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신들의 안배 (6)
─덜컥
검을 뽑으려던 검신의 검이 멈췄다.
호진의 주위로 회백색으로 물든 세상이 무서운 속도로 번져갔기 때문이다.
‘뭐지?’
의아해하기도 잠시 검신은 그것이 무엇인지 눈치챘다.
불꽃과 검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세계가 조각조각 잘리며 사라져 갔다.
심상세계를 침탈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다른 심상세계뿐이다.
“이런……!”
검신이 호진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순간 검신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미 늦어 버렸다는 것을.
─화악
땅은 검게 하늘은 새하얗게.
무채색으로 된 세계가 온 세상을 뒤덮었다.
그것이 호진의 심상세계.
그 숨 막히도록 공허하고 광활한 세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의 세계를 집어삼켰다.
셀 수 없었던 무한에 가까운 검들은 사라지고, 허허벌판에는 검신과 한 자루의 검만이 남았다.
너무도 평범하고 눈에 띄지 않는 롱소드 한 자루.
검신은 가까이에 있던 그 검으로 다가가 조용히 뽑아 들었다.
“이건 반칙인데.”
나지막이 중얼거린 검신은 가만히 서서 자신을 응시하는 호진을 바라봤다.
‘아아…….’
그리고 검신은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에 몸을 떨었다.
그것은 압도되는 듯한 감각과 무력함.
경외에서 오는 공포와 두려움이었다.
검신의 입꼬리가 비틀어지듯 끌어올려졌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는 이런 상황조차 즐거움으로 느끼도록 태어난 까닭이다.
그렇기에 검신은 나아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챙강
맑은 금속음이 멀리 울려 퍼졌다.
뭐가 어찌 된 걸까.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검신은 부러진 검을 꼭 쥔 채 우두커니 섰다.
그러곤 이내 허탈하게 웃음을 흘리며 물었다.
“도대체 뭡니까. 이 세계는?”
그 질문에 가만히 서 있던 호진이 천천히 다가오며 답했다.
“무아(無我). 이 세계엔 아무것도 없어. 벤다는 것, 그 개념만이 무한히 이루어질 뿐.”
무채색의 공간은 먼지 한 점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검신의 수많은 검들도.
검신도.
나아가 호진 자신조차 이 세계에선 지워내야 할 이물질에 불과했다.
모든 것을 베어 없앤다.
지우개로 지우듯 모든 존재를 베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아무것도 없는, 심지어 자신조차도 없는 ‘무아’의 공간은 오롯이 완벽해진다.
“완전 사기잖아요…….”
도대체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이리도 광활하고 공허한 세상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걸까.
검신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 검신을 향해 호진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너는 모르겠지.”
소중한 존재의 죽음이 가져오는 공허함을.
서서히 죽음을 향해 간다는 두려움을.
잠깐의 실수가 불러오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그러한 감정들은 오로지 필멸자이기에 닿을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니까.
호진의 세계는 검신의 생각처럼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
─스스스슥
검신의 심상세계가 깨졌다.
호진의 세계도 마찬가지로 사라졌다.
호진은 까맣게 타버린 여신의 언덕으로 돌아왔다.
그곳에 검신이 아까보다 더 파리하게 질린 채 바닥에 쓰러져있었다.
호진은 간신히 숨만 붙어있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곤 그 머리에 손을 얹었다.
“……뭔가요?”
검신의 물음에 호진은 담담하게 답했다.
“너의 신격을 지워내고 여신의 신격을 불러올 거야.”
“저는 소멸하는 건가요?”
“…….”
호진이 답하지 않자, 검신은 아쉽다는 듯 중얼거렸다.
“아쉽네요. 더 놀고 싶었는데…….”
“너는 검이야.”
“네?”
검신은 갑작스러운 호진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신이라거나 그런 거창한 존재가 아닌, 그냥 검으로 태어났어야 할 존재였어.”
아이와 같이 천진한 검신.
순수한 것과는 별개로 그 존재부터가 지성체로서는 비뚤어지고 결핍된 존재였다.
호진은 그것이 검신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검신은 그저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니까.
하지만 검신은 많은 존재를 해쳤고, 또 해칠 것이다.
검신의 잘못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게 옳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네겐 이쪽이 더 행복할 거다.”
호진은 그 말을 끝으로 여신의 몸에서 검신의 격을 끄집어냈다.
그러곤 그 대부분의 힘을 자신의 몸으로 받아들였다.
─스스슥
거대한 힘이 몸 안에서 느껴졌다.
