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29화>
사람에게는 누구나 휴식이 필요하다.
단순히 일의 효율을 떠나서, 쌓여가는 피로를 무시하고 방치하다보면 어느 순간 몸이나 정신, 둘 중 하나에 무리가 가버린다.
특히 사람에게 생각보다 취약한 부분은 정신이다.
몸에 뭔가 이상이 생겼을 때는, 그에 맞는 증상이 나타나거나 통각이라는 경보가 울린다.
가슴이 뻐근하다든가, 평소보다 허리가 쑤신다든가 하는 신호들이 주기적으로 울리는 것이다.
허나 정신은, 마음은 다르다.
사람의 마음에는 고통을 알려주는 통각이 없다.
세상과 부딪히며 조금씩 상처가 쌓여가더라도.
고개를 숙이는 사이 자존감이 깎여나갔더라도.
서서히 지쳐가며 활력을 잃어가는 와중에도.
약간의 우울감만 있을 뿐, 본인은 별다른 증상을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그 상태로 오히려 적응을 해버린다.
그러다 그것들이 누적되고, 곪아서, 터지는 순간.
그때서야 깨닫는 것이다. 자신은 이미 한계에 몰려있다는 것을.
그와 동시에 밀려오는 외로움과 공허함, 좌절감··· 누구에게 뭐라 설명할 수도 없는 온갖 비관적인 생각들이 물밀듯이 쏟아진다.
거기서 혼자 헤어 나오는 일은 쉽지 않다.
명성을 떨치던 절세의 고수도 자칫 잘못하면 폐인의 길로 접어들게 만드는 것이 심마(心魔)의 늪, 즉 마음의 병이다.
혹여나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어 도움을 준다면 좋겠지만···
당장 큰 병이 나는 것도 아니기에 어느 정도는 견딜 수 있고, 본인이 내색을 하지 않는 한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기에 그것도 쉽지가 않다.
‘이 양반도 꽤 심각해 보이는군.’
강태한은 앞에 누워있는 손님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퇴근시간대인 만큼, 이때쯤 찾아오는 손님들은 대개 심신이 지쳐있는 직장인들이 많다.
허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이런 경우까진 꽤 드물다.
강태한은 가볍게 혈을 짚어 상태를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심력은 사실상 바닥을 드러낸 지 오래고, 덕분에 혈도는 엉망진창으로 꼬여 최소한의 역할만 겨우 수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심력을 잃었으니 혈도의 흐름도 불안정하고···’
몸의 균형을 유지하고 힘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것은 심력이다.
체내에 활력이 넘쳐나더라도, 심력이 꺾인 상태라면 단순히 고여 있는 힘에 불과하다.
그보다 더 예민한 영역에 속해있는 혈도는 말할 것도 없다.
방향성을 잃은 내력은 정처 없이 헤맬 뿐이다.
심마에 빠진 무림인이 갑자기 기가 역류하거나 주화입마에 빠지는 것이 과장이 아닌 것이다.
‘천천히 몸부터 풀어둬야겠군.’
몸의 혈도가 군데군데 꼬여있는 것도 있지만, 흐름이 불안정하다보니 세부적인 상태를 파악하는 데에도 방해가 된다.
강태한은 일단 굵직한 대주혈부터 시작해서, 천천히 혈도를 따라 가벼운 지압으로 주요 혈자리와 근육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확실히 다르긴 하네.’
한편 침대에 누워있던 손님, 김민열은 강태한의 손길에 작은 감탄을 터트리고 있었다.
마치 뭉쳐있는 곳을 딱딱 집어 풀어주는 듯한 느낌.
확실히 시원하다.
마치 등짝에 창문이 뚫려있어 몸 안을 환기시키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그만큼 지압이 들어올 때마다 찌릿하게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충분히 참을 수 있는 수준이고, 조금만 지나면 인근 근육이 노곤하게 풀어지며 시원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김민열은 완전히 힘을 풀고 침대 위에 늘어졌다.
허나 그렇게 있는 것도 잠시.
긴장을 풀은 사이, 다시 회사의 일이 떠오르는 순간 가슴 한 켠이 먹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후우. 그의 입에서 한숨이 조그맣게 새어나왔다.
“고민이 많아 보이는군.”
“···예. 좀.”
김민열은 침대에 얼굴을 묻은 채로 답했다.
오자마자 누운 상태로 있었기 때문에 안마사의 얼굴을 보진 못했지만, 들려오는 중후한 목소리와 분위기만 봐도 연륜이 묻어나오는 듯했다.
이동찬이 이야기할 때마다 선생님 호칭을 꼭 붙이더니, 확실히 그런 호칭이 어울리는 느낌.
“요즘 되는 일이 없네요. 여태동안 해왔던 게 맞나 싶기도 하고···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든 느낌인데, 그렇다고 돌이킬 방법도 없으니 막막해서.”
