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28화>
“일이 잘 안 풀렸나보지?”
이동찬이 잔을 들어 올리며 물었다.
김민열은 말없이 잔을 부딪친 다음, 한 번에 비워냈다.
크흐. 곧이어 알코올 섞인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쪽 바닥이 다 그렇지 뭐. 개발하다가 컨셉 바뀌고, 팀원들도 갈아엎고, 성과는 계속 보채고··· 위에서는 또 숟가락 얹으려고 난리치고.”
이런 건 어떻겠냐, 저게 어떻겠냐.
실제론 아무것도 모르는 양반들이지만, 그 양반들이 숟가락 하나씩 얹으려 할 때마다 프로젝트는 바람에 흔들리는 배처럼 균형을 잃는다.
그래도 그때마다 어떻게든 해보고, 게임에 대한 애정 하나 갖고 버텨왔는데··· 얼마 전에 사실상 프로젝트가 엎어져버렸다.
바로 전날에 다 같이 힘내보자고 회식을 했었는데, 다음 날 팀원 모두가 책상 앞에 망연하게 앉아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문득 지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젠 그냥 다 놓고 싶다.”
“임마. 그래도··· 좀 더 해봐.”
“됐어. 난 와이프도 없으니까 오히려 편하지, 뭐. 내 한 몸만 챙기면 되잖아. 안 그래?”
김민열은 재차 소주잔을 비우고는, 자기가 했던 말이 웃기다는 듯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허나 그 표정은 여전히 침울한 그대로였다.
“······”
이동찬은 말없이 친구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일 때려치우고 싶지 않은 직장인이 얼마나 있겠는가.
입사하고 한 달 밖에 안 된 신입조차도 사표 쓰는 상상을 몇 번은 해봤을 것이다.
그래도 다들 하루하루 참고 버티는 것일 뿐.
허나··· 그러는 와중에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은 때가 온다.
문득 돌아보니 몸도 망가져있고 정신도 한계에 몰려있는, 그런 피폐한 순간.
그 마음을 알기에 쉽사리 입을 열기가 힘들다.
‘에휴, 자식···’
같은 게임업계에 있어서 그런가, 좀처럼 남 일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따.
단지 저 친구는 남보다 일찍 위로 올라갔다가··· 그만큼 일찍 꺾였을 뿐이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기가 괴로운 심정.
이동찬은 잠시 고민에 잠겼다가, 캘린더 어플로 일정을 확인하고는 혀를 찼다.
그러고 이내 결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야, 민열아.”
“···왜?”
“내일 사우나나 갔다 오자. 어떠냐.”
“사우나?”
김민열이 머리를 긁적였다.
기분전환이라도 시켜주고 싶은 걸까.
허나 그걸 감안하더라도 다소 뜬금없는 소리였다.
“그래도 회사는 가야지.”
“누가 빵꾸내랬냐? 퇴근하고 가자는 거지, 임마.”
“···됐어. 마음만이라도 고맙다.”
요즘에는 뭘 해도 재미가 없다.
사우나고 나발이고, 그냥 퇴근 후에는 집에 틀어박혀 숨이나 쉬고 싶다.
요즘 같은 때에는 더더욱.
“가자고 할 때 가자. 응?”
“됐다니··· 어?”
거절을 하려다 이동찬과 눈을 마주친 순간, 김민열은 잠시 말을 잊었다.
그의 눈빛이 너무나도 비장했기 때문이다.
마치 커다란 뭔가를 희생하는 듯한··· 와이프 몰래 모아둔 비상금이라도 빌려주는 사람의 눈빛처럼.
“일단 가보면··· 너 나한테 고마워할 걸?”
바로 내일.
그 날은 이동찬이 처음 방문한 이후 심신의 휴식처로 삼고 있던 안마샵의 세 번째 예약이 잡혀있던 날이다.
하지만···
“아니. 고마워해야한다.”
이걸 잠시 삶에 지쳐있는 친구에게 양보하기로, 이동찬은 눈물을 머금는 각오로 결심했던 것이다.
* * *
“아버지, 요즘 어깨는 어떠세요?”
[어깨? 멀쩡하지. 예전으로 돌아간 거 같다. 아니지, 그때보다 더 좋아진 거 같은데?]
“그래요?”
[그렇다니까. 그리고 네가 준 도라지 때문인가, 요샌 그냥 기운이 남아돈다. 집에서 라면도 수타면으로 뽑아 먹을 기세라니까?]
강태한은 아버지의 흰소리에 싱긋 미소를 지었다.