자신과 닮아 있는 그 신격은 자연스럽게 호진의 몸에 녹아들었다.
신격이라 불릴만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자 여신의 몸엔 미약한 잔여물들만이 남았다.
호진은 숨을 가다듬은 뒤 그것들을 재차 밀어냈다.
머리부터 발끝에 이르기까지 쥐어 짜내듯 밀어 낸 검신의 잔여물들이 몸에서 빠져나가는가 싶더니, 돌연 어느 한 곳에 맺혔다.
─반짝
새벽을 밝히는 청성.
호진의 애검에 한때 신이었던 존재가 담겼다.
미약하기 그지없는 힘만이 남았지만, 언젠간 깨어날 것이다.
그러고는…… 이름 없는 검사에게 힘을 빌려주기도 하고 조언도 하는 검이 되지 않을까?
‘성검으로 불릴지 마검으로 불릴지는 모르겠지만.’
상념을 멈춘 호진은 푸른 검을 내려다보며 작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게 옳은 선택일지 어떨지는 모르겠으나.
어쩐지 검신을 세상에서 완전히 지우고 싶지는 않았다.
호진이 그렇게 상념에 젖어 있던 그때였다.
─스륵
축 늘어졌던 여신의 몸이 움찔 떨려왔다.
“당신은…….”
호진을 바라보던 여신의 눈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입가에 고요한 미소가 지어졌다.
“감사합니다.”
“…….”
호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두 개의 세상을 이었냐고 묻지도, 왜 자신이어야만 했냐고 따지지도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고 하는 게 옳으리라.
호진은 그저 묵묵히 받아들 뿐이었다.
한때 여신이라 추앙받으며 인간들을 가엽게 여긴 존재가 넘겨주는 마지막 힘을.
─툭
힘을 잃은 여신의 손이 바닥을 향해 무심히 떨어지고.
“아.”
호진은 자연스레 깨달았다.
세상을 잇고 단절할 수 있는 힘이 이미 자신의 몸 안에 있음을.
***
여신과 검신의 힘을 얻은 후에도 호진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힘을 잃고 무너져가는 여신의 육체를 바닥에 고이 뉜 후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이.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돌연 여신의 성역이 찢어지며 일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주변을 두리번거린 가장 앞에 선 존재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우리가 올 줄 알았나?”
그 질문에 호진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적어도 한 명은 올 것이라고 생각했지.”
“…….”
호진의 말에 로브를 쓴 여인이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에선 숨길 수 없는 미안함이 보였다.
그러나 가장 앞에 선 존재, 죽음을 먹는 얀은 즐겁다는 듯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미안하게 됐군. 이렇게 몰려올 줄은 몰랐을 진데.”
호진은 그 말을 귓등으로 흘리며 눈앞의 존재들을 바라봤다.
몇몇 존재들이 눈에 익었다.
죽음을 먹는 자 얀.
호수를 기는 여신 아난타.
이 둘은 비록 화신체라 할지라도 그 모습을 직접 눈에 담은 적이 있다.
반면, 불과 철의 여신 이자리온.
카인, 시스, 세쿤탈리라 불리는 여섯의 선신들은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모두 신전에서 조각으로 접한 것과 비슷했기에 알아보기 어렵지 않았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거대한 무언가 들이다.
시칸의 은둔자 라멜.
불사의 신 데니토.
그 외에 꿈틀거리고 튀어 오르고 미끌거리는 각양각색의 존재들이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고대신이라 불리는 자들임을.
“……의외의 조합이긴 하네.”
호진은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서로 철천지 원수마냥 상잔을 해 대던 이들이 지금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서 있다.
그 이유야 짐작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죽기보다 싫은 거겠지.’
어디서 굴러온 지도 모를 필멸자가 어떤 신보다도 강력한 힘을 얻는 것이.
필멸자 주제에 이 세계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 끔찍하게 싫었을 것이다.
원래 서로 싸우다가도 외부에서 적이 나타나면 힘을 합치기 마련이다.
그 옛날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그러했듯이.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호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피 튀기며 싸우던 이들이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터다.
무엇보다 호진은 힘을 급격하게 얻으며 성장했기에, 이들이 사태를 파악하고 위기를 느낄 정도의 시간을 주지 않았다.
누군가 그들에게 이 위기를 알리고 의견을 하나로 모았기에 이런 일이 가능했던 것이리라.
그게 가능한 존재는 하나뿐이었다.
감시자이자 조율자를 자청하는 자.
