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님 안마하신다-30화 (30/286)

<천마님 안마하신다 30화>

“···야. 고맙다.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내가 말했잖아. 세이브 포인트 같은 곳이라고.”

김민열의 대답에 이동찬의 입 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게임 속 세이브 포인트에는 대개 회복시설이 갖춰져 있다.

우물이라든가, 여관이라든가.

게임마다 시설의 명칭과 설정은 제각각이지만, 그곳에 가면 체력과 마력을 큰 폭으로 회복시켜주거나 아예 최대치로 채워준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동찬에게 이곳은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이리저리 치여 다니고, 잦은 야근으로 점점 몸이 축나는 것이 느껴져도, 이곳에 다녀오면 ‘불러오기’ 버튼이라도 누른 것처럼 다시 힘을 얻을 수 있다.

물론 게임에서처럼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몸 상태만큼은, 여관에서 자고 나온 게임 캐릭터처럼 쌩쌩하게 초기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네가 왜 이렇게 오버를 하나 싶었지.”

“뭐 임마? 기껏 큰맘 먹고 양보해줬더니?”

“그러게. 나였으면 아마 양보 못했을 걸.”

사우나에 가자고 할 때 봤었던 이동찬의 진지한 눈빛.

그때는 왜 저러나 싶었는데, 지금이라면 이해할 수 있다.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리는 직장인에게, 이 안마는 정말 어지간해선 양보할 수 없는 막대한 존재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기분은 좀 어떻냐?”

“···덕분에 많이 나아졌다. 고마워.”

“됐고, 고마우면 술이나 사라.”

머쓱하게 감사를 전하는 친구에게, 이동찬은 털털하게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다.

적어도 세이브 포인트를 양보한 보람은 있어 보였다.

“···물론 비싸고 맛있는 걸로.”

하지만 여전히 아쉬운 마음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었기에, 굳이 뒤끝으로 추가 내용을 덧붙이는 이동찬이었다.

* * *

“흐으으···”

술자리가 끝나고, 김민열은 혼자 기분 좋게 밤거리를 걷고 있었다.

밤공기가 선선한 것이, 살짝 올라있는 취기를 식혀주는 듯해 기분이 좋았다.

‘···정말 오랜만에 기분 좋은 밤이다.’

그야말로 끝내주는 안마를 받고, 기절한 듯이 한 숨 푹 잔 다음, 한 번 더 목욕탕에 들렀다가 친구랑 기분 좋게 술까지 한 잔 걸치고 나왔다.

어떻게 이보다 좋을 수 있겠는가.

요 근래 밤새도록 회사에 붙들려있거나, 집에 가더라도 스마트폰이나 좀 보다가 잠들었던 것에 비하면, 정말 완벽한 하루의 마무리였다.

사실은 전부 꿈이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

허나 꿈이라고 하기엔 머릿속이 지나치게 맑고 개운했다.

술을 몇 잔 걸쳤음에도 머릿속 생각들이 또렷했으니까.

그 뿐이겠는가.

잦은 야근으로 이곳저곳 삐걱거리던 몸은, 이제 윤활유라도 발라놓은 것처럼 매끄럽다.

어찌된 게 안마의 효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크게 드러나고 있었다.

느슨하게 풀어져있던 근육들이 천천히 짜맞춰져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덕분인지 맨날 구부러져 있던 허리도 제 멋대로 꼿꼿하게 세워져있고, 처져있던 어깨도 당당하게 양 옆으로 펴져있었다.

“이렇게 개운한 기분이 얼마만인지.”

마치 학생 때로 되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이다.

몸에 활력은 물론이고, 일에 대한 의욕과 열정도 넘쳐흐르고 있던 그 시절로.

물론 자기가 정말로 젊어졌을 리는 없지만···

몸의 상태가 나아진 덕분일까, 적어도 의욕과 열정만큼은 다시 되살아난 모양이다.

요즘에는 업무에 관해 생각만하면 무기력하고 비관적인 생각들만 떠올랐는데, 지금은 좀 더 생각의 폭이 넓어져 있었다.

오히려 과거에 수동적으로만 행동했던 자신이 조금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효과가 좋긴 한가봐.’

술을 마셨음에도 머릿속은 요 근래 어느 때보다도 활발하게 돌아간다.

이 정도 열정은 신입 때나 낼 수 있는 거라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한 번 더 열심히 해볼까.’

결국 생각은 자연스레 그 쪽으로 이어진다.

좀 더 해보고 싶다는 의욕과 용기가 생긴 덕분이다.

원래 생각했던 대로 그만두고 다른 일을 찾아보는 것도 방법이겠지만···

아직 시도하지 못한 것들도 있었기에, 그러면 찝찝하게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

“수틀리고 나서 때려치워도 늦진 않으니까.”

