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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 안마하신다-31화 (31/286)

<천마님 안마하신다 31화>

‘괜히 사람 놀래키기나 하고···’

이거 혹시 고백인가? 너무 빠르지 않나?

물론 태한 씨면 키도 훤칠하고, 얼굴은 남자답지만 웃을 땐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고, 몸은 모델을 해도 될 정도로 비율이 좋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생각들을 순간 3초 동안 떠올리고 있었거늘, 혼자만의 오해였다니 갑자기 확 싱거워진 기분이다.

유세아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근데 애초에 나는 어쩌고 싶은 거지?’

달려드는 자동차 앞을 가로막아서고, 태연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던 그 날의 모습.

요즘도 잠에 들기 전이면 몇 번씩 생각나는 광경이다.

처음에는 은인에 대한 고마움인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단순히 그에게 보답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좀 더 그를 만나고 싶고 알고 싶었다.

‘···그렇구나. 나도 좋아서 만나는 거였어.’

호감을 떠나서 강태한과 만나면 마음이 편하다.

작년, 나름 비중 있게 나온 드라마가 대히트를 치면서 유세아는 단숨에 유명배우로 자리를 잡았다.

분명 저번 달까지 월세를 걱정하던 처지였는데, 갑자기 온갖 인터뷰와 방송 출연 제안이 쇄도했던 것이다.

운이 따라줬는지 그 뒤로 출연하는 작품들도 줄줄이 히트.

덕분에 인지도와 함께 수입도 쭉쭉 올라갔지만···

그녀는 주변의 변화가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그동안 그녀를 거의 방치하다시피 내버려두던 회사의 태도부터 바뀌었고, 매니저도 새로 바뀌었다.

주변에서 자신을 대하는 태도도 완전히 달라졌다.

방송국에서도, 촬영장에서도···

심지어 무명생활을 같이 버텨왔던 친구들까지도.

배우 유세아의 이름은, 몇 개월 안 되는 짧은 시간 사이에 그동안 그녀가 살아왔던 인생을 잡아먹었다.

물론 그건 유명인이라면 당연히 거쳐 가는 과정일 것이고, 누군가는 배부른 소리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가슴 한 켠에 채워지지 않는 쓸쓸함이 자리를 잡았던 것도 사실이다.

헌데 강태한과 함께 있는 동안은 뭔가가 달랐다.

이 표현이 맞을지는 모르겠지만···

그 쓸쓸함이 점점 사라지고, 그 대신 따뜻하면서도 간질간질한 뭔가가 그 빈자리를 채워놓는 느낌이다.

그가 처음에 배우 유세아를 몰라봤기 때문일까, 아니면 저 깊이를 알 수 없는 묘한 분위기 때문일까.

어느 쪽이건 간에, 지금은 좀 더 강태한에 대해 알아가고 싶다.

그것이 그녀의 본심이었다.

‘잠깐, 그럼 지금 이 상황은···’

생각을 정리하던 와중, 순간 유세아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지금 강태한과 자신은 명분도 없이 그냥 만나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있는 상황.

그렇다면 이건 이미 데이트라고 부를 수 있지 않겠는가!

강태한과 있으면 마음이 편하고 좀 더 알고 싶은 건 사실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빠르게 진도를 나가도 되는 건가 싶은 유세아다.

“왜요?”

“아, 아니에요.”

순간 강태한과 눈이 마주치자, 유세아는 애써 침착한 표정을 연기했다.

이미 귀가 빨개져있다는 것은 새까맣게 모른 채로 말이다.

“저기··· 크흠. 태한 씨.”

“예?”

“그럼 내일 같이 뮤지컬이나 보러 가실래요? 아는 지인 분에게 티켓을 두 장이나 받았는데, 같이 갈 사람이 없거든요.”

물론 거짓말이다만, 구하려고 마음먹으면 어떻게든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뮤지컬이요?”

“네. 그, 그리고··· 태한 씨가 아까 밥을 산다고 했으니, 뮤지컬 보고 나서 밥 한 번 사시면 그림이 딱 좋을 것 같은데.”

딱딱 맞아떨어지는 자연스러운 애프터 권유!

유세아는 스스로가 대견할 정도였다.

방금 전 대사를 보고 누가 자길 연애 한 번 안 해본 여자라 생각하겠는가.

마치 산전수전 다 겪어본 연애고수, 아니 연애마스터 같은 모습이었다.

“내일은 안 돼요.”

허나 강태한의 대답은 깔끔한 거절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매혹적인 표정까지 짓고 있던 유세아의 얼굴에 당황스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왜, 왜요!”

자기랑 만나는 게 좋다고 했으면서!

남자는 거짓말쟁이라더니,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었나 싶다.

“내일은 쉬는 날이잖아요!”

저번에 지나가듯 수요일과 목요일 날 쉰다고 말했던 걸 놓치지 않고 기억하고 있던 유세아다.

그녀는 자신이 있었던 만큼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미 선약이 있어서요.”

“···선약이요?”

