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20화>
강태한에게는 작은 취미이자 습관이 생겼다.
그건 틈틈이 스마트폰으로 인터넷 뉴스를 확인하는 것.
일을 할 때나 운동을 할 때는 스마트폰 자체를 멀리하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짬이 날 때마다 이것저것 찾아보고 있었다.
그가 무림에 있었던 세월이 대략 육십 년.
당연하게도, 그 세월동안 강태한은 현대에서 알고 있던 지식과 정보들 중 많은 부분을 잊어버렸다.
단순히 그만한 세월이 지나기도 했으며, 무림에서의 삶이 옛 기억이나 되새길 여유가 있을 정도로 녹록치 않았던 탓이기도 했다.
막상 현대로 돌아오니 일상적인 부분들의 기억은 금방 되살아났고, 주변에서도 별 어색함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빠르게 적응했지만···
그래도 세부적인 부분에서 망각의 공백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예를 들어 모두가 다 아는 국민아이돌의 이름을 모른다든가, 작년쯤 전국이 들썩였던 사건을 기억 못한다든가, 최근 대히트를 친 영화 이름을 모른다든가.
소위 ‘이거 모르면 간첩’이라 할 만한 내용들도, 강태한에겐 생소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꽤나 잦았다.
물론 이런 걸 까먹었다고 누가 간첩으로 잡아가기야 하겠냐만은···
그래도 그런 상황에 맞닥뜨릴 때마다 영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곳은 현대.
필요한 정보는 손바닥 안에서 거의 전부 다 찾을 수 있다.
최신 뉴스들은 물론이거니와 몇 년 전의 뉴스와 가십거리도 전부 찾을 수 있다.
‘그러고 보니 이때 이런 일도 있었지··· 아마 그때 학교에서도 난리가 났었던 것 같은데.’
문득 생각나 찾아본 작년 기사에 강태한은 미소를 지었다.
어떤 기사를 통해 한 기억이 떠오르면, 나무에서 가지가 뻗어나가듯이 그 기억과 연관된 다른 기억들도 하나둘씩 떠오른다.
그 과정은 귀찮기보단 꽤나 즐거운, 노인의 여흥으로 나름 어울리는 일이었다.
물론 강태한의 몸은 이십대의 청년이었지만 말이다.
‘음?’
그러던 중, 문득 최신 뉴스 사이에서 익숙한 이름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최태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강태한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가 금방 기억을 떠올렸다.
며칠 전 순대국밥 집에서 최성현이 말했던 야구선수의 이름이다.
다 이겨가던 경기를 한 번에 말아먹었다나 뭐라나.
아마 원래 잘 하다가 요즘 들어 성적이 부진한 선수가 아닐까, 그렇게 짐작을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기사의 내용 또한 그리 좋은 내용은 아니었다.
단순히 그의 부진함을 지적할 뿐만 아니라, 기자가 한하 호크스의 팬이라도 되는지 문장에 실린 감정이 느껴질 정도였다.
‘슈퍼 루키, 한하의 유망주··· 역시 원래는 평가가 좋은 선수였던 모양이지.’
문득 관심이 생겨 검색을 해보니, 예전에 나왔던 기사들은 하나같이 호평일색이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성적이 부진하다는 말은, 반대로 예전엔 성적이 좋았다는 말이니까.
‘뭐 흔한 일이지.’
촉망받던 인재가 지지부진한 모습을 보이는 일.
이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꽤나 자주 있는 일이다.
오히려 이런 일 한 번 안 겪고 계속해서 기대에 만족하는 인간이 말이 안 되는 천재인 거다.
하지만 본인에겐 힘든 일이겠지.
예전 기사에 나오는 웃는 얼굴과 요즘 기사에 나오는 푹 숙인 얼굴의 차이가 보기 안쓰럽다.
강태한은 괜히 어깨를 으쓱이고는 스마트폰을 주머니로 집어넣었다.
“저 왔습니다.”
“오오, 태한 씨! 어서 와.”
오전 9시 20분.
약간의 오차도 없이, 평소와 같은 시간에 안마샵에 도착한다.
강태한은 황 실장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곧바로 탈의실로 향했다.
잠시 후, 그가 입고 나온 옷은 안마사 복장이 아니라 평범한 찜질복이었다.
