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24화>
이른 오후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음주운전 사고.
아침부터 술을 마신 정신 나간 운전자 때문에 일어난 끔찍한 사고였지만, 다행히 피해자는 없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보행자에게 달려드는 위험했던 순간은 있었지만 차량이 갑자기 급커브를 돌아 아슬아슬하게 피해간 것이다.
물론 가드레일을 들이받은 운전자와 차량은 멀쩡하지 못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업자득이다.
그래도 사고의 수습은 빨랐다.
애당초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난 일이기에 현장엔 곧바로 경찰과 구급차가 도착했고, 운전자는 기절한 채로 병원에, 차량은 견인되면서 마무리되었다.
한편, 강태한은 현장이 어수선해지기 전에 자리에서 벗어났다.
피해를 입은 것도 없거니와, 괜히 소란스러워지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원래부터 관아(官衙)와 무림(武林)은 상호불간섭의 관계.
물론 여긴 현대지만, 현장에 있으면 사정청취다, 목격자가 필요하다, 뭐다하며 온갖 귀찮은 일들이 생길 것이 뻔했다.
물론 마음 같아선 운전자의 사지 중 하나라도 부러트려놓고 싶긴 했지만··· 도망이라도 쳤다면 모를까, 그건 경찰에게 맡길 일이지 자기가 나설 일이 아니었다.
인명을 구한 일에서부터 자리에서 벗어나기까지.
모두 강태한의 생각대로 지나갔다.
다만 예상과 다른 게 하나 있다면.
“저기요! 잠시만요!”
구해준 사람이 그를 따라온 것.
방금 전까지 놀라서 주저앉았던 사람이, 용케 기운을 차리고 뜀박질까지 해서 강태한을 따라잡았다.
“하아, 하아··· 하으, 무슨 걸음이 그렇게 빨라요?”
그녀는 허리까지 숙인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힐을 신고 뛴 탓일까.
평소보다도 호흡이 가빠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이런. 아직 놀란 몸으로 무리를 하면 안 되지. 일단 허리부터 피고, 숨을 안쪽까지 깊게 쉬게나.”
그걸 보던 강태한이 혀를 차며 조언을 건넸다.
얼핏 잔소리 같은 내용이지만, 중후한 중저음의 목소리가 묘한 신뢰감을 줬다.
그녀는 허리를 피고 천천히 심호흡을 내쉬었다.
“좀 괜찮나?”
“어··· 네.”
심호흡이 이렇게 효과가 좋았나?
생각 이상으로 빠른 효과에 그녀는 신기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무슨 용건이신지.”
“아, 맞아. 그냥 가시면 어떻게 해요?”
“···뭐가 남아있는가?”
“제가 아무런 보답도 못했잖아요!”
아하. 뒤늦게 강태한이 탄성을 터트렸다.
허나 보상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단지 눈앞에서 누가 차에 치이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을 뿐.
간만에 몸도 풀 겸 힘 좀 쓰는 것과 하루 종일 찝찝해지기.
둘을 놓고 비교했을 때 전자 쪽에 좀 더 힘이 실렸을 뿐이다.
“보답이라. 차가 혼자 비켜간 게 어찌 내 덕인가.”
강태한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중후한 목소리와는 어울리지 않는, 왠지 약이 오르는 표정이었다.
‘아니, 왜 자꾸 저런담.’
뭐라 설명은 못하겠지만, 마지막 순간에 차가 급선회한 것은 저절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저 남자가 돌린 것이다.
직감적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직감대로라면, 그는 생명의 은인이라 할 수 있었다.
그걸 제대로 된 감사도 안 하고 보내는 사람이 될 순 없었다.
근데 본인이 보답을 받기 싫다고 잡아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난생 처음 겪는 상황에 그녀, 유세아는 생각지도 못한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혹시 내가 수상한 사람처럼 보이는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후우. 그녀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그때까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슬쩍 아래로 내렸다.
“저, 본 적 있으시죠? 수상한 사람 아니에요.”
매니저가 본다면 그녀를 나무랄만한 상황.
헌데, 앞에 선 남자는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무슨 보기 안쓰러운 것이라도 본 듯한 인상이다.
“세상 모두가 자길 알아볼 거라는 생각은 삼류무인들이나··· 아니, 어쨌거나 좀 부끄러운 생각 같군.”
화악. 순간 유세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녀는 부끄러움을 무마하려는 듯, 선글라스를 코끝까지 내려 좀 더 얼굴을 드러내면서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 진짜 몰라요? 유세아요, 유세아!”
