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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님 안마하신다-19화 (19/286)

<천마님 안마하신다 19화>

‘이 정도라면 기대를 해봐도 괜찮겠어.’

알고 보니 터 자체는 별 볼일 없고, 그때 마셨던 도라지주는 우연의 일치로 나온 게 아니었을까.

계속 그런 우려가 있었지만, 방금 확인해본 위치는 그런 걱정을 깔끔하게 지워낼 정도의 명당이었다.

물론 지금이 기(氣)의 개념조차 희박해진 시대라는 것을 감안하면 아무리 터가 좋아도 한계가 있겠지만···

그것까지 감안해도, 강태한에겐 사막에서 발견한 오아시스와도 같았다.

“혹시 다음 주 쯤에 입산을 해도 괜찮겠습니까?”

“언제든 상관없습니다. 은인께서 필요하다는데 그깟 산에 들락거리는 게 대수겠습니까. 애당초 하는 거 없이 사실상 놀려두고 있는 산이기도 하고요.”

신준호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하자, 옆에 있던 박호연이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 왜 굳이.”

“몰라. 터가 안 좋나봐. 저번에 시험 삼아 여러 개 심어보고 과일 나무까지 옮겨봤는데, 죄다 시원찮더라고.”

그럴 수 있다.

강태한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영기라는 것이 생명에 이롭기만 한 것이 아니다.

비유를 들자면, 근본적으로 영양보다는 에너지에 가까운 개념.

비싼 영약 함부로 먹었다가 골로 가는 무림인들이 괜히 매번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특히 자연에서 형성된 날 것 그대로의 순수한 영기는, 힘을 다루고 흡수할 내력이 없다면 차라리 독기에 가깝다.

대부분의 생물들은 이런 환경에서 오래 버티지 못하거나 제대로 성장도 못하지만···

간혹 가다 대량의 영기를 흡수하고도 멀쩡한 개체가 나오는데, 그것이 곧 영초(靈草)가 되고 영물(靈物)이 되는 것이다.

‘농사나 과수원을 하기에 적합한 환경은 아니지.’

제대로 기르기도 힘들고, 어렵게 길러낸다고 해도 일반적인 곡식과 과일은 끽해봐야 맛이 좀 더 풍부해질 뿐이다.

그것도 환경에 적응한 소수 개체의 이야기고 나머지는 그냥 쭉정이.

상업적으로 본다면,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에 비해 수지타산이 전혀 맞지 않는 사업이다.

하지만 어쨌거나··· 강태한에겐 반가운 소리였다.

작물이 잘 자라지 않는다는 건 그만큼 산에 영기의 밀도가 높다는 증거이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오랫동안 놀려두고 있었다니,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거기서 약초나 나물들 좀 캐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것 때문에 말씀하신 것 같은데, 그걸 안 된다고 할 리가 없지 않습니까. 다만···”

문득 신준호가 걱정이 담긴 표정을 지었다.

“솔직히 말해서 그리 돌아다니기 좋은 산은 아닙니다. 사람이 잘 안 다녀서 길도 없는 상태고··· 제가 기억하기로 원호가 그 도라지를 캐왔던 곳도 산 초입구간 정도였을 겁니다.”

“그럼 조심할 필요가 있겠군요.”

강태한은 짐짓 걱정하는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지만, 속으로는 미소를 감추기가 힘들었다.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오히려 반가운 소식이었다.

* * *

바람이 차게 부는 쌀쌀한 날씨.

이럴 때 생각나는 음식들은 많지만, 뜨끈하고 든든한 걸 생각하면 역시 순대국밥만한 것이 없다.

뚝배기에서 바글바글 끓어오르는 뽀얀 국물.

맛이 진하게 우러난 국물에 취향대로 간을 맞춘다.

짭짤하면서 감칠맛까지 더해주는 새우젓도 좋다.

얼큰하게 붉은빛을 내는 다대기도 좋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맛을 낸 다음엔, 아직까지도 팔팔 끓어오르고 있는 뜨거운 국물을 한 숟가락 떠서 간을 잘 맞췄는지 확인해본다.

“아으. 딱 좋네.”

강태한의 입에서 담백한 감상이 튀어나왔다.

맞은편에서 그를 지켜보던 최성현이 피식 웃었다.

“되게 맛있게 먹네. 점심 안 먹었냐?”

“좀 그런 편이지.”

돌이켜보니 얼떨결에 점심을 거르고 병원에 갔던 강태한이다.

아침을 좀 많이 먹어서 허기가 늦게 왔을 뿐.

