.

묘하게 등골이 싸늘해지는, 그런 느낌이라고 할까.

우연인지, 유세아가 고개를 돌린 방향은 그녀의 고국인 대한민국이 위치해있는 방향이었다.

‘마치··· 집에 도둑이라도 든 것 같은.’

그런 싸늘하고 불길한 직감.

옛날에 냉장고 깊숙이 숨겨놨던 마카롱을 여동생이 먹어치웠을 때 느꼈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저기, 세, 세아 씨?”

“···예?”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분위기가 날카롭네.”

근처를 지나가던 조감독이 넌지시 물었다.

평소 다른 배우들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촬영 스태프들에게도 신경질 한 번 낸 적이 없는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표정도 딱딱하고 눈매엔 싸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음··· 그래요? 별 일은 없는데.”

허나 다음 순간, 굳어있던 유세아의 표정이 부드럽게 풀어지고 눈매도 자연스러운 호선을 그렸다.

과연 배우라는 말이 어울리는 자연스러운 표정관리였다.

“···어라. 이제 보니 착각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당이 좀 떨어진 걸지도 모르겠네요.”

“아, 그럴 수도 있겠네.”

조감독이 손 그늘로 햇빛을 가리며 하늘을 쳐다봤다.

슬슬 해가 져가고 있긴 했지만, 날 자체가 덥다보니 수분이 부족하거나 당이 떨어져서 집중력이 떨어지는 건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럼 내가 간식이라도 좀 갖다달라고 할까?”

“그럼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하하. 세아 씨 부탁이라면 뭐든지 들어줄 수 있지.”

손을 흔들고는 다시 가던 길을 걸어가는 조감독.

그가 어느 정도 멀어지자, 유세아는 다시 한 번 불길한 기운이 느껴지는 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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