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37화>
“평오대 스포츠의학과 진상우 교수님과 호원준 교수님이라···”
오재윤은 적어놓은 메모를 앞으로 내밀었다.
“제가 받아 적은 게 맞습니까?”
“네. 맞습니다.”
메모의 내용을 확인한 강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진상우와 호원준.
강태한이 이번 학기에 듣기로 했던 두 수업의 교수님들이었다.
“일단 출결문제만 해결되면··· 목요일에도 문제가 없으신 거죠?”
“예. 물론 지금부터 조건도 들어봐야겠지만요.”
“그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지금까진 서로의 시간을 맞춰봤을 뿐, 아직 중요한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오재윤이 걱정하지 말라며 고개를 끄덕이자, 강태한은 싱긋 미소를 지었다.
‘잘 됐네.’
사실 학교 수업 때문에 이 일을 거절할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다.
단지 본인이 직접 처리하려면 다소 번거로워지는 과정을, 저쪽에서 쉽게 처리해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
아무래도 학생 한 명이 가서 말하는 것보단 프로구단에서 전화 한 통 넣는 것이 좀 더 이야기가 빠르게 진행되지 않겠는가.
‘어차피 요즘 휴일에는 서울에 있을 때보다 대전에 있는 경우가 더 많고.’
아버지를 뵈러 간다든가, 산에서 약초를 캔다든가, 캠핑을 하면서 운기조식을 좀 한다든가.
강태한은 이미 대전 인근에서 보고있는 용무가 많았고, 휴일에 대전에 내려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말하자면, 출장 때문에 대전에 내려가는 게 아니라 대전에 내려간 김에 출장도 다녀오는 셈이다.
“근데 아실지 모르겠지만, 저희 구단이 대전에 있습니다. 그래서 대전까지 와주셔야 하는데, 혹시 그 부분은 괜찮겠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하지만 그런 내용을 이쪽에서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다.
강태한은 턱을 매만지며 짐짓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미처 생각을 못하고 있었다는 얼굴이다.
“···하지만 그만큼 감독님께서 배려를 해주실 거라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야 물론이죠. 저희 구단이 그렇게 재정이 많은 팀은 아니지만, 그래도 선생님 한 분의 교통비 정도는 넉넉하게 챙겨드릴 수 있습니다.”
말보다는 실제로 숫자를 보여주는 쪽이 이야기가 빠르다.
오재윤은 테이블 위에 올려둔 볼펜을 집고 숫자들을 적기 시작했다.
“실장님에게 여쭤보긴 했었는데, 아무래도 대전까지 나가는 출장비는 적정가격을 잡기가 힘들다고 하시더라고요.”
안마사가 직접 방문하는 건 꽤 흔한 서비스고 일반적인 적정가격대도 잡혀있지만, 서울에서 대전까지 찾아가는 경우는 드물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가격의 기준이 다소 모호한 상황.
하지만 오재윤은 이리저리 흥정하는 걸 선호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그는 처음부터 솔직한 액수를 종이에 적어놓았다.
“일단 선생님께서 다섯 시간 정도 출장을 나와 주신다는 가정 하에··· 이 정도 금액은 제 재량으로 내드릴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은 재무팀이랑 이야기를 좀 해봐야할 거고요.”
그리고 오재윤이 앞으로 내민 종이를, 강태한은 잠시 동안 말없이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서울에서 대전까지 택시타고 다녀도 되겠네.’
강태한이 하루 동안 버는 수입, 여기에 팁까지 대략적으로 계산한 다음, 서울에서 대전까지 택시로 왕복하는 비용까지 합치더라도 꽤 넉넉하게 남는 액수다.
대전에 내려간 김에 다섯 시간 정도 짬을 내는 것 치고는 상당히 짭짤한 보상.
사실 원래는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뭐 고용계약을 맺는 것도 아니고 그냥 출장만 다녀오는 건데, 이 정도면 꽤 괜찮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흠흠. 다만 앞으로도 이 금액으로 쭉 가자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무표정으로 가만히 종이에 적힌 숫자를 내려다보고 있는 강태한.
그 침묵을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생각한 건지, 오재윤 쪽에서 다시 먼저 입을 열었다.
“이건 일단 제 재량 내에서 말씀드린 금액이고, 선수들이랑 구단 내에서도 반응이 나오면 재무팀 쪽에서도 주머니를 좀 열겁니다. 그럼 그때 한 번 더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시죠. 어떻습니까.”
“···음.”
내 평소 표정이 그렇게 불만이 많아 보이는 표정인가?
딱히 이 조건에 불만을 가진 기억은 없었기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좋네요.”
어쨌거나 이야기는 좋은 방향으로 알아서 흘러간 모양이니, 나쁠 것도 없다.
강태한은 그제야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어, 그럼 양도증명서랑··· 이전등록? 그거야 뭐 당연한 거잖아. 그건 나도 알지.”
