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님 안마하신다 17화>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
몸을 쓰지 않는 일이라고 해도 일단 몸의 건강이 갖춰져야 하며, 더 나아가 모든 일에는 기초적인 체력이 필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작은 진리에는 무림인 또한 포함된다.
기를 운용하는 내공과 몸을 다루는 외공.
어느 쪽이 더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전자 쪽이다.
도달할 수 있는 경지와 깊이부터가 다르고, 물병이 아무리 크고 단단해봤자 채워 넣을 물이 없다면 빈 병에 불과하니까.
그렇기에 무림인들끼리 서로를 가늠할 때에도 내력을 그 기준으로 삼고, 대강 경지를 나누는 기준 또한 ‘내공을 어떻게 다룰 수 있느냐’로 구분된다.
허나, 그렇다고 외공이 쓸모없느냐?
그건 절대 아니다.
단지 너무나도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것일 뿐.
외공으로 단련된 몸은 단순히 무공의 위력과 기교를 높이는 것을 떠나 체내의 진기와 혈로를 맑게 하고, 이는 내공의 효율을 증진시키는 것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내공으로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선 그에 걸맞는 외공의 수련이 뒤따라야 한다는 뜻.
그렇기에.
“흐읍, 후우우···”
강태한은 오늘도 퇴근 후 인근 피트니스 센터에 들러 체력단련에 몰두하고 있는 중이었다.
‘슬슬 몸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나.’
기구에서 나온 강태한은 잠시 거울 앞에서 자신의 몸을 둘러봤다.
군살은 말라붙고 굵어진 근육들이 표면 위로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목표한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처음 돌아왔을 때에 비하면 훨씬 나아진 몸이다.
이대로 간다면 금방 목표에 다다를 수 있으리라.
‘이 몸은 부상도, 흉터도 없으니.’
사실 솔직히 말해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건강한 몸이다.
무림 시절의 육체는 오히려 그에게 장해가 될 정도였으니까.
셀 수도 없이 많은 부상과 수십 개의 흉터, 거기에 흡성대법의 부작용으로 뒤엉킨 혈도까지.
그의 몸은 겉으로 봐도 안으로 봐도 여기저기 꿰매고 기워낸 누더기 같은 물건이었다.
반면 지금의 몸은 어떤가.
흉터 하나 없이 멀쩡한데다가 심지어 젊음의 생기마저 넘쳐흐른다.
당연히 단련의 효율이 차원이 다를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심법은 몰라도 몸의 단련에 있어서 만큼은 지금 시대의 방식이 훨씬 더 기술적이고 효율적이다.
강태한은 가볍게 주변을 둘러봤다.
곳곳에 배치되어있는 다양한 종류의 기구들.
개인에 맞춰 팔과 다리, 지구력은 물론이거니와 세부적인 근육까지도 집중해서 단련시킬 수가 있으며, 정밀하게 제작된 무게추를 통해 운동의 강도마저도 자신에 맞게 고를 수가 있다.
‘무림 시절에 비할 바가 못 되지.’
달군 모래를 두들기고, 바위를 짊어진 채로 산을 오르내리고, 미칠 정도로 넓은 마룻바닥을 혼자 걸레질시키고···
무협지의 낭만은 있다만, 까놓고 말해 운동기구가 없으니 저런 수행이라도 시키는 거다.
만약 어느 무림인이 현대의 피트니스 클럽을 본다면 감히 무신(武神)의 신당에 비견할 수도 있으리라.
현대의 기술이란 때로 마법이나 신앙보다도 신비한 것이다.
‘몸만큼은 전성기 때보다 더 좋아질지도 모르겠군.’
이곳에 회원을 끊고 다닌 게 이제 딱 한 달.
이 정도 성장속도라면 꽤나 수월한 진행이 될 것이다.
강태한은 거울을 보며 만족스레 미소를 지었다.
한편.
“저기 봐봐. 저 사람이 그 사람인 거 같은데?”
“그 사람?”
“왜, 한 달 만에 삼대 백에서 삼대 오백까지 올렸다는 사람. 얼마 전에 관장님이 말했었잖아.”
“에이, 그게 말이 되냐? 진짜겠냐고. 어떻게 저게 한 달 만에 만든 몸이냐?”
강태한의 단련을 눈여겨보는 것은 본인뿐만이 아니었다.
예사롭지 않은 그의 성장속도에, 강태한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 헬스장의 유명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건 그렇고 답장은 왔으려나.’
얼마 전 계룡산에 올라갔다가 우연히 만난 인연.
실족으로 가파른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진 사람을 강태한이 구해주면서 이어지게 된 인연이다.
강태한은 운동을 시작하기 전, 그때 명함을 건넸던 사람 중 한 명인 박호연에게 문자를 남겨뒀었다.
혹시 괜찮다면 그때 말했던 산에 다녀와도 되냐고.
목숨을 구해줬다고 생색을 낼 생각까진 없었지만, 그래도 그때 마셨던 도라지주, 영약의 가능성을 생각한다면 생색을 내서라도 강행할 가치가 있었다.
이럴 게 아니라 확인을 해볼까.