일을 마치고 병실에서 나갈 무렵에야, 강태한은 자기가 공복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런 걸까.

목구멍을 타고 넘어오는 뜨거운 온기가 오늘따라 각별하게 느껴졌다.

국물 맛을 봤으면 이번엔 김치다.

국에 밥을 말기 전, 맨밥과 함께 김치를 맛본다.

살짝 익어서 아직 아삭한 식감이 남은 배추김치.

큼직하면서도 안까지 간이 잘 배어든 석박지.

김치의 맛을 보면 식당의 수준을 알 수 있다고 했던가.

이 집을 처음 안 게 고등학교 1학년 때건만, 한결같이 바뀌지 않는 맛집이다.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이군.’

무림에 있었을 때도 종종 이곳 국밥이 생각났더랬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강태한은 아직 공기에 남아있는 밥을 국물에 말았다.

앞서 김치와 함께 밥을 반 정도 먹어두는 것이 포인트.

한 번에 밥 한 공기를 전부 말면 밥알의 찰기 때문에 국물이 탁해지지만, 미리 밥의 양을 조절해두면 밥을 말아도 깔끔한 국물을 즐길 수 있다.

칼칼한 국물과 쫄깃한 내장, 고소한 피순대.

거기에 은은한 단맛으로 중심을 잡아주는 쌀밥까지!

두 청년이 뚝배기 하나씩을 비우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볼일 있다고 한 건 잘 보고 왔어?”

“잘 끝났지. 생각했던 거 이상으로.”

식사를 마친 최성현이 넌지시 묻자 강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그는 일을 마치고 병실을 나설 때의 일을 떠올렸다.

‘이야기는 해둘 테니 태한 씨가 편하실 때 왔다 갔다 하시면 됩니다. 그냥 저한테 문자 한 통 정도만 남겨주시면 될 것 같아요.’

신준호는 ‘은인에게 그 정도도 못해드릴 거 같냐’며, 그 뒤에 다시 한 번 더 감사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행여 강태한이 부담이라도 가질까봐 걱정하는 듯한 말투였다.

‘오길 잘했지.’

산에 관해서 확답을 받아냈다는 성과도 있지만, 이렇게 감사와 호의를 받으면 그 자체로 기분이 좋다.

선행을 베푼 보람이 느껴진다고 할까.

“잘 됐네. 그럼 뭐 같이 오랜만에 당구나··· 에이, 한하는 또 졌네.”

최성현의 스마트폰에는 전날 있었던 야구경기의 스코어가 나와 있었다.

2:4.

9회 초에 연달아 3점이 빠진 역전패였다.

“또 최태준이네. 이 양반이 문제야, 이 양반이.”

“최태준이 누군데?”

“투순데, 작년부터 폼이 이상하더니 올해는 진짜 별로야. 요즘 일방적으로 터지거나 역전 당하면 십중팔구 이 양반이 등판했을 때 터진 거라니까.”

그러고 보니 인터넷 기사에서 몇 번 이름을 봤던 거 같다.

슈퍼루키, 유망주 같은 수식어가 앞에 자주 붙고··· 몰락, 추락 같은 단어가 뒤에 자주 붙는.

원래 잘하다가 슬럼프를 겪고 있는 선수인가.

사실 그건 최성현의 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작년부터 폼이 이상해졌다는 건, 그 전에는 잘하고 있었다는 뜻이니까.

‘자주 있는 일이긴 하지.’

일찍부터 빛을 발하던 유망주가 어느 순간부터 성장이 멈추더니 오히려 예전보다 퇴화하는 경우.

굳이 무림의 예시를 들지 않더라도 꽤 많은 일이다.

그 결과 길을 포기하거나, 잘못된 방법을 택했다가 다시는 회복할 수 없게 되는 경우도.

하지만 강태한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그는 야구선수도, 야구팬도 아니었으니까.

그는 앞에 놓인 계산서를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보다 당구치자면서. 어디로 갈래?”

“오··· 웬일이야. 당구비 대신 내주게?”

최성현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예전부터 당구 실력 하나는 자신 있는 친구다.

내기 당구를 치면 어디서 져본 적이 없을 정도로.

허나 지금의 강태한은 다르다.

물론 현대로 당구를 쳐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지만···

달리 말하자면, 스스로도 아직 한계를 모른다.

강태한도 히죽 웃었다.

“질 생각이면 치자고도 안 하지.”

“좋아. 커피는 당구장에서 시켜 먹어야겠다.”

서로 자신만만하게 웃으며 성립된 내기.

허나 한 시간 뒤.

“···너 갑자기 왜 이렇게 잘 치냐?”

