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26화>
다음날.
일을 마치고 퇴근한 강태한은 길거리를 걸으며 유세아가 보낸 카톡 내역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 정도 시간이면 괜찮아요! ㅎㅎ]
[혹시 가리는 음식은 있으신가요?]
[제가 종종 가는 집이 있는데 거기로 갈까요?]
[네네! 그럼 예약해둘게요!]
그 밑에는 저번 것과 비슷한 둥글둥글한 캐릭터의 이모티콘.
그리고 이모티콘 아래에는 한 가게의 주소가 링크되어 있었다.
우연인지 의도한 것인지, 가게는 찜질방에서 걸어서도 갈만할 정도로 그렇게 멀지 않은 곳이었다.
문득 자기 위치를 모르는데 의도를 할 수 있는 부분인가 생각을 해봤지만··· 사고가 났던 곳을 중심으로 가게를 잡았다면, 충분히 가능하겠다 싶었다.
‘만약 그랬다면 참 배려가 깊은 사람이군.’
걷다보니 어느새 가게 앞이다.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가 갑자기 나온 넓은 공간.
마당에는 허리쯤 오는 얕은 벽이 둘러쳐져 있었고, 안쪽에 근사한 한옥집이 큼직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 주변에 이런 가게도 있었나···’
정문 쪽으로 걸어가며 강태한은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시간보다 대략 10분 정도가 빠른 시간.
초대를 받는 입장에서 딱 맞춰가는 것보단 조금 일찍 가는 게 좋겠다 싶어 일부러 맞춘 시간이었다.
“여기에요!”
슬슬 주변이라도 둘러볼까 하는 찰나, 가게 입구 주변에서 선글라스를 낀 여성이 손을 흔들었다.
전날 봤던 복장과 인상이 좀 달랐지만, 유세아였다.
“일찍 오셨네요, 태한 씨? 약속시간은 아직인데.”
후후. 그렇게 말하는 유세아의 표정이 왠지 흐뭇해보였다.
“그러는 유세아 씨야말로 일찍 오셨네요. 언제부터 와계셨던 겁니까?”
“어··· 저요?”
순간 그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본인이 정한 약속시간을 헷갈려서 30분이나 일찍 나왔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늦은 줄 알고 헐레벌떡 나왔다는 것은 더더욱.
“방금 왔죠. 저쪽에서 오는 거 못 봤어요?”
“그렇군요.”
강태한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뻔히 보이는 거짓말이었지만, 이것도 일종의 배려가 아닐까 싶었다.
이럴 땐 적당히 속아 넘어가는 것이 좋으리라.
“그, 그럼 슬슬 들어갈까요?”
유세아는 앞장서서 식당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제부터 툭하면 생각이 났었던 탓일까?
강태한이 미소를 짓는 순간, 유세아는 자기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 * *
“좋은 가게네요.”
자리에 앉은 강태한이 가볍게 감상을 입에 담았다.
넓은 마당과 멀리서 봐도 근사한 한옥.
밖에서 봐도 멋졌지만, 내부의 인테리어 또한 상당히 멋들어지게 꾸며져 있었다.
한옥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모던한 디자인이라고 할까.
게다가 테이블은 각각의 방으로 따로 분리가 되어있어, 구조만 봐도 손님들에 대한 배려가 느껴지는 고급스러운 식당이었다.
“그렇죠? 자주 오는 가게에요.”
유세아는 여유롭게 웃으며 강태한의 컵에 물을 따랐다··· 만, 방금 전에 이미 직원이 물을 따르고 갔기에 하마터면 넘칠 뻔했다.
“···혹시 목이 마르실까봐, 많이 드시라고.”
“그렇군요.”
의아하게 물컵과 자신을 번갈아 본 강태한에게 유세아가 애써 태연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당연히 이런 곳은 물을 따라주겠지! 아으!’