오늘 운동도 전부 마쳤겠다, 강태한은 탈의실로 향하여 스마트폰을 확인했다.
“와있군.”
다행히 도착해있는 문자.
허나 그 내용은 강태한이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먼저 연락주지 못해 미안하네, 태한 학생. 사실 괜히 신경 쓰게 할 까봐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는데, 다른 게 아니라 그때 사고를 당했던 친구가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네. 그래서 아마 산행은···]
“···음?”
아무래도 바로 가지는 못할 모양이다.
* * *
다음 날, 수요일.
아침 기차를 타고 대전역에 도착한 강태한은, 곧바로 택시를 잡아 병원으로 향했다.
물론 저번에 강태한이 구했던 환자, 신준호 씨가 입원해있는 병원이었다.
[급한 일이라면 산의 위치만이라도 알려주겠네. 아마 준호가 의식이 있었더라도 괜찮다고 했을 테니까.]
“흐음.”
강태한은 전날 주고받았던 문자의 내용을 재차 읽었다.
산의 위치를 알려줄 테니 혼자 다녀와도 괜찮다는 이야기.
그렇다면 굳이 병원에 가지 않고 바로 산으로 가는 것도 가능은 할 것이다.
위치만 안다면야, 안내 같은 건 없어도 혼자 알아서 돌아다닐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이대로 넘기기엔 영 찝찝하니까 말이지.’
타인에게 선행을 베푼다, 그런 개념의 문제가 아니다.
주인이 의식을 잃고 쓰러져 있는데 그 산에서 뭘 캐간다는 그림 자체가 도리가 아닌 것이다.
까놓고 말하자면 양아치!
아직 확실하게 말할 순 없지만, 어쩌면 자기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더욱 그랬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가 한 번 구했던 사람이 아직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하니, 괜히 더 마음이 쓰이는 부분이 있기도 했으니까.
‘헌데, 당시엔 별 이상이 없어보였는데 말이지.’
강태한은 구조할 당시를 떠올렸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때 약식으로나마 상대방의 상태를 확인했었다.
언덕에서 굴러 의식을 잃은 상태였기에 당연히 어느 정도 부상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중상이라고 할 만한 부분도 없었다.
‘뭐 가보면 알게 되겠지.’
보다 깊은 곳에 문제가 있었을 수도, 혹은 도중에 이상이 생겼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모든 건 도착해서 확인해보면 그만이다.
어느덧 택시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강태한은 택시에서 내려 고개를 들어올렸다.
백병원.
작은 캠퍼스가 연상될 정도로 꽤 넓은 부지와 건물들로 이뤄진, 적어도 대전에서는 손에 꼽히는 규모를 갖고 있는 큰 병원이다.
그때 만났던 박호연 씨가 이곳의 병원장이라 했지.
그렇다면 그 친구인 신준호 씨가 후일 이곳으로 이송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리라.
“···빈손으로 가긴 좀 애매하지.”
문득 정문의 매점에 진열된 선물세트들을 보고선, 강태한은 비어있는 자기 두 손을 내려다봤다.
일단 이곳에 찾아온 명목은 병문안이었고, 나름 좋은 인연을 이어가고자 찾아온 것이지 않은가.
강태한은 매점에 들러 영양음료 한 상자를 사왔다.
“이 정도면 되겠지?”
“어라, 태한 학생 아닌가.”
괜스레 선물의 가격표를 확인하고 있던 중, 앞쪽에서 누군가 강태한을 알아봤다.
그때 산에서 만났었던 일행 중 한 명, 박호연이었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호칭을 뭐라 불러야할 지 몰라 순간 멈칫했다가 급하게 덧붙이는 강태한이다.
“정말로 왔구만. 서울에서 먼 길이었을 텐데.”
“이야기를 듣고 나니 괜히 마음에 걸려서요.”
“이것 참··· 준호 녀석을 대신해서 나라도 감사를 표해야겠구만.”
박호연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딘지 모르게 씁쓸하게 보이는 미소였다.
“병원장님, 저희는···”
“아, 그래. 자네들은 먼저 들어 가보게.”
박호연의 말에 뒤에 있던 일행들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발걸음을 옮겼다.
보아하니 병원의 다른 의사들로 보였다.
“식사하고 오시는 길이신가 봐요.”
“음, 평소보다 조금 늦게 나왔는데··· 이렇게 태한 학생이랑 딱 마주쳤으니 오히려 잘 된 일이지. 병문안 가는 길이라면, 안내도 해줄 겸 같이 가지.”
“그래도 괜찮습니까?”
“안 괜찮을 건 또 뭔가.”
“그러면 저야 좋지요.”
강태한은 웃으면서 말했다.
저번에 대화를 나눌 때도 느낀 점이었지만, 기운도 맑은 것이 썩 괜찮은 사람이었다.
* * *
“아무도 안 계시군.”
딸칵, 병실에 들어선 박호연이 전등을 켰다.
침상이 네 개 놓여있는 꽤 공간이 넓은 4인실.
그 안에는 침상에 누운 신준호 한 명밖에 없었다.