신준호는 한 손으로 통화를 하며 오른손으로는 필요한 내용들을 메모하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전에 이야기가 나왔던 중고차 양도에 관한 내용들이다.
신준호의 인맥은 꽤 마당발인편.
그때 강태한에게는 아는 딜러 지인들이 다 일을 그만둬서 곤란하다고 했었지만, 그건 그냥 그 자리에서 지어낸 말일 뿐이다.
신준호는 업계인의 상세한 설명을 들으며 앞으로 필요한 절차를 정리하고 있었다.
‘뭐 크게 어려울 건 없네.’
막연하게 복잡한 절차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막상 알아보니 훨씬 간단한 일이다.
태한 학생에게 서명을 받는 것 말고는 지금 당장 처리가 가능한 것들이었으니까.
‘다음 주에도 대전에 내려온다고 했었으니까···’
그때 나머지 절차를 진행하고 차 키를 건네주면 무난하게 마무리되리라.
도움을 받았던 것에 보답을 하는 것이라 그런가, 손해를 봐도 한참 보는 장사를 하고 있음에도 신준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누구랑 통화했길래 그렇게 웃으시나?”
그러자, 쇼파에 앉아 그를 지켜보고 있던 아내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캐묻는다기보다는 순수한 호기심으로 물어보는 질문이었다.
“어, 내가 웃고 있었나?”
“지금도 웃고 있잖아. 히죽히죽.”
그 말에 신준호는 괜히 입가를 더듬어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통화한 건 중고차 딜러하는 박 씨고, 기분이 좋은 건··· 이제 염치가 좀 채워져서 그런가보지, 뭐. 요새 컨디션이 부쩍 좋아져서 그런 걸 수도 있고.”
말을 마친 신준호가 가볍게 스트레칭을 했다.
요 며칠 전부터 몸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하더니, 이젠 활력이 맴도는 게 느껴질 정도다.
“당신 안색이 많이 좋아지긴 했지.”
“참 신기하지. 뭘 먹고 이렇게까지 눈에 띄게 효과를 본 적은 없었는데.”
“그때 받아왔던 산삼?”
아내의 말에 신준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갑작스러운 변화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걸까.
짚이는 구석은 하나 밖에 없었다.
그 날 태한 학생에게 받아와서 먹었던 산삼이다.
‘생각보다 먹을 만했었지.’
신준호는 본래 삼계탕에 들어있는 인삼도 잘 먹지 못한다.
하지만 태한 학생이 기껏 양보해준 산삼인만큼, 두 눈 딱 감고 생으로 씹었었는데···
생각보다 입에 맞아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맛은 여전히 썼지만, 몸에서부터 그걸 받아들이는 느낌이라고 할까···
그날따라 소화도 잘 되더니, 며칠 지난 지금은 그야말로 원기회복을 넘어 원기충만이 되어있는 상태였다.
“태한 학생이 준 거라 그런가, 약효부터가 다르네.”
신준호라고 이전에 산삼을 먹어본 적이 왜 없었겠는가.
다만 그동안은 산삼이라고 챙겨먹어도 그렇게 큰 효과를 본 적이 없었다.
그냥 좀 더 작고 쓴맛이 강한 인삼이었을 뿐.
오히려 밤에 열이 나서 잠을 설쳤던 기억 정도만 남아있었다.
허나 이번에 먹은 것은 달랐다.
애당초 강태한의 가공을 한 번 거친 물건.
필요 이상의 영기는 제거해두고, 신준호의 체질에 맞게 기운의 성질도 한 번 다듬어놓은 것이다.
덕분에 몸에도 잘 받고 흡수의 효율부터가 달라졌던 것.
그리고 그로부터 며칠이 지난 지금, 그 효과는 팔팔한 활력이라는 형태로 톡톡히 드러나고 있는 중이었다.
“태한 학생이 그 사람인가? 당신 목숨 구해줬다는.”
“맞아. 산에서도 구해줬고, 병원에서도 그랬고.”
그리고 이번엔 산삼을 구해 와서 기운까지 되찾게 해줬다.
비록 나이는 어리다지만, 그에겐 그야말로 은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거 나도 뭐 하나 선물해야하는 거 아닌가 몰라.”
“당신이? 왜?”
아내의 말에 신준호가 의아하게 물었다.
“왜긴 왜야. 우리 집 소중한 가장을 이렇게까지 도와줬다는데, 당연히 나도 고마울 수밖에 없지.”
“···허허, 참.”
아내의 말에 신준호가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사실 중고차를 태한 학생에게 헐값에 판다고 했을 때, 내심 조마조마했었던 신준호다.
꽤 큰일이라고 볼 수 있는 일인데, 그걸 혼자 결정한 거였으니까.
‘당신한텐 은인이니까 그 정도는 당신 재량이지.’
하지만 아내는 언제나 그렇듯, 이번에도 그의 선택을 이해하고 존중해줬다.
거기에다 오늘은 저런 이쁜 말까지.
새삼스럽지만, 참 마음씨가 고운 아내였다.