전화통화로 나누는 대화지만, 수화기 너머에서 아버지가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이 눈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아버지도 많이 바뀌셨구나.’
물론 좋은 쪽의 이야기다.
예전엔 아버지가 농담을 하는 건 상상만으로도 어색했었지만, 요즘에는 오히려 이런 게 더 자연스러운 느낌이다.
부자지간이 전과 다르게 많이 가까워진 덕분일까, 아니면 예전과 다르게 삶에 여유가 좀 생기신 걸까.
어느 쪽이건 간에 아들의 입장에선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말이다. 그때 말했던 가게 휴일은 그냥 없었던 일로 하는 게 낫지 않겠냐?]
“예? 왜요.”
지난 번 강태한은 아버지에게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가게 일을 쉬시는 게 어떻겠냐고 진지하게 말했었다.
이제는 연세도 많으신 데다, 매일 같이 수타면을 뽑는 것 자체가 생각보다 큰 노동이다.
물론 아직 별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좀 쉬엄쉬엄하셨으면 하는 게 자식 된 마음이다.
[너도 저번에 살짝 봤겠지만, 요즘 가게에 손님이 많이 찾아온다. 옛날 반가운 손님들도 오고, 그 뭐냐··· 맛스타그램? 거기서 보고 왔다는 젊은 손님들도 많고.]
“좀 많긴 하더라고요.”
맛스타그램은 맛집 위주의 업로드가 주로 다뤄지는 SNS다.
강태한도 호기심에 한 번 검색해봤었는데, 아버지의 가게가 언급된 게시물이 생각보다 많았다.
직접 수타면 뽑는 걸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가게라나.
실제로 몇몇 게시물에는 아버지가 수타면을 뽑고 있는 모습이 영상으로 올라와 있었다.
‘잘 된 일이지.’
수타면은 아버지의 자부심이 묻어나오는 기술이었다.
한창 때에는 ‘용의 수염처럼 가늘다’ 해서 이름이 붙은 용수면까지 뽑았을 정도다.
물론 수술 후로 오랫동안 수타면을 뽑지 못하셨지만··· 그럼에도 반죽대는 남겨두고 매일 닦아두셨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아버지의 가게가, 그것도 수타면으로 다시금 인정을 받고 있는 모습이 강태한에게는 뭐라 설명하기가 힘들 정도로 기쁜 일이었다.
[저번 주는 네 말대로 쉬었지만, 물이 들어올 때 노를 저어야하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
“저는 쉬시는 게 좋을 거 같은데.”
자기도 이렇게 감회가 새로운 데 아버지는 얼마나 기쁘시겠는가.
그 기분이 어렴풋이 짐작은 가기에 차마 강하게 반대는 못하는 강태한이다.
“요즘엔 쉬는 날이 있어야 더 맛집처럼 보여요.”
[아무래도 매일 가게에서 지내다가 집에서 쉬려니까 이게 영 어색해.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잖냐? 약간 그런 꼴인 거지, 뭐···]
강호연은 가게를 쉬어본 적이 거의 없었다.
손님이 없을 때도 그랬고, 공휴일도 마찬가지다.
명절로 연휴가 있을 때나 하루 이틀 정도 쉬는 게 전부다.
예전엔 아들을 생각하며 놀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가게에 남았던 거지만··· 지금은 조금 다르다.
오히려 쉬고 있는 게 어색해진 것이다.
강태한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상황인지는 이해가 갔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말려야했다.
이제 좀 느슨하게 지낼 때도 되지 않으셨는가.
“그럼 아들이랑 같이 놀러다녀요.”
[···어, 너랑?]
“예. 매주는 힘들겠지만··· 같이 등산도 가고, 외식도 하고. 낚시도 한 번 하러 가면 좋겠네요.”
결국 강력한 카드를 꺼내드는 강태한이다.
[그건··· 괜찮게 들리는구나.]
역시나 이 말엔 아버지도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다.
강호연은 머쓱해하면서도 기분 좋은 울림이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 참에 취미도 하나 만드시면 좋죠. 뭐 평소에 해보고 싶으셨던 거 없어요? 옛날에라도.”
[글쎄다··· 그러고 보니, 골프를 한 번 제대로 쳐보고 싶긴 했었는데.]
“골프요?”
의외로 등장한 단어에 강태한이 되물었다.
[고향 친구 놈들 중에 형편 좀 좋은 녀석들은 골프 치러 다니고 그랬거든. 뭐 나는 한 번인가 가보고 말았지만 말이다. 재미도 없었고.]
말과는 달리 아쉬움이 담겨있는 목소리.