넓은 공간에 덩그러니 있다 보니 제법 을씨년스럽게 보일만도 한데, 환자의 침상 쪽 분위기는 제법 따뜻했다.
테이블에 소복하게 쌓인 꽃다발과 온갖 선물들, 그리고 서투르게 그려진 그림 한 장 때문이었다.
[아빠 아프지 마세요]
어린아이가 그린 것 같은 가족 그림과 그 밑에 적힌 서투른 글씨.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가족들이 오래 머물렀던 흔적들이 군데군데 남아있었다.
강태한은 들고 온 음료 상자를 선물들 사이에 내려놓으며 살풋 웃음을 터트렸다.
“꽤 많은 분들이 다녀가신 모양이군요.”
“옛날부터 인간관계가 원만한 녀석이라.”
박호연은 단순하게 말했지만, 아마 원만한 정도가 아니라 소위 호인(好人)이라 불리는 부류의 사람이리라.
누군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때로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는 법이다.
“좋은 분이신 것 같군요.”
강태한에게도 잘된 일이다.
기왕 호의를 베푸는 거, 악인에게 베푸는 것보단 호인에게 베푸는 쪽이 좋았으니까.
“혹시 괜찮다면, 환자 분 맥을 좀 짚어 봐도 되겠습니까?”
“맥··· 말인가?”
“제가 어깨너머로 배운 게 좀 있어서.”
으음. 박호연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로선 적절치 못한 판단이겠지만, 그때 산에서 보여줬던 모습을 생각하면 뭔가 있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 것이다.
“그럼, 잠시 집중 좀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병원장의 허가가 떨어졌으니 거리낄게 없다.
강태한은 신준호의 손목과 목 뒤의 혈을 조심스럽게 짚었다.
‘···역시 겉에는 문제가 없나.’
그때 확인했던 내용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호흡기와 머리에 붕대를 두르고 있다는 것 만 빼고는 평범한 모습이다.
안색도 괜찮고 맥박도 멀쩡하다.
“몸에는 큰 문제가 없네요.”
“검진에서도 이상이 없다고 나왔다네.”
“다만··· 대충 알 것 같기도.”
“그게 무슨 뜻인가?”
강태한은 잠시 대답을 미룬 채, 신준호의 목 뒤에 손가락을 짚었다.
슬며시 눈을 감고, 단전에서 내공을 끌어올려 상대의 혈도로 흘려보낸다.
여기에 많은 내공은 필요 없다.
오히려 필요 이상의 내공은 상대방에게 내상을 입힐 위험을 만들 뿐이다.
아주 미세한 양.
필요한 만큼의 내공만을 흘려보내, 실처럼 뻗어내어 기감을 펼치듯 감각을 넓혀간다.
‘···역시 그렇군.’
목에서부터 상단전과 가까워지는 어느 한 구간.
탁, 하고 벽처럼 막히는 곳이 있다.
보아하니 혈도의 흐름 자체가 일반적인 경우보다 미약하다.
“할 수 있겠네요.”
“뭘··· 할 수 있겠다는 건가?”
강태한의 시선이 박호연에게로 향했다.
순간 박호연의 몸이 움츠러들었다.
뭐라 설명하긴 힘들지만··· 방금 전의 강태한과 분위기가 달라져 있었다.
“이분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이죠.”
“그, 그러니까 그게 무슨 뜻이냔 말일세.”
강태한은 대답대신 다시 환자에게 고개를 돌렸다.
상단전은 사고(思考)능력과 정신을 담당하는, 신체학적으로 말하자면 뇌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생명을 유지하는 데 있어 없어선 안 되는 부분이자, 사람의 정신, 인격체를 구성하는 핵심적인 장기.
흔히 하단전이 망가질 경우 무림인으로서의 인생이 끝난다고 하지만, 상단전이 망가질 경우엔 생명 자체가 끊어진다.
설령 목숨을 건진다하더라도 제정신으로 살아남기가 힘들다.
말하자면 안전에 가장 민감할 수밖에 없는 곳.
그렇기에, 간혹 막대한 충격이나 생명의 위협을 느낄 경우, 최소한의 생명유지 기능만 남긴 채 상단전과의 연결이 끊어지는 때가 있다.
건드리면 껍질 안쪽으로 숨어드는 소라게처럼 반사적인, 상단전이라도 보호하기 위한 본능적인 최후의 수단인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방법은 어렵지 않다.
혈도에서 벽처럼 막혔던 구간.
그 구간을 천천히 자극하여, 안에서부터 바깥으로 나올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풀어주면 그만이다.
게다가 거기에 필요한 준비도 이미 갖춘 상태다.
해당 구간의 바로 앞까지 흘려보낸 미량의 내공.
그것을 통해, 막혀있는 입구를 가볍게 자극한다.
한 번, 두 번, 세 번.
‘주화입마나 심마에 빠진 것이라면 이 정도로는 택도 없겠지만.’
지금 상황에는 이 정도로도 충분하다.
그렇게 십여 차례 정도 반복했을까.
“끄으으음···”
침상의 환자, 신준호의 눈꺼풀이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