“감시하는 자 울타.”
호진의 읊조림에 로브를 뒤집어쓴 울타가 천천히 앞으로 나왔다.
이를 지켜보던 호진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이제 말씀해 주시죠. 도대체 뭘 원하시는 겁니까.”
지겨웠다.
빙빙 말을 돌려가며 자신을 속이는 것도.
자신들만이 아는 미래를 위해 인간들을 장기말로 삼는 것도.
호진은 조용하고 차갑게 분노했다.
딱히 배신감을 느끼진 않았지만, 저 지긋지긋한 행태에는 화가 났다.
그 분노어린 시선에 울타는 움찔 몸을 떨면서도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아이야. 지금이라도 세계 간에 이어진 게이트를 닫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거라. 오롯이 네가 지녀야 할 힘만을 가지고 돌아간다면, 이곳의 신들도 다신 너와 너의 세계에 손을 대지 않을 터이니.”
호진은 인상을 구기며 되물었다.
“이유가 뭡니까?”
그가 이유를 물은 것은 상대가 울타이기에 하는 최소한의 배려였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호진은 지금 이곳까지 도달하지 못했을 터이니.
그것을 안다는 듯 울타는 담담하게 답했다.
“세계엔 정해진 흐름과 규율이라는 게 있단다. 선신들의 힘이 약해지고 고대신들의 힘이 커지는 것에는 어떠한 이유도 없지 않았느냐. 그저 그래야 할 뿐인 게야.”
“그 흐름이란 걸 누가 정하는 겁니까?”
“그건…….”
호진의 물음에 울타가 말이 막힌 그때였다.
“나오거라. 그저 죽이면 그만이다.”
얀이 앞으로 나서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선신들의 힘과 영향력이 쇠약해져야 하는 운명이라는 말이 그의 심기를 거스른 것이다.
“감시자. 네가 약속했듯. 놈을 쓰러트리면 그 힘은 내가 가져도 되는 거겠지?”
“……물론이니라.”
울타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얀의 만면에 웃음이 활짝 드리워졌다.
“이미 검신과의 싸움으로 너덜너덜해진 녀석쯤이야……그래도 혹시 모르니 거둬들여라.”
“……그렇게 하지.”
울타는 짧게 한숨을 토한 뒤 호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다음 순간 호진은 자신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힘을 느꼈다.
그것은 호진을 이루는 권능과 힘 중 하나였던 울타의 은총이었다.
“…….”
호진이 이를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신들의 노림수가 바로 이것이었다.
검신과의 전투로 힘이 빠질 대로 빠진 호진에게서 울타의 은총을 빼앗는 것.
잠시 후, 울타는 뻗은 손을 서서히 내리며 말했다.
“힘은 회수했다.”
“좋군.”
그 말을 끝으로 얀의 등 뒤로 뻗은 손들이 수인을 맺었다.
‘애초에 필멸자를 상대로 말을 나누는 건 무의미한 일.’
상대의 상태는 이미 검 한번 제대로 휘두를만한 힘도 나지 않은 걸레짝이다.
죽여서 주제에 맞지도 않는 저 힘을 빼앗으면 그만일 터.
얀은 마무리를 짓기 위해 권능을 일으켰다.
[죽음이 가로되 나는 빗살처럼 천 번을 내찌르는 전신의 창…….]
─서걱
얀은 눈을 크게 떴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일이……?’
끔뻑이는 얀의 두 눈에 그제야 바뀐 세상이 들어왔다.
방금까지만 해도 까맣게 그을린 언덕이었던 풍경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늘은 새하얗고 땅은 칠흑같이 어둡다.
그 무채색의 세상이 차례로 돌아가며 얀의 눈에 담긴다.
하얗고 어둡고, 하얗고 어둡고.
빙빙 돌던 세상의 색은 뒤섞여 회백색이 되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툭 하고 멈췄다.
그 시선 끝에 보잘것없던 필멸자가 너무나도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반대로 자신의 뒤에 선 신들은 온통 경직된 채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얀은 그 순간 깨달았다.
‘아.’
왜 몰랐을까.
눈앞의 필멸자는 신전에서 자신에게 굴욕을 줬을 때와는 다른 존재였다.
섬기던 신에게 은총을 빼앗기고, 검신과의 싸움으로 너덜너덜해진 필멸자 따위가 아닌 것이다.
잘못 생각했다.
이자는 이미 더할 나위 없는 절대자.
모든 것을 베어 부수는 파괴자.
이 자리에 존재하는 유일무이한 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