“일이 있어서 연습 좀 했다.”

“이럴 거면 프로를 해라···”

최성현은 당구장 값은 물론이거니와 커피, 다음 날 서울에 올라갈 기차표 값까지 대신 결제해야했다.

* * *

사람들의 기대가 무섭다.

최태준은 어느 순간부터 그걸 느꼈다.

옛날에는 달랐다.

초등학교 야구부에 있을 때부터 그는 남들보다 뛰어난 선수였다.

다른 건 몰라도 공을 던지는 것 하나만큼은 주변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났다.

그렇기에 타인의 기대를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고, 그 기대들을 충족시키는 것도 당연했다.

그에겐 그만한 실력이 있었고, 노력도 부족하지 않았으니까.

허나··· 프로의 세계는 달랐다.

주변에선 슈퍼루키, 투수 유망주라 치켜세워줬지만, 그는 최고가 아니었다.

자신은 천재가 아니었고, 최고는 진짜 천재들에게만 허락된 자리였다.

그는 여전히 기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 기대에 부응하는 것은 더 이상 당연한 일이 아니게 되었다.

실력과 재능도 문제지만, 거기에 운까지 받쳐줘야 겨우 가능한 일이었다.

‘···이젠 정말 힘드네.’

특히 요즘 들어 최태준은 공을 잡는 일이 부담스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기점이 된 것은 작년에 입은 어깨 부상.

과도하게 연습을 하다 무리가 간 것으로, 부상 자체는 그리 크지 않아 금방 마운드로 복귀했지만···

그 이후 좀처럼 컨디션이 돌아오질 않고 있었다.

특히 요즘 들어서는 그야말로 바닥이다.

틈틈이 점수가 새는 것은 물론이고 역전패를 내준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며칠 전에도 그랬고 말이다.

‘은퇴를 할까.’

정말로 더 이상 안 된다면, 깔끔하게 포기를 하는 것도 길이다.

하지만 최태준은 고개를 저었다.

은퇴를 한다고 해도 지금은 아니다.

이런 모습만 남기고 은퇴를 하고 싶진 않았다.

“태준아.”

“예. 코치님.”

“좀 쉬면서 해라.”

“···쉬엄쉬엄 하고 있습니다.”

장 코치가 그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그가 앉아있던 곳은 훈련장의 벤치.

원래도 연습량이 많았지만, 요즘 들어서는 아예 훈련장에서 떠나지를 않는다.

그럼에도 좀처럼 슬럼프에서 빠져나오질 못하고 있으니 더욱 안타까운 것.

장 코치가 걱정 어린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라··· 아니, 됐다. 어깨는 좀 괜찮아? 아직도 그래?”

“예. 좀처럼 안 없어지네요.”

최태준은 오른쪽 어깨를 두어 바퀴 돌리며 말했다.

어깨의 부상은 깔끔하게 나았다.

헌데, 간혹 어깨 관절 뒤쪽에서 느껴지는 이물감이 신경에 거슬렸다.

뼈와 근육 사이에 모래알 하나가 끼어있는 느낌이라고 할까.

정작 병원에서 검사를 받으면 이상이 없다는 결과만 나올 뿐이다.

재활치료를 받아 봐도 효과가 없고, 한의원에서 침을 맞아 봐도 소용이 없었다.

“나 참. 정말 왜 이러는 건지···”

사실은 아무 문제없는데 내 정신이 문제인 게 아닐까.

컨디션 난조의 핑계거리가 필요해서 만들어낸 증상이 아닐까.

이제는 그런 생각마저 떠올리게 된다.

“태준아. 내일 경기도 없는데, 시간 내서 서울이나 한 번 갔다 와라.”

그런 최태준에게 장 코치가 넌지시 말을 걸었다.

“서울···이요?”

“우리 마누라가 어디 안마샵 하나를 알아왔는데, 거기가 뭐 그렇게 용하다더라. 같은 아파트 라인에 어느 남편 아랫도리가 회춘을 했다나 뭐라나.”

“안마 말입니까.”

최태준의 입가에 실소가 드리웠다.

여태동안 그렇게 많은 곳을 돌아다녔는데도 사라지지 않았다.

헌데 고작 안마 정도로 이 문제가 해결될 거란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예약제라서 받고 싶어도 맘대로 받을 수가 없다던데, 마누라가 잡아준 날이 마침 딱 내일이네. 너 머리도 식힐 겸 한 번 갔다 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이 신경 써준 일을 굳이 거절할 정도로 모가 난 인간도 아니다.

최태준은 살짝 고개를 숙여 장 코치에게 감사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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