그 중후한 목소리 때문일까, 아니면 몸이 노곤하게 풀어져있는 탓일까.
김민열은 평소 잘 꺼내지도 않던 하소연을 짧게 늘어놓았다.
“에이, 뭐 다 이렇게 사는 거겠죠. 저만 힘든 것도 아니고. 괜히 처지는 말이나 꺼냈네요.”
하지만 금방 다시 속마음을 감춘다.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 아니라, 괜히 분위기가 축 처지는 것이 싫은 것이다.
‘심력이 바닥난 이유를 대충 알겠군.’
정신에 스트레스가 쌓이면, 사람은 본능적으로 쌓여있는 스트레스를 발산하려한다.
몸에 해로운 것을 토해내려는 일종의 방어기제다.
가장 대표적이고 쉬운 방식으로는 짜증이 있을 것이고, 습관적으로 뒷담화를 할 수도, 잘 모르는 사람을 붙잡고 하소연을 할 수도 있다.
허나 그 와중에도 타인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절제하는 사람들이 있다.
사회적으로는 대단히 바람직한 모습이겠으나··· 결국 발산되지 못한 스트레스는 본인에게 남아 차곡차곡 쌓일 뿐이다.
그래도 이런 사람을 싫어하진 않는다.
우둔하지만 남을 먼저 배려하는 사람과, 잔머리는 좋지만 자기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강태한은 적어도 인간성에 있어서만큼은 전자를 높이 평가했다.
“세상사람 모두 저마다 고충이 있을 걸세. 허나 그렇다고 해서 자네가 힘들지 않은 것도 아니지.”
강태한은 계속해서 혈을 짚으며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잊고 지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
김민열은 고개를 묻은 채 입술을 다물었다.
안마를 받고 있는 중이라 그런 걸까, 괜히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허나 자네가 갖고 있는 고충을 내가 전부 이해할 순 없을 거라 생각하네. 뭔가 조언을 한다면 쓸 데 없는 오지랖이 되겠지. 그러니.”
원하지 않는 조언은 잔소리일 뿐이다.
애당초 제삼자가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지극히 당연하면서 당사자에겐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본인을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은 본인이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고민들은, 사실 본인 스스로가 답을 알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단지 고민을 하소연할 사람과 행동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할 뿐.
그러니까.
“나는 그저 힘만 살짝 실어주도록 하지.”
슬슬 혈도와 근육을 가볍게 깨워놓는 과정이 끝마치고, 강태한의 두 손이 다시 김민열의 등 위로 올라왔다.
가볍게 쥐어진 주먹. 아래로 향한 엄지.
다음 순간.
“으흐윽?”
김민열의 입에서 당혹감이 서린 비명이 새어나왔다.
방금 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고통과···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쾌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너무 강하게 하면 안 되겠지.’
한편 강태한은 아직도 힘을 조절하고 있는 중이었다.
심력의 영향으로 엉킨 혈도를 너무 강하게 자극했다간 역효과가 날 수 있으니까.
우선은 등 중앙의 척추를 기준으로, 양옆에 나란히 위치해있는 천종(天宗), 고황(膏肓), 궐음(厥陰), 이 세 개의 혈을 차례로 짚어낸다.
상체, 특히 어깨 쪽에 큰 영향을 미치는 주요 혈.
순간의 통증에 움츠러든 채 경직되어 있던 어깨가, 혈을 짚는 동시에 방금 전과 같이 자연스럽게 아래로 축 늘어졌다.
그 상태로 양 어깨를 짚고, 팔 아래까지 내려가 손바닥의 합곡(合谷)혈까지 곧바로 길을 뚫어낸다.
체내에 고여 있던 탁기는 차례차례 뚫리는 혈도를 따라 흘러가고, 비어있는 공간에는 하단전에 갇혀있던 생기가 흐르기 시작한다.
그 다음에는 상체와 마찬가지로 하체.
허리에서부터 허벅지와 종아리를 지나, 발바닥의 용천(湧泉), 족심(足心)혈을 함께 뚫어낸다.
양손과 양발, 신체의 끝자락에 출구를 뚫어놓은 셈.
탁기는 끝부분으로 몰아 밖으로 끄집어내고, 굳어있는 근육과 주요 혈자리들을 풀어내어 혈류의 원활한 순환을 유도한다.
고여 있던 탁기가 빠져나간 만큼 여유가 생기고, 비어있는 공간을 단전에서 올라온 생기가 다시 메운다.
서서히 정상화되어가는 기의 흐름.
흐름이 천천히 순환되기 시작하자, 엉켜있던 혈도들도 점차 본래의 위치로 되돌아가기 시작한다.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거의 원래 상태로 되돌아갈 것이다.