겉으로는 최대한 자연스러움을 연기했지만, 사실 유세아는 평소 한 끼에 삼만 원 이상을 써본 적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그마저도 작년쯤부터 외식비용에 대한 허들이 많이 낮아진 것.
물론 요즘엔 재정적으로 꽤 여유가 있었지만, 무명생활을 보내며 깊이 박힌 절약정신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은 탓이다.
그런 그녀가 여기에 와본 것은 단 한 번뿐이다.
그마저도 아는 언니가 데려와서 먹어봤을 뿐.
허나, 이 사람에겐 되도록 세련된 듯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다. 어째선지 그랬다.
“고기도 구워드릴까요?”
“아뇨. 저희가 구울게요.”
그래서일까.
고기를 내온 직원이 물어봤을 때도 그녀는 깔끔하게 거절했다.
마치 이런 곳에 자주 와본 듯한 멋진 연기였다.
‘···지금 바로 올리면 되나?’
허나 바로 당황해버리는 유세아다.
돼지고기, 그것도 삼겹살이라면 끝내주게 구울 자신이 있었지만, 소고기는 아무래도 경험이 별로 없다.
게다가 이건 마블링이 환상적으로 입혀져 있는 한우.
초심자가 섣부르게 손을 대선 안 될 것 같은, 누가 봐도 비싼 고기였다.
‘소고기는 굽는 게 중요하다고 했는데···’
그냥 구워달라고 할 걸 그랬나.
생각해보니 저번에 언니와 왔을 때도 직원이 구워주는 걸 얌전히 기다렸었다.
지금이라도 구워달라고 하면 구워주려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찰나.
“혹시 제가 구워도 될까요?”
“···네?”
“제가 고기 굽는 걸 좋아해서요.”
앞에 앉아있던 강태한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유세아가 잡을까말까 고민하던 집게를 집고는, 자연스럽게 석쇠 위에 고기를 올렸다.
‘숯불이 제대로군.’
은은하게 느껴지는 숯의 향.
이러면 고기를 굽는 사람도 흥이 난다.
소고기를 구울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첫째는 고기 안쪽에 박힌 마블링까지 확실하게 녹여줘야 한다는 것.
그러면서도 고기가 질겨지지 않도록 딱 맞게 구워야 한다는 것.
안쪽의 지방이 전부 녹아 스며들 때까지 충분히 구워주되, 고기의 육즙이 말라 질겨져선 안 된다.
허나 고기 한 점도 아니고 여러 점을 이렇게까지 굽는다는 것은 사실상 전문가의 영역이다.
당연히 어느 정도 선에서 타협을 하게 된다.
허나 이 남자는 강태한.
마음만 먹는다면 기감을 펼쳐, 고기 안쪽의 상태를 일일이 확인하는 것까지 가능하다.
물론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이 정도야 충분하다.
얼핏 보기에 설렁설렁 움직이는 듯하지만, 불판 위의 고기들은 하나같이 완벽한 타이밍에 뒤집어지고 있었다.
“드셔보세요.”
“아, 네··· 잘 먹을게요.”
사실 저녁이 늦어져 배가 고팠던 그녀다.
강태한이 고기 굽는 것을 홀린 것처럼 쳐다보고 있던 그녀는, 그가 양념장 위에 올려준 고기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어.”
쫄깃, 하게 씹히는 첫 식감.
헌데 그 다음부터는 거짓말처럼 부드러워지면서, 마치 입 안에서 고기가 스르륵 녹아내린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그와 동시에 입 안 가득히 배어나오는 풍부한 육즙.
숯불 위에서 사르르 녹아내린 마블링은 고스란히 육질 안으로 스며들었다가, 육즙과 함께 버무려져 입안 가득히 깊은 감칠맛과 풍미를 퍼트려냈다.
‘아니, 이렇게 맛이 좋았나···?’
저번에 먹었을 때도 맛이 좋긴 했다.
그동안 자기가 먹어본 것 중에 가장 맛있는 소고기.