“원래도 좋았지만, 오늘따라 당신이 참 좋네.”
“어머, 뭘 새삼.”
“오늘 오랜만에 좋은 시간 좀 가져볼까?”
“···진짜 기운 다 찾았나보네? 그런 소릴 다 하고.”
신준호는 씨익 웃으며 쇼파로 다가오더니, 그녀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얼마 전까지 기운이 없어 걱정이던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태한 학생을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 학생 덕을 참 많이 보고 있다고,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미소 짓는 신준호의 아내였다.
* * *
“그래서, 가기로 했어?”
“안 갈 이유도 없지. 어차피 대전은 거의 매주 내려가고 있는데. 일단 다음 주부터 가기로 했다.”
“와···”
강태한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자, 맞은편에 앉아있던 최성현이 감탄을 터트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는 꽤 오랫동안 야구를 봐왔고, 대전에서 나고 자란 이로서 한하 호크스를 응원해왔던 팬이었다.
그런 그에게 강태한의 말은 거짓말 같은 이야기였다.
“오재윤 감독이랑 만났다는 것도 못 믿겠는데, 아예 훈련장에 출장을 나간다고?”
“전에 최태준 선수가 왔었잖아. 최태준 선수가 효과를 많이 봤다고 소개를 해줬다나봐. 거기서 연결점이 있었던 거지.”
강태한은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먼저 깔린 밑반찬들을 집어먹었다.
반면 최성현은 감탄을 터트린 입을 좀처럼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야··· 이게 실화네.”
“뭐하면 한 번 물어볼까? 조수 한 명 간다고.”
“···아니, 그건 별로 안 땡기네.”
신기하긴 하지만, 부럽냐고 하면 그건 또 별개의 이야기다.
야구팀을 좋아한다고 해서 선수들도 그렇게 보고 싶나··· 하면 그건 또 다른 느낌이니까.
경기를 보다보면 응원도 하고, 시원하게 욕도 하고 하는 것인데, 실제로 선수들이랑 만나고 나면 왠지 그러기가 힘들 것 같다고 할까.
“괜히 너한테 부담 지우기도 싫고.”
“그럴 줄 알았지.”
붙임성도 좋고 활발하지만, 남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는 일에는 또 조심스럽다.
그런 최성현의 성격을 알고 있었기에, 강태한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회가 되면 선수들 싸인볼이나 좀 챙겨줄게.”
“진짜? 그건 완전 좋지.”
실제로 만나긴 부담스럽지만 선수들의 싸인볼은 갖고 싶은 정도.
그게 딱 최성현의 팬심이었다.
강태한의 말에 최성현이 화색을 지었다.
“근데 솔직히 좀 안심했지 뭐야.”
옆에서 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황 실장이 자연스레 끼어들었다.
“뭐가요?”
“난 태한 씨가 아예 한하 쪽으로 스카웃 되면 장인코스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했었지.”
어느 쪽이건 강태한의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했겠지만, 그것과 별개로 강태한이 빠지게 되면 상당히 곤란해지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제가 한하로요?”
“응. 조건도 여기보다 더 좋지 않겠어?”
“하하하. 조건 따졌으면 애초에 여기에 안 있었죠.”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황 실장은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얼마 전에 비율을 6:4로 올리긴 했다만, 강태한이 마음만 먹었다면 진즉 더 좋은 곳으로 갈 수도 있었으니까.
“지금 출장비가 제법 괜찮긴 한데··· 고용은 또 별개의 이야기 아니겠습니까. 한동안 묶여있게 되는 것도 좀 그렇고요.”
별로 내색은 안 하지만, 강태한은 이 안마사라는 일에 제법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매일 다양한 손님들을 만나고, 그 손님들이 나중에 샵을 나갈 때 개운해하는 걸 보고 있으면 꽤 뿌듯한 감정이 느껴진다.
적어도 저번 삶에서는 느껴보지 못한 부류의 보람.
물론 어딘가에 속해서 한정된 손님들을 꾸준히 관리하고 성과를 지켜보는 것도 나름 보람이 있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별로 생각이 없었다.
“사실 돈만 생각했으면 안마사도 안 했을 테고.”
“그래? 그럼 뭘 했을 거 같냐?”
강태한의 말을 들은 최성현이 젓가락으로 김치를 집으며 물었다.
그 말에 강태한은, 잠시 자기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게 뭔지 생각에 잠겼다.
“음··· 글쎄. 종합격투기?”
“하하하. 뭔 헛소리야. 고딩 때도 싸움 한 번 안했으면서.”
친구의 농담에 헛웃음을 터트리는 최성현.
반면, 최성현과 똑같은 말을 들은 황 실장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왠지 빈말처럼 들리질 않는데···’
농담처럼 말하긴 했지만, 태한 씨라면 마냥 비어있는 말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반쯤은 진담이 섞여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에이. 기분 탓이겠지.’
황 실장은 괜스레 물 한 모금을 들이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