강태한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네. 아버지랑 골프 좀 치러 가려고요.”

“···아하.”

부모님과의 선약은 지켜야지.

아버지라는 단어에 빠르게 냉정을 되찾은 유세아는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녀는 머쓱한 기분을 감추려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태한 씨, 골프도 칠 줄 아세요?”

“아뇨. 처음입니다. 아버지도 처음이신지라, 이번에 같이 배워보려고요.”

“오호. 아버지랑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유세아는 말을 마치고 네 번째 찻잔을 따라냈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번뜩였다.

‘그동안 태한 씨한테 휘둘리는 느낌이었지만···’

자기가 태한 씨한테 골프를 알려줄 수 있다면?

처음으로 적극적인 입장에 있을 수 있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참으로 좋은 생각이었다.

다만 여기에는 사소한 문제가 하나 있었으니.

‘이럴 줄 알았으면 골프 좀 배워둘 걸···’

계획은 세웠지만 실행할 능력이 안 되는 상황.

촬영 때문에 골프장에 가본 적은 있지만, 정작 골프를 쳐본 적은 한 번도 없었기에, 유세아는 내심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 * *

“이야! 태한 학생! 이거 아주 오랜만이야!”

대전 외곽에 위치한 골프 연습장.

그곳의 사무실로 들어가자, 익숙한 얼굴이 화색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예전에 계룡산에서 인연이 닿았었던 조원호였다.

“오랜만이에요, 조 사장님.”

호칭에 대해 잠깐 고민하다 자연스레 사장을 붙인 강태한이다.

조원호는 웃으며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뭘 딱딱하게 사장님이야. 그냥···”

형, 아저씨, 원호 씨··· 여러 호칭들이 떠올랐지만, 하나같이 어울리지 않는다.

조원호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사장님이 제일 무난하네.”

“아무래도 그렇죠?”

두 사람은 서로 헛웃음을 터트렸다.

강태한은 슬쩍 주변을 둘러보다가, 들고 있던 종이가방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조원호가 질색을 하며 손을 저었다.

“에에이, 참! 이런 건 또 왜 가져와.”

“빈손으로 올 순 없잖아요.”

“그럴 필요 없다니까··· 근데 이게 뭐야?”

선물을 바라는 마음은 없었다. 그건 진심이었다.

허나 그래도 받으면 궁금해지는 것이 사람의 심정.

이미 종이가방에서 꽤 큼직한 유리병을 꺼낸 조원호가 강태한에게 물었다.

“보아하니 뭔가 약초가 들어있는데··· 술인가?”

“술은 아니고, 도라지를 꿀에 절여놓은 도라지청이에요. 맛도 꽤 달달하니 괜찮고··· 피로회복이랑 기력보충에도 아주 좋습니다.”

“···그래?”

남자에게 기력이란 단순한 힘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강태한이 가볍게 엄지손가락을 세우자, 조원호의 양쪽 입 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흐흐, 고마워. 근데 이거 어떻게 먹어야 하나?”

“별거 없어요. 꿀물 타듯이 뜨거운 물에 풀어 드시면 됩니다. 도라지는 그냥 드시면 되고··· 제가 시범 삼아 한 잔 타드릴까요?”

“에헤이, 손님이 무슨. 그냥 앉아있어. 내가··· 아이고, 어서 오십쇼.”

그때 사무실 문을 열고 한 명이 더 들어왔다.

나이가 지긋한 중년의 남자.

강태한이 먼저 인사를 나누는 동안 주차를 하고 온, 아버지 강호연이었다.

“반갑습니다. 조원호라고 합니다.”

“강호연이라고 합니다. 이거 실례가 되는 건 아닌가 모르겠습니다. 됐다고 하는데도 아들놈이 계속 오자고 하는 바람에 원.”

“아유! 괜찮습니다. 애초에 제가 먼저 골프 치러 오라고 했는데요, 뭘. 오히려 안 왔으면 섭섭할 뻔했습니다. 하하하.”

그러지 말고, 여기 앉아서 말씀 나누시죠.

조원호가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연스레 이야기를 진행시켜나가는 것이 사람 대하는 게 익숙하고 능숙한 모습이었다.

“근데 어쩌다 저희 아들놈이랑은···”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태한 학생이 아주 걸출한 친구입니다. 제 친구 목숨을 구해줬다니까요? 계룡산에 그 험악한 언덕에서 막, 요래 몸을 날리는데···”

“허어, 그래요?”

그런 조원호 덕분인가, 두 사람 사이에 물 흐르듯 대화가 흘러간다.

옆에서 지켜보던 강태한은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피포트가 어디 있나.’

보아하니 아버지도 대화가 잘 맞으시는 모양.

그럼 굳이 이야기에 끼어들게 아니라, 아까 말했던 시범도 보일 겸 도라지차를 내오기로 했다.

앞서 말했듯 차를 끓이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냥 유자차를 끓이듯, 뜨거운 물에다 도라지청을 넣고 저어주면 그만이다.

순식간에 만들어진 세 잔의 도라지차.