그렇기에 굳이 이곳을 약속장소로 정했던 것이다.
헌데 지금 인생에서 가장 맛있는 소고기 기록이 다시 갱신되었다.
같은 식당의 고기인데도, 그때 먹었던 것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의 맛과 풍미였다.
‘이래서 굽는 게 중요하다고 한 거구나!’
황홀했던 첫 한 점.
입 안에서 흐릿해져가는 맛의 여운이 아쉬울 정도다.
유세아는 자기도 모르게 감고 있던 눈을 떴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불판 위에 있던 야들야들한 고기 한 점이 다시 그녀의 앞에 올라왔다.
그 뒤에는 다시 또 한 점.
마치 그녀의 식사속도를 예측한 듯한 타이밍이었다.
게다가 고기들도 하나같이 완벽하다.
첫 한 점의 황홀함이 우연이 아니었다고 말하려는 것처럼, 매 한 입 한 입이 감동적인 맛이었다.
“···태한 씨.”
“예.”
“혹시 한우 오마카세 같은데서 일하세요?”
이쯤 되면 합리적인 의심이다.
허나 강태한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아버지가 중식집을 하시긴 하는데요.”
“근데 왜 이렇게 고기를 잘 구우세요?”
“그냥 남들이 구우면 답답해서, 그럴 바엔 그냥 제가 구워왔거든요.”
그렇게 지낸 세월이 육십 년이다.
돌판에 굽고, 나뭇가지에 꿰어서도 굽고, 모닥불에도, 짚불에도 구워보고···
그렇게 살다 왔으니, 지금처럼 실내에다 숯불, 석쇠까지 갖춰진 환경이라면 코끼리 고기라도 구워낼 자신이 있다.
“···같이 고기 먹자는 사람 많겠어요.”
“많진 않은데, 고기 먹으러 가면 좋아하긴 하죠.”
강태한은 피식 웃으며 고기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고기를 구우면서 식사를 하고 대화도 나누지만, 손놀림에선 여유가 사라지지 않는, 그야말로 고기 굽기의 장인 같은 솜씨였다.
“근데, 태한 씨는 어떤 일 하고 계세요?”
얼추 식사가 끝나갈 쯤, 자연스레 비중은 식사에서 이야기 쪽으로 넘어갔다.
강태한은 마시던 물컵은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아직 학생이긴 한데, 안마사 일을 하고 있습니다.”
“대학생이요?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스물여섯인데요.”
“어··· 의외네요.”
외모만 봤을 땐 이십대 초반이지만, 왠지 연륜이 느껴지는 분위기로 보아 엄청난 동안의 서른 중반 이상을 생각했다.
헌데 스물여섯이라니. 자기보다 딱 한 살 많은 나이이지 않은가.
“어떤 게 의외인데요?”
“아니 뭐 그냥··· 그보다, 안마사요?”
“예. 그렇습니다.”
순간 유세아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뭔가 자연스럽게 분위기도 띄우고, 이야기도 하고······ 스킨십도 할 수 있는, 그런.
“지압이나 혈 같은 것도 잘 아시겠네요?”
“그렇죠?”
“그럼, 저도 지압 한 번 받아볼래요.”
“···여기서요?”
강태한이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불가능한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적절한 장소는 아니었다.
그러자 유세아가 히죽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뇨, 그냥 손바닥만요. 여기도 혈자리가 되게 많다고 들었었는데?”
“아. 그렇긴 하죠.”
손은 혈도의 축소판이라고도 불릴 정도로 다양한 혈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며, 개중에는 합곡(合谷)혈과 중요한 혈자리도 더러 존재하는 곳이다.
“그 정도면 가능하죠.”
강태한은 손을 내밀어 유세아의 오른손을 잡았다.
원래는 조금 당황하는 반응을 기대했는데···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유세아만 당황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편, 강태한은 가볍게 맥을 짚어 상태를 확인했다.