‘얼추 끝냈나···’
모든 과정을 끝마치고 시계를 보니, 딱 맞게 30분이 지나 있었다.
강태한은 고개를 묻은 채 침대에 축 처져있는 김민열을 내려봤다.
몸의 근육을 풀어놓고 곳곳에 고여 있던 탁기들도 거의 걷어낸 상태.
이제 혈도도 자리를 잡아가고 활력도 끌어올려뒀으니, 시간이 지나면 자생력을 통해 본래 건강했던 때의 모습으로 자연스레 회복될 것이다.
물론 그게 단기간에 전부 이뤄지진 않지만, 의식을 잃은 채로 신체가 회복에만 전념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이 상태에서 잠깐 한 숨 푹 자고 일어나면, 쌓여있던 걱정들은 잠시 잊은 채로 가벼워진 몸과 맑은 정신으로 깨어날 수 있으리라.
“자네, 혹시 이 뒤에 약속 같은 건 있나?”
톡톡. 강태한이 김민열의 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말했다.
헌데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호흡에 따라 천천히 등만 위아래로 움직일 뿐.
‘···수혈(睡穴)을 짚을 필요도 없겠군.’
김민열은 고개를 묻은 채로 이미 잠에 들어있었다.
도중에 별다른 기색은 없었으니, 아마 안마가 끝남과 동시에 잠이 들었던 것이리라.
그만큼 피곤했다는 거겠지.
강태한은 숙면을 취할 수 있도록 가볍게 혈만 짚어둔 뒤, 방의 불을 끄고 밖으로 나갔다.
* * *
“손님. 손님?”
“케흐극!”
고블린 같은 소리와 함께 김민열이 거칠게 상체를 일으켰다.
마치 필름이 끊어진 것처럼 잠에 들기 직전의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안마를 다 받았던 것까진 기억이 나는데···’
그 전에도 비몽사몽 했는데, 온몸의 신경을 타고 흐르는 전류 같은 자극에 잠에 들지 못했다.
그러다 자극이 끊어지자 실이 끊어지듯 잠에 들었던 것.
기억을 더듬어본 뒤, 괜히 머쓱한 기분이 된 김민열이 머리를 긁적였다.
“천천히 계시다가 나오셔도 됩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직원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김민열은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직원이 두고 간 찻잔을 손에 쥐었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가 기분 좋았다.
‘···뭔가 몸이 개운하네.’
개운하다.
단어 자체는 평소에도 굉장히 자주 쓰이는 흔한 말이지만, 지금 이 느낌이야말로 ‘개운한’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느 정도냐면, 좀 더 자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을 정도의 개운함이다.
그냥 아직 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아 멍할 뿐, 몸은 자는 사이 누가 분해조립이라도 해놓은 것처럼 깨끗한 기분이다.
“···어.”
그러다 마신 차 한 모금에 눈이 동그래졌다.
흔한 인스턴트의 맛이 아니라는 것에서 한 번 놀라고, 달착지근하면서도 쌉쌀한, 낯설면서도 입에 착 감기는 깊이 있는 맛에 두 번 놀랐다.
“하아··· 좋네.”
그리고 목구멍을 타고 몸 곳곳으로 퍼져가는 온기.
노곤하게 풀어져있던 몸에 활력이라는 것 자체가 스며드는 듯한 느낌이다.
‘···잠깐.’
그러다 문득 잊어버렸던 뭔가를 떠올렸다.
이동찬. 이곳에 같이 왔던 친구.
허나 자신은 그만 잠에 들어버렸다.
김민열은 다급하게 짐을 챙기고 밖으로 나섰···는데.
“오, 딱 나오네.”
옆방에서 막 나오고 있는 이동찬과 마주쳤다.
“뭐야. 안 온다면서.”
“네가 들어가는 걸 보기 싫은 거지, 안 간다고는 안했다. 그리고 너 자고 일어나는 시간까지 어떻게 그냥 기다려.”
“···아하.”
그러고 보니 장인 코스에는 수면시간도 포함되어 있다는 말을 들었었던 거 같다.
별 관심이 없던 때라 그냥 흘려 들었을 뿐.
괜히 걱정해서 손해 봤다는 생각이 드는 김민열이다.
“그럼 마시던 차만 좀 마저 먹고 나와도 되냐?”
“마음대로 해라. 근데 그보다.”
이동찬이 김민열을 잠시 붙잡아 세웠다.
그 사이에 확 좋아진 안색.
이동찬의 얼굴에 두 생각이 동시에 섞인 미묘한 표정이 나왔다.
원래는 자기가 받을 안마였다는 생각과, 그래도 잘 됐다는 두 개의 생각.
“어때? 나한테 고마운 마음이 좀 드냐?”
그래도 후자 쪽의 마음이 컸기에, 이동찬은 조그맣게 한숨을 쉬는 걸로 기분을 정리하고 씨익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