첫 예약손님이 오는 시간은 10시.
그때까지 남는 시간을 활용해서, 먼저 목욕탕에서 뜨끈하게 몸을 풀어주는 것이 강태한의 하루 일과의 시작이었다.
“후으으··· 좋군.”
매일 아침을 뜨거운 탕에서 몸을 풀고 시작하는 것.
이것만으로도 하루의 만족도가 확 올라가는 기분이다.
어깨까지 몸을 담근 강태한의 입에서 기분 좋은 탄식이 스르르 새어나왔다.
‘이게 정말 각별하단 말이지.’
아침의 목욕탕은 뭔가 색다른 느낌이다.
평소보다 고요하다고 할까.
사람이 적어 탕도 넓게 쓸 수 있으니, 목욕을 하며 사색을 즐기기엔 더없이 적합한 타이밍이다.
여기서 일을 할 때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큼은 정말 큰 메리트가 아닐까.
강태한은 탕에 몸을 담근 채로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음?’
느슨하게 몸에 힘을 풀고 멍을 때리고 있던 중, 순간 어디서 본 듯한 얼굴에 강태한의 시선이 모였다.
그게 누군지 떠올리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봤었던 얼굴이었으니까.
‘최태준이잖아?’
뉴스 기사에서 봤던 얼굴을 여기서 보니 새삼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천하사절(天下四絶) 중 한 명과 시골 객잔에서 마주쳤을 때와 비슷한 느낌.
슬쩍 살펴보니, 확실히 스포츠를 업으로 삼은만큼 탄탄하게 단련된 몸이 보였다.
단순히 몇 년 고생해서 만든 것이 아닌, 예전부터 꾸준히 노력하여 만들어낸 근육이었다.
‘역시 현실과 소문에는 괴리가 있군.’
일찍부터 인기를 얻으니 훈련을 소홀히 한다, 경기 전날에도 술을 퍼 마신다···
그런 여론들이 종종 보였는데, 직접 보니 곧바로 헛소문임을 알 수 있었다.
저건 나태한 생활로는 나올 수 없는 몸이다.
자세히 볼 순 없으니 확실하진 않지만, 그보단 오히려 너무 과하게 몸을 혹사시키는 쪽에 가까워 보였다.
···뭐 나와는 상관이 없나.
인연이 닿는다면 모를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상관없는 일이다.
신경을 쓰더라도 오지랖에 불과하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 되었기에, 강태한은 최태준을 뒤로한 채 탕을 나왔다.
그런데, 오늘의 두 번째 예약손님을 받았을 때.
“잘 부탁드립니다.”
침대에 걸터앉아 살짝 고개를 숙이는 최태준을 보고, 강태한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이 사람하곤 인연이 닿는 모양이다.
* * *
‘···아까 목욕탕에서 봤던 사람이네.’
목욕탕에서 마주쳤을 때, 사실 최태준 또한 강태한을 살펴봤었다.
당연히 그가 누구인진 알지 못했지만, 꽉 잡힌 근육이 눈길을 사로잡았던 것이다.
운동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은, 서로 종목이 다르더라도 몸을 보면 저 사람이 대충 무슨 운동을 하는지, 경력은 어느 정도에 평소 얼마나 노력을 들이는지 대강 알 수 있다.
헌데 강태한을 봤을 때는 감이 잘 오지 않았다.
확신할 수 있는 건 단지 굉장히 섬세하게 단련된 세련된 근육이라는 것 뿐.
욕탕에서 모르는 사람을 빤히 쳐다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라 대충 슬쩍 보기만 했지만, 마치 교보재로 사용될법한 이상적인 형태였다.
분명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만든 몸이겠지.
그게 불과 두 달도 안 되는 사이에 만들어진 몸이라곤, 최태준은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뭔가 신비한 분위기야.’
한편 그것과는 별개로, 최태준은 강태한에게서 묘한 인상을 느끼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자기 또래 정도 되어 보이는데,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젊은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굳이 비유를 들자면 연륜 같은, 그런 무게가 느껴진다고 할까.
“혹시 따로 불편한 곳은 있는가?”
그 때문일까.
하대하는 말투가 자연스럽다.
말하는 사람도, 그걸 듣고 있는 자신한테도.