지금 포기하고 그만두는 것과 배수의 진을 치고 뭐라도 해보는 것.

아무래도 미련이 남지 않는 쪽은 후자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된 거, 최대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밀어붙여보자.

잘 안 풀려봤자 회사에서 잘리기밖에 더하겠는가.

원래 하려고 했던 퇴사가 조금 늦어질 뿐이다.

‘나는 힘만 살짝 실어주도록 하지.’

문득 안마사 선생님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런 것치곤, 꽤 많은 힘을 받았다는 생각이 든다.

선생님뿐만 아니라 그 기회를 양보해주고 술 상대를 해준 친구, 이동찬에게도.

만약 이대로 회사를 그만뒀더라도 다른 길이 있었겠지만, 한동안은 무기력한 상태로 후회의 시간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포기하는 대신에, 조금만 더 힘을 내보자.

지금은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적막한 밤공기 속에서 홀로 히죽 미소를 지었다.

* * *

사람과 사람의 관계는 기본적으로 기브 앤 테이크다.

자기가 뭔가를 받았으면 뭔가를 주는 것.

이것이 바람직한 인간관계를 쌓는 첫 걸음이다.

허나, 만약 한 번에 돌려주기는 힘들 정도로 커다란 걸 받았다면?

그럼 두 번, 세 번에 걸쳐서라도 갚는 것이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몇 번 더 만나는 건 당연한 거지.’

유세아는 스스로의 생각에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식사를 한 번 대접하긴 했지만, 그 정도로 강태한에게 진 빚을 갚았다고 하긴 힘들었다.

사고에 날 뻔한 걸 구해줬으니까, 앞으로 적어도 열 번··· 아니, 스무 번은 뭔가를 해줘야 계산이 맞지 않겠는가.

그것이 유세아의 생각이었다.

그럼 굳이 계속 만날 것이 아니라 그만큼의 가치에 맞는 선물을 보내면 되지 않겠느냐?

그런 의문을 누군가 던질 수도 있겠지만···

‘그건 정이 없다.’는 것이 유세아의 대답이고.

‘그러면 강태한과 만나는 횟수가 줄어드니까 오히려 효율이 떨어지는 거다.’라는 것이, 자기 자신도 모르고 있는 유세아의 본심이었다.

“세아 씨는 좋은 가게를 많이 아시는군요.”

한편, 맞은편에 앉은 강태한이 찻잔을 매만지며 말했다.

형태는 물론이거니와 색도 곱고, 손에 쥐었을 때 무게도 가벼운 것이 딱 봐도 고급품이었다.

잔에 이 정도 신경을 썼다는 것은 찻잎에도 각별한 신경을 썼다는 것.

아니나 다를까, 찻주전자를 열어 향을 맡아보니 그윽한 향이 퍼져 나왔다.

창문 너머로는 소박하지만 잘 꾸며놓은 정원이 보이고, 따로 칸막이로 테이블이 분리되어있어 조용히 담소를 나누기에 좋은 공간이다.

“후후, 뭐··· 그런 편이죠.”

유세아는 살짝 머리를 넘기며 여유로운 표정을 지었다.

당연하게도 거짓말이었다.

전날 아는 선배한테 물어봐서 겨우 알아낸 가게였다.

이 부근에 혹시 카페 말고 제대로 된 괜찮은 찻집을 아느냐고.

덕분에 이 가게를 알아냈지만, 한 가지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근데 이거 어떻게 해야 되나···’

정작 본인이 제대로 된 찻집에 와본 적이 없는 것.

차를 시키면 그냥 커피처럼 차 한 잔이 나오는 건 줄 알았는데, 테이블 위에 뭐가 여러 개 올라왔다.

찻잔과 찻주전자, 그리고 웬 보온병.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굳어있을 때, 강태한이 싱긋 웃더니 자신의 보온병을 들어올렸다.

우선은 찻잔에 보온병에 담긴 뜨거운 물을 붓는다.

차갑게 식어있는 잔을 덥히는 동시에, 첫 잔을 우려낼 물을 미리 살짝 식혀두기 위함이다.

잔에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면 찻잎이 들어있는 찻주전자에다 물을 붓는다.

잎에 따라 우리는 시간은 다르지만, 녹차는 너무 오래 우릴 필요가 없다.

특히 첫 잔은 살짝만 우려내 가볍게 향만 먼저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

강태한은 그 과정을 여유롭게, 굉장히 느린 손놀림으로 움직였다.

누군가에게 시범을 보이듯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시범된 조교의 배려 깊은 시범을 보고 유세아도 성공적으로 첫 잔을 내는 데 성공했다.

“···오?”

조심스레 첫 입을 머금은 유세아의 입에서 짧은 감탄이 새어나왔다.

자기가 알고 있던 녹차랑은 다른, 가벼우면서도 깊은 향이 느껴졌다.