강태한은 쟁반에 머그잔을 올리고 자리로 돌아갔다.

“아, 차 내온다는 걸 깜빡했네.”

“괜찮다니까요.”

“에이··· 그럼 고맙게 잘 마실게.”

웃으며 머그잔을 집어든 조원호.

순간 그의 얼굴에 흥미로운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그윽하게 퍼지는 달달하면서 쌉쌀한 향이 은근하게 취향을 저격한 것이다.

“···오.”

입술이 데이지 않도록 조심히 한 모금 마신 순간.

그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나왔다.

대부분의 약초차는 건강에 좋다면서 겁나게 쓰기만 하거나, 꿀이 들어갔더라도 단맛과 쓴맛이 따로 노는 경우가 많다.

허나 이건 좀 달랐다.

꿀이 도라지의 진액을 제대로 머금고 있다고 할까.

두 개의 맛이 제대로 어우러져, 달달하면서도 깊이가 느껴지는, 조화로운 맛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야, 이거 물건이네! 형님이 담그신 겁니까?”

꽤 차이가 나는 강호연과 조원호의 나이.

그새 통성명을 마치고 호칭도 형님으로 바뀌어있는 조원호다.

한편, 강호연도 차 맛에 조금 감명을 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태한이가 담근 것 같은데.”

“히야··· 아들 참 잘 두셨습니다, 형님. 사실 아버지가 골프를 치고 싶어 한다고 연락했을 때, 좀 감동해버렸지 뭡니까. 요새 이런 애들이 별로 없지요.”

“···내가 아들 잘 두긴 했지. 참 잘 컸어.”

자연스레 아들의 칭찬으로 흘러가는 대화.

강태한은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다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골프 치러 안 가십니까?”

옆에서 대놓고 자기 칭찬을 듣고 있는 것이 영 낯이 간지러운 강태한이었다.

* * *

사실 강태한이 조원호에게 연락을 했을 때는, 그렇게까지 큰 기대를 하지 않았었다.

구면이라고 해도 산에서 한 번 만난 사이고, 친구를 구해줬다곤 하나 친구가 아니라 본인을 구해줬어도 그냥 고맙다는 말만 하고 인연을 끝내려는 인간은 수두룩하다.

‘하지만 이건 너무 기대 이상인데···’

강태한은 옆에서 골프채를 휘두르는 아버지를 보았다.

그 옆에는 조원호가 박수를 치고 있었다.

“아, 형님! 이건 뭐 스윙 한 번 할 때마다 실력이 늘어나는 게 보입니다. 소질이 좀 있으신데요?”

“그, 그런가? 하하하.”

“일단 7번 아이언으로 계속 해보시고, 감 좀 잡은 다음에 우드도 한 번 휘둘러보시죠.”

골프클럽 사장이 완전히 딱 붙어서 1:1 강의를 해주고 있는 상황.

아니, 이건 강사라기보다는 같이 놀러온 친구 같은 느낌이다.

산에서 봤을 때도 어렴풋이는 짐작하고 있었지만, 조원호의 미친 듯한 친화력에 강태한도 감탄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참 고맙네.’

처음 강태한이 연락을 했을 때, 조원호는 흔쾌히 수락을 하며 처음 배울 땐 연습장으로 가야한다고 이곳의 주소를 알려줬었다.

이것만으로도 이미 고마운데, 이렇게 같이 연습장으로 와서 아버지에게 처음부터 끝까지 친절하게 알려주고 있는 상황.

다만 이건 조원호 본인도 조금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원래 초보자에게 이것저것 알려주며 지켜보는 재미도 있는 법이니까.

“즐거워 보이셔서 다행이야.”

그 옆에 있는 아버지도 아주 좋아하시는 눈치다.

골프도 골프지만, 운동을 하면서 같이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상대가 있으면 더욱 신나는 법이니까.

한편, 강태한은 골프채를 놓고 벤치에 앉아있었다.

힘은 당연히 아직도 남아돌지만···

몇 번 공을 쳐보니, 이미 이 골프라는 스포츠의 기교와 근본적인 묘리를 대강 파악해버린 것이다.

아마 정식으로 배우는 골프 기술과는 많이 다르겠지만···

공을 쳐서 원하는 포인트로 보낸다는 기능적인 부분은,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처음 왔다는 놈이 너무 잘 치는 것도 이상하지.’

처음부터 빵, 빵 쳐대는 걸 보면 아마 조원호가 야단법석을 떨면서 감탄을 터트릴 것이다.

그 모습이 눈에 보이듯 훤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시선을 끌 필요가 있겠는가.

되도록 오늘의 주인공은 아버지가 되었으면 하는 게 강태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골프가 쳐보고 싶었던 건, 강태한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셨으니까.

‘이미 목적은 달성된 셈이지.’

골프채를 휘두르는 아버지의 표정은 눈에 띄게 밝아보였다.

아버지가 요리 말고 취미다운 취미를 해보신 게 얼마만인가.

그걸 지켜보는 강태한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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