손은 다양한 혈이 모인 혈도의 축소판.
다른 건 몰라도, 신체의 상태를 파악할 때는 손만큼 적절한 곳이 드물다.
‘선천적으로 심장이 안 좋구나.’
때문에 중단전과 인근의 기운이 허하다.
배우라 그런지 몸의 관리자체는 상당히 철저하나 선천적인 부분은 어쩔 수 없는 것.
지병이 생길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체력적으로 불편이 많았으리라.
진단을 마쳤으면 이제 조치를 할 차례다.
손바닥과 중지를 이어주는 첫 번째 마디.
이곳이 심장 인근의 혈과 이어져있는 자리다.
우선 손바닥을 전체적으로 한 번 풀어준 다음, 양손으로 해당 지점을 꾸욱 눌러냈다.
“꺄윽!”
그 순간, 유세아가 가냘픈 비명을 터트리며 손바닥을 거두었다.
놀란 나머지 자기도 모르게 튀어나온 비명이었다.
“어라, 아팠어요?”
“아뇨! 그건 아닌데···”
꾸욱 눌리는 순간, 가슴까지 전류 같은 것이 찌릿하고 흘러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심장은 왜 또 평소보다 빨리 뛰는지.
“지, 지압은 그만하죠.”
이건 너무 강렬한 자극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유세아는, 어느새 땀이 배어있는 손바닥을 티슈로 닦고 화제를 돌리기로 했다.
* * *
“야, 너 어제 저녁에 어디 갔었냐?”
“어제? 밥 먹고 왔지, 왜.”
“뭔가 있다고 내 촉이 말하고 있는데···”
강태한의 시큰둥한 대답에 최성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약간 풋풋하면서도 달달한··· 그런 가십의 느낌이 났다.
“그럼 밥은 누구랑 먹었는데?”
“아는 사람이랑. 그보다 여기에나 집중해라.”
고등학생 때부터 이상할 정도로 촉이 좋은 놈이다.
강태한은 화제를 바꿀 겸 그의 시선을 돌렸다.
“네가 알려달라고 했잖아. 잘 봐두라고.”
강태한은 앞에 앉아있는 황 실장의 어깨를 짚었다. 삼각근을 비롯한 주요 근육들이 모여드는 한 곳의 점. 그곳을 누르는 순간.
“어흑.”
황 실장의 입에서 짧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약간의 당황과 기분 좋음이 섞여있는 소리였다.
“여길 자극하면 이 주변 근육들에 힘을 풀어놓을 수 있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에 가볍게 짚어주면 좋은 곳이지.”
설명을 하면서 대강적인 위치도 한 번 더 설명한다.
요즘 강태한은 최성현에게 안마의 요령이나 유용한 포인트들을 알려주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최성현 본인이 강태한에게 알려달라고 했던 것이다.
“흠··· 여기?”
“성현아, 아프다.”
배운 대로 눌러보는 순간, 황 실장의 입에서 진중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방금 전 나왔던 신음과는 딴판인 목소리였다.
“엄살 부리시는 거 아니에요?”
“엄살이 아니라 느낌이 달라. 네 것만 받아봤다면 모르겠는데, 앞에 태한 씨 거를 미리 받아보니까 뭔가 잘못됐다는 게 느껴진다고.”
“음. 듣고 보니 그렇네. 그럼 여긴가?”
“거기가 아니라 여기야. 못 찾겠으면 주변 근육들의 줄기를 더듬어서 한 곳에 모이는 지점을 찾아봐. 그 다음엔···”
점심시간동안 계속해서 이어지는 강좌.
그 가운데에서 황 실장은 교보재(敎補材)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으나···
‘교보재라고 해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니야.’
강태한의 시범 때마다 느껴지는 이 시원한 느낌.
최성현 차례 때는 둘째 치더라도, 주기적으로 조금씩 들어오는 이 시원한 감각이 약간 감질나면서도 기다리는 맛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