“자네가 누구인진 모르겠지만··· 유세아라. 잘 어울리는 이름이긴 하군.”
“···예?”
뜬금없는 말에 유세아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강태한은 가볍게 팔짱을 끼며 살짝 웃었다.
“발음이 고운 아름다운 이름이지 않은가.”
덤덤한 목소리로 낯간지러운 말을 하는 강태한.
허나 별다른 의도는 없었다.
그냥 그가 말한 것처럼 유세아도, 그 이름도 아름답다고 생각했기에 그 생각을 입에 담았을 뿐.
“무, 무슨··· 뜻이죠?”
“말한 대로네만.”
유세아는 뭐라 말을 꺼내려 입을 벙긋거리다, 다시 잽싸게 선글라스를 썼다.
선글라스 아래로 드러난 뺨이 방금 전보다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쨌거나, 정말로 보답은 필요 없네. 무엇보다 지금 시간이 별로 없거든.”
예약 시간이 점점 다가올 뿐더러··· 지금이라면 그래도 20분 정도는 탕에 몸을 담글 수 있다.
되도록이면 놓치고 싶지 않은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그, 그럼··· 번호라도 알려주세요.”
유세아는 서투른 목소리로 말했다.
까놓고 말해, 처음 본 이성에게 번호를 물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본인이 생각해도 당황스럽고,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지만···
왠지 다른 곳에서 한 번 더 만나보고 싶다, 그런 생각이 그녀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런 그녀의 진심이 전해진 걸까.
강태한은 입가에 손을 올리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싫다는데도 계속 이렇게 나온다니.
사실은 그저 자신과 만날 계기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순간 짚이는 구석이 떠오른 강태한이다.
“···혹시 유세아가 신흥 종교 이름이었나?”
“그냥 좀 알려달라고요!”
이쯤 되면 오기만 남는다.
강태한은 결국 유세아에게 번호를 넘기고 나서야 찜질방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 * *
휴일에 강태한이 산에 다녀오고 난 이후.
강태한의 장인코스에는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그건 바로 숙면을 마치고 내오는 한 잔의 차.
본래는 마트에서 사온 티백으로 우려낸 차를 내와, 그저 따뜻한 차 한 잔, 그 이상 그 이하의 의미도 아니었지만···
지금은 강태한이 직접 만든 칡청으로 우려낸 건강차를 내오는 것으로 바뀐 것이다.
“흐어어···”
방금 잠에서 일어나 건강차 한 모금을 마신 손님의 입에서 기분 좋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이거 완전 스며드는구만···”
꿀에 절인 칡에서 배어나오는 깊은 단맛.
첫 인상은 꿀차에 가까울 정도로 달콤하지만, 곧이어 은은하게 드러나는 쌉쌀한 향이 깊은 맛과 중후한 무게감을 더한다.
안마란 굳어있던 근육들을 깨우고, 혈액순환을 원활히 만들어 체내의 구조를 정상화시키는 행위다.
안마를 하는 사람이 힘든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받는 사람 또한 적지 않은 열량과 기력을 소모하게 된다.
단순하게 생각해도 계속해서 외부로부터 충격을 받는 셈이니까.
안마를 받은 후에 허기가 지는 것이 괜히 그러는 게 아닌 것이다.
더군다나 강태한은 혈도와 내공까지 관여를 한다.
당연히 소모되는 정도가 더욱 심할 수밖에.
그렇기에 처음엔 적당히 조절을 하였고, 장인코스가 도입된 후엔 뒤에 수면시간을 배치했지만···
아무래도 기운을 보충할 뭔가가 제공된다면, 그 효율은 더욱 좋아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안 그래도 생각보다 수확이 많았던 탓에 칡처럼 잡다한 약재들은 보관이 난감할 정도였는데, 유용한 활용처를 찾은 셈이다.
“이야, 실장님! 방금 마신 차, 그거 이름이 뭐요?”
“이거 몸에 너무 잘 받네. 한 잔만 더 못 마시나?”
“한 병만 팔아주쇼. 어떻게든 안 되겠나?”
다행히 손님들 사이에서도 호평일색.
칡에는 간을 맑게 하며 피로를 회복시키는 성질이 있다.
거기에다 강태한이 캐온 것은 조금이나마 영기를 품고 있어, 원기(元氣)회복 효과마저도 겸비하고 있었다.
다만 그만큼 성질이 강해 과용하면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지만···
하루 한 잔 정도라면, 현대인에게 이것만큼 효능이 탁월한 것도 없으리라.
호평은 효능 때문만이 아니었다.