솔직히, 방금 전까지만 해도 최태준은 그리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까놓고 말해 사우나 안마샵의 실력이 좋아봤자 얼마나 좋겠는가.
사우나 자체는 규모도 크고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지만, 딱 거기까지다.
코치가 신경써준 걸 굳이 거절하고 싶지 않았고, 겸사겸사 서울 지인들의 얼굴이나 볼 겸 올라왔을 뿐.
하지만 강태한과 마주친 순간.
혹시나, 하는 기대감이 조그맣게 피어올랐다.
최태준은 오른쪽 어깨 위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제가 예전에 공을 던지다 어깨를 다쳤었습니다.”
“오른쪽 어깨로군.”
“예. 근데 후유증이 남았는지, 여기 언저리에 이물감이 계속 남아서··· 여러 군데 다녀봤는데 진전이 없네요.”
말하다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병원에서나 말할 법한 증상을 사우나의 안마샵에서 말하고 있으니.
아마 상대도 부담스럽게 느끼지 않을까 싶다.
“한 번 보도록 하지.”
하지만 강태한은 그냥 고개 한 번 끄덕이고는 어깨 위에 손을 올릴 뿐이었다.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한 그 태도가 묘하게도 신뢰감을 줬다.
‘···확실히 심각하군.’
상태를 확인한 강태한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다만 그가 말하는 건 어깨의 상태가 아니라 몸 전체의 상태였다.
목욕탕에서 봤었던 대로, 오랫동안 혹사를 시킨 것처럼 온몸이 축나있는 상태였다.
어깨에 칼 댄 흔적이 있는 것도 사실이고, 그 부근의 혈도에 약간의 균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몸 상태에 비하면 이건 오히려 별 게 아니다.
‘슬럼프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친 흔적인가.’
성취가 늦어지고 더 이상의 성장이 없는 것.
무림인에게 이것만큼 괴로운 일은 좀처럼 없다.
성실하고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이 고통은 더욱 크게 다가오며, 특히 아직 경험이 없고 혈기가 넘치는 젊은이들에겐 더욱 쓰라리게 여겨질 수밖에 없다.
이것만으로도 심마(心魔)에 사로잡히거나, 쉬워 보이는 사도(邪道)의 길을 택했다가 인생을 망가트리는 젊은 무림기재(武林奇才)들이 매년 드물지 않게 나타날 정도였으니까.
‘이건 현대에서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지.’
그 중 한 사례가 눈앞에 있었다.
어떻게든 진전을 이루고자 발버둥 치며 몸을 축내는 지경이 된 청년이.
겉으로 보기엔 젊은 운동선수 답게 튼튼하고 다부진 몸이지만, 안쪽은 이미 내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는 상태다.
이런 몸으로 시합에 나섰으니 성적이 지지부진할 수밖에.
허나 이 자는 그 원인을 부족한 휴식에서 찾지 않고 부족한 노력에서 찾았을 것이다.
딱 봐도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다.
허나 그런 부류의 인간을 싫어하진 않는다.
조금만 도와줘볼까.
강태한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그의 등 위에 손을 올렸다.
“자네, 마음에 병이 있군.”
“······.”
어디 역 앞에서 듣는다면 이상한 사이비로 치부하고 듣지도 않을법한 말.
허나 강태한의 분위기 떄문일까, 최태준은 얌전히 그의 말을 경청했다.
“고난에 견디고 맞서는 것은 분명 용감한 일이지만, 정작 본인이 부러질 정도의 고난이라면 적당히 흘려 넘기는 것도 필요하다네.”
“나름 신경을 좀 써주려고 하는데 말이야. 이번에는 부디 부러지지 말고 유연하게 대처하길 바라지.”
그게 무슨 의미일까.
최태준은 질문을 던지고자 살짝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그 질문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파바바박!
꼬리뼈부근 명문(命門)혈부터 목 아래의 대추(大推)혈까지.
강태한의 지압이 최태준의 척추를 타고 올라가며 순식간에 십여 개의 혈을 자극했다.
“흐어어윽!”
중앙을 가로지르는 척추는 말 그대로 몸의 기둥.
그 기둥을 타고 온몸으로 퍼져가는 찌릿한 감각에, 최태준은 순간 머리가 하얘져 신음에 가까운 비명을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