거기에 차의 온기가 스며들듯이 온몸에 퍼지고 향긋한 향이 피로를 씻어내는 듯한··· 낯설면서도 기분 좋은 온화함이 몸을 감쌌다.

“괜찮죠?”

“아··· 네.”

서호용정(西湖龍井).

이게 녹차인지도 모르고 있었으나, 강태한이 권하기에 별 생각 없이 주문했던 찻잎이다.

그런데 이렇게 입에 잘 맞는다니.

유세아는 말없이 첫 잔을 비우다가 슬쩍 시선을 올렸다.

그러자 그녀를 보고 있던 강태한과 눈을 마주쳤다.

“···좀 티 났죠?”

결국 유세아 본인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떤 거요?”

“이런 찻집 처음 와본 거요.”

“예. 그런 편이죠.”

강태한이 슬쩍 미소를 짓자, 유세아가 작게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사실 이런 거 잘 몰라요.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나 좀 마시지··· 서호용정인가 서호용궁인가도 그냥 태한 씨가 추천해서 시킨 거뿐이고···”

“저는 세아 씨가 잘 몰라서 알아차린 게 아니에요.”

강태한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어려워하시는 걸 보고 알았을 뿐이죠. 그냥 마음대로 마시면 되는데, 처음 마셔보는 사람들은 특별한 뭐가 따로 있는 줄 알고 어려워하거든요.”

물론 차를 더욱 깊이 즐기는 방식이 있긴 하다.

찻물의 온도는 어떻게 하고 찻잎은 얼마나 우릴 것인지, 찻주전자에서 차는 어떤 높이에서 따를 것인지.

그런 것들 하나하나에 세밀한 차이가 생긴다.

허나 그런 것들을 전부 지키려고 들면 정작 차를 즐길 수 없다.

다도(茶道), 다례(茶禮).

설령 이런 것들이 교양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차를 즐기는 데 방해가 된다면 하잘 것 없는 것들이다.

‘그렇게 엄청난 차이도 아니고.’

때문에 정말로 차를 사랑하는 사람은, 본인의 기준은 엄격할지언정 다른 사람의 방식을 지적하진 않는다.

적어도 강태한이 그동안 본 사람들은 그랬다.

“그냥 편하게 드시면 돼요. 찻잎을 우리고, 우러난 차를 찻잔에 따라 마시고. 반드시 지켜야하는 건 이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의 말을 들은 유세아는 다시 찻주전자에 물을 붓고, 잠시 뒤 두 번째 잔을 따라냈다.

방금 전과 다르게 좀 더 편한 마음으로 우리고 마셔서 그런 걸까, 처음 마셨던 것보다 맛과 향이 더 깊게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생각보다도 훨씬 좋을 지도···’

입 안에 착 감기는 느낌.

안 그래도 카페인 좀 줄이라는 말을 들었었는데, 이참에 녹차로 갈아타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유세아였다.

“그건 그렇고, 다음번에는 제가 한 번 사야겠네요.”

강태한이 차 한 모금을 입에 머금으며 말했다.

찻집은 이미 식사를 마친 후에 온 거였고, 저번처럼 이번에도 유세아가 계산을 한 상황이었다.

“예? 왜 태한 씨가 사요.”

“계속 세아 씨한테 얻어먹을 순 없잖아요.”

그러자 유세아가 가볍게 손을 저었다.

“얻어먹는 게 아니죠. 제가 보답을 하는 건데.”

“···뭐야. 아직도 그런 거였어요?”

강태한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필요 없다고 그렇게 말했건만, 아직도 그런 소리를 하는 모양이었다.

“저는 그냥 좋아서 만나는 거였는데.”

“쿨룩, 쿨룩!”

입가에서 찻잔을 기울이던 유세아가 기침을 터트렸다.

허나 그런 상황에도 놀란 두 눈은 강태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쿨룩, 아, 네 괜찮아요. 아니 그보다, 뭐라고요?”

“좋아서 만나는 거였다고요.”

순간 유세아의 뺨이 확 붉게 물들었다.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는데.

아니, 그보다 이 남자는 왜 갑자기 이런 돌직구를 날리는 것인가.

유세아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허나 다음 순간, 강태한의 말 한 마디에 그녀의 복잡했던 머릿속은 단숨에 착 가라앉았다.

“싫어할 이유가 없죠. 좋은 사람이랑 같이 식사하고 차도 마시는데.”

“···아하. 같이 만나는 게 좋았다고요.”

한껏 차분해진 유세아의 목소리.

그녀는 자기도 모르게 조그만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난 또 뭐라고.’

그녀는 찻잔을 들어 잠시 목을 축였다.

몸에 잘 맞는 차라고 해도 놀란 가슴까지 한 번에 진정시켜주지는 못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