강태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골프라···’
최근에 골프랑 관련해서 무슨 일이 있었는데.
문득 생각이 난 강태한은 스마트폰을 어깨와 뺨으로 고정시킨 다음, 지갑을 열어 예전에 넣어둔 명함을 찾았다.
‘골프칠 일 생기면 연락해!’
공주컨트리골프클럽 오너 조원호.
높은 확률로 빈말이었겠지만, 그래도 연락해봐서 나쁠 일은 없으리라.
강태한은 반대쪽 어깨를 으쓱이며 명함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 * *
평일 날 강태한의 장인코스를 예약할 때, 가장 경쟁이 치열한 시간대는 마지막의 두 타임이다.
오후 여섯 시부터 일곱 시 사이에 있는 두 타임.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업무 중에 밖에 나갈 수 없는, 일반적인 직장인들이 평일 중에 방문할 수 있는 단 두 번뿐인 시간이었으니까.
이때가 아니면 주말에 와야 한다는 것도 있지만, 그 외에도 퇴근하고 지친 몸에 곧바로 안마를 받을 수 있다는 것 때문에 특히 선호하는 직장인 손님들이 많았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덕분에 기운이 펄펄 나네요.”
“여기만 다녀가면 근심까지 녹는 것 같습니다.”
그런 특수한 상황 때문일까?
이때는 손님들의 반응 또한 다른 때보다 유독 격렬한 느낌이다.
누군가는 삶의 활력소, 누군가는 오아시스, 게임업계에서 일하는 듯한 어떤 손님은 세이브 포인트 같은 곳이라고 말할 정도였으니까.
“얼마 전에는 혹시라도 예약 취소가 나오면 먼저 좀 알려달라고 팁을 주고 가더라니까.”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으며 황 실장이 말했다.
뭔가 이기적인 사람이라기보다는··· 지푸라기라도 한 번 잡아봐야겠다는 그런 눈빛이었다.
“그래서, 해줬어요?”
“아니. 태한 씨한테 부탁하면 모를까 내가 해주는 건 그림이 이상하지. 취소가 잘 안 나기도하고.”
최성현의 말에 대답하며 황 실장은 찻주전자에 뜨거운 물을 채워 세 번째 잔을 우려냈다.
사용한 찻잎은 육안과편(六安瓜片).
강태한에게 추천받아 처음 마셔본 뒤, 이후에도 계속 생각이 나 결국 간단한 다구(茶具)세트와 찻잎을 구매한 황 실장이다.
“···그거 맛있어요?”
“맛뿐이냐. 입에 그냥 착, 감긴다. 착 감겨.”
황 실장은 향을 맡고는 그윽한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옆에서 보기엔 상당한 꼴불견이었기에 최성현의 미간이 찌그러졌다.
그는 다시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확실히 퇴근시간 이후부턴 손님들 표정부터가 달라지네요.”
“어쩔 수 없지 뭐··· 다 피곤한 사람들이니까.”
사우나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누구겠는가.
단순히 씻으려고 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피곤하고 삶에 찌들어 재충전이 필요해진 사람들이 찾아온다.
특히 퇴근시간 이후에 찾아오는 직장인들이라면 굳이 말할 필요도 없으리라.
그래도 사우나에서 재충전을 하고 기운차게 돌아간다면 좋겠지만, 대부분은 여전히 피곤에 찌들어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미 사우나만으로 회복되기엔 너무 깊은 피로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그걸 풀어주고 활력을 채워주는 게 우리 일이고.”
황 실장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최성현은 그런 그를 빤히 쳐다보다 넌지시 입을 열었다.
“되게 직업의식 높아 보이는 말이긴 한데··· 실장님은 안마 안하시잖아요.”
“···그렇게 선 그을 거야?”
턱 위에 손을 올리며 헛웃음을 터트리는 황 실장.
최성현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시선을 피했다.
‘···여기가 맞나?’
한편, 그때 안마샵 로비에 한 손님이 찾아왔다.
그 손님은 다름이 아니라 이동찬에게 오늘의 예약을 넘겨받은 김민열.
이동찬도 사우나에는 같이 왔지만, 같이 들어가면 원래대로 자기가 안마를 받으러 갈 것 같다며 기어코 찜질방으로 향했다.
‘그냥 평범한 안마샵 같은데···’
정신이 피폐해진 탓일까, 대부분의 생각들이 비관적으로 향한다.
지금 이곳에 온 것도 시간낭비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되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났지만.
‘끝나고 나오면, 나한테 고마워할 걸?’
문득 여기까지 데려왔던 친구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 호의를 생각해서라도, 김민열은 가게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