열량을 보충하는 목적도 있었기에 칡청을 담글 때 아낌없이 꿀을 집어넣었는데, 그 덕분인지 맛 자체로도 좋은 평가들이 많았다.
달달한 맛에 은은한 쌉쌀한 향이 꽤 잘 어울린다나.
‘이 손님은··· 체질이 칡과는 안 맞겠군.’
아무리 몸에 좋아도 체질에 맞지 않는다면 오히려 독이다.
그런 경우에는 칡차를 내올 수가 없다.
허나 그럴 때를 대비해 칡과 성질이 상반되는 야관문차도 준비해뒀다.
안마를 마치고 나온 강태한은 담당자에게 해당 내용을 전달하고는 대기실 안으로 돌아갔다.
“일 끝나고 나오나봐?”
“응. 너는 수강신청 잘 마무리 했냐?”
“조졌지 뭐···”
최성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한 번 놓친 수강신청을 돌아오지 않는다.
당연히 과사무실에 연락을 해본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다.
말 그대로 지푸라기라도 잡아보는 심정일 뿐.
“이따 저녁이나 같이 먹자. 좋은 거 사줄게.”
“···그럼 한우도 되냐?”
“소고기는 반반 해야지.”
선을 넘는 최성현에게 선을 긋는 강태한.
최성현 본인도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기에, 두 사람 모두 피식 실소를 터트렸다.
“그건 그렇고, 여기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네.”
“···그런가?
“뭐 일단은 손님이 엄청 늘었으니까.”
입소문을 타고 알음알음 퍼져나간 강태한의 솜씨.
그 과정에서 안마샵에 대한 인지도도 함께 올라가고, 찾아오는 손님의 숫자 자체가 늘어난다.
물론 그 중 대다수는 강태한을 찾겠지만, 강태한이 받을 수 있는 손님의 수에는 한계가 있고, 손님들도 그냥 돌아가기엔 아쉽기 마련이다.
원래 골목에 가게 하나가 유명해지면, 그 주변 상권에도 조금씩 활력이 돌기 시작하는 법이다.
그렇게 자연스레 다른 안마사들에게도 일감이 늘어나고, 덕분에 안마샵 전체에 활기가 돌기 시작한 것이다.
“아─ 요즘 어깨가 뻐근하네.”
그때 안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성훈.
강태한과 마찬가지로 장인코스를 하고 있는, 본래 이곳에서 가장 실력이 좋은 안마사로 꼽히던 사람이다.
그는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휘적거리며, 자신의 어깨가 뻐근하다는 것을 힘껏 표현하고 있었다.
“누가 좀 주물러줬으면 고맙겠는데···”
힐끗. 김성훈의 시선이 강태한에게 향했다.
그의 목적은 단 하나 뿐이었다.
강태한의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그를 질투하거나 얕보는 것이 아니라, 순전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궁금증이었다.
강태한을 향한 관심.
이전에 황 실장과 이야기를 나눴을 때도 조금 관심이 생겼었지만, 그 관심이 더 깊어진 것은 어느 손님을 봤을 때였다.
우연히 한 손님이 안마를 받기 전과 후의 모습을 둘 다 보게 됐는데, 이게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달라져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로 기회가 닿으면 언제 한 번 안마를 받아봐야겠다 싶었는데··· 좀처럼 오지 않기에 이런 연기를 하고 있었던 것.
“웬일이지. 저 형이 피곤하다하는 건 또 처음보네.”
원래 안마사들 사이에서도 체력 좋은 걸로 유명했던 형이다.
좀처럼 앓는 소리를 안 하는 양반이었기에, 최성현이 신기하다는 듯 그를 쳐다봤다.
‘···엄살이 좀 심한 사람인가보군.’
한편, 강태한은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어딘가 굳거나 뭉친 곳 하나 없는 몸인데, 저렇게까지 하는 걸 보면 누가 봐도 엄살이었던 것이다.
저 정도면 뭐, 아무나 주물러줘도 되겠지.
강태한은 관심을 끄고, 평소처럼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뉴스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음?’
순간, 익숙한 이름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도 상당히 최근에 접한 이름.
강태한은 최성현에게 스마트폰 화면을 내밀었다.
“야, 이 사람 누군지 아냐?”
“이 사람? 유세아잖아.”
“···유명해?”
“모르냐? 그 뭐냐··· 앱플릭스에서 잘나갔던 드라마. 거기도 출연했었던 배우인데.”
···그렇구나.
강태한은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스마트폰을 가져왔다.
적어도 신흥 종교에 번호가 넘어간 건 아닌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