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화. 신들의 안배 (5)
─울컥
신이라 해서 인간과 피의 색이 다르진 않았다.
붉디붉은 선혈이 폭포처럼 터져 나왔다.
─툭
검신은 한 차례 피를 쏟아내고는 그대로 무너졌다.
바닥에 꽂은 검에 기대어 스르륵 무너지듯 무릎이 땅에 닿았다.
‘끝났군.’
이를 지켜보던 호진은 검을 거뒀다.
검신이 이렇게 죽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아직 여신과 해야 할 이야기가 남았어.’
호진은 자신의 목표를 잊지 않았다.
검신을 쓰러뜨리기로 마음먹은 것과는 별개로, 아직 호진은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정하지 못했다.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호진은 생각했다.
‘검신을 여신의 육신에서 몰아내고, 여신을 깨운다.’
호진은 일찍이 여신과의 계약을 파기했으며, 여러 신격의 기운들을 자신의 것으로 삼거나 밀어내는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다.
검신을 반쯤 죽인 지금이라면 시도해 볼 만했다.
호진은 미동도 하지 않는 검신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 순간 희미한 소리가 새 나왔다.
“흐…….”
검신이다.
그가 돌연 흐느끼듯 몸을 미세하게 떨었다.
매우 미약하던 그 소리는 점점 커져 호진의 귀엔 생생하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흐으…… 흐.”
그리고 그 흐느낌은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흐…… 하하핫!”
그리고 참을 수 없는 폭소로 변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 걸까?
후련하고 기쁜 듯 웃음을 터트린 검신은 한동안 멈출 줄을 몰랐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간신히 진정한 검신을 향해 호진이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즐겁지?”
“상상도 못 했으니까요. 이리도 강하실 줄은.”
검신은 호진의 강함을 몰랐다.
여신의 몸을 완전히 장악한 것은 최근이었기 때문이다.
“제가 상대한 어떤 신보다도 강할 줄이야. ……즐거워 미칠 것 같네요.”
검신은 웃으며 활짝 미소 지었다.
검붉은 피가 새하얀 치아를 물들이며 턱을 타고 흘러나왔다.
다 죽어가는 몸으로도 반짝이는 눈은 호진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 광기 어린 시선에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아직도 힘이 남아 있었나?’
호진이 속으로 혀를 차며 검을 들어 올리던 순간이었다.
검신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휘어졌다.
“늦었습니다.”
[심상세계 나유타(那由他)]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세상이 암전됐다.
돌연 나타난 하나의 세계는 호진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
몇 번을 당하다 보니 놀랍지도 않았다.
‘또인가…….’
호진은 가볍게 한숨을 토해 냈다.
주술세계 혹은 심상세계.
그것은 신격을 소유한 이들이 지닌 고유한 세계다.
그곳으로의 초대는 거절할 수 없다.
파훼법은 한 가지.
그 고유세계를 부수는 것뿐이다.
울타는, 고유세계는 고유세계로 대항해야 한다고 했다.
세계의 법칙끼리 맞부딪쳤을 때, 이기는 쪽이 더 강한 세계를 지닌 자인 것이다.
익숙한 기시감을 느끼며 호진은 주변을 찬찬히 돌아봤다.
─화르륵
갑자기 솟아오른 거대한 불꽃이 눈을 시리게 했다.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린 호진의 얼굴로 뜨거운 열풍이 훅 몰아쳤다.
─깡! 까강!
이어서 철을 두드리는 망치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귀가 터질 지경이었다.
빛이 익숙해지자 슬슬 주변의 풍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건…….’
보이는 광경은 검.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건 도산검림이었다.
광활하게 펼쳐진 땅엔 칼과 검이 산처럼 쌓여 있다.
산처럼 높이 솟은 검도 있고, 바닥에 널브러진 것도 있었으며, 허공에 매달려 흔들리는 것도 있었다.
다만 쉴 새 없이 타오르는 불꽃들이 그 검들을 녹이고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시켰다.
대장장이가 없음에도 스스로 몸을 두드리듯 단조되어 구부러지고 형태를 갖춰진 하얀 수증기를 내뿜으며 담금질이 됐다.
물론 원리 따윈 이해할 수 없었다.
호진이 그렇게 주변을 살피던 그때 검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에 드시나요? 남한테 보여준 건 오랜만인데요.”
소리의 위치를 찾아 고개를 돌린 호진.
그 시선이 검이 무더기로 쌓인 한 곳에서 눈이 멈췄다.
─철컥
그곳엔 한 소년이 검들로 쌓아 올린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몸에는 수백의 검을 두르고 있었다.
녹여서 이어 붙인 검들은 소년의 몸 위로 뒤덮여 하나의 갑옷이 됐다.
그뿐일까.
소년의 주위로 수십의 검들이 공중에 떠 있었다.
그럼에도 손에는 검 한 자루를 소중한 듯 쥐고 있었다.
호진은 그 모습이 욕심껏 음식을 볼에 쑤셔 넣은 다람쥐 같다고 생각했다.
검신은 그런 호진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소감은 어떠시죠?”
“별로야. 덥고. 시끄럽고. 칼들 때문에 맘 편히 앉지도 못하겠네.”
“……!”
호진이 짜증스럽다는 듯 말하자 검신은 충격에 빠진 듯 보였다.
비틀거린 검신은 간신히 선 채 중얼거렸다.
“……그럴 수가. 당신이라면 좋아해 줄 거라 생각했는데요.”
호진은 의기소침해진 검신을 보며 소리 나게 혀를 찼다.
그러곤 이 웃기지도 않은 촌극을 마무리했다.
“그래서? 이 세계는 뭐 하는 곳이지?”
호진의 물음에 검신은 시무룩해하며 말했다.
“……나유타. 제 심상세계입니다.”
나유타.
분명 무한에 가까운 숫자를 뜻하는 의미였던 것 같다.
호진이 대답 없이 검신을 바라보자 검신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검아 저이고, 제가 곧 모든 세상의 검입니다. 이미 사라진 옛날의 검들도, 현재 존재하는 검들도 모두 이곳에 있습니다.”
“보물창고라는 건가.”
호진은 내심 안심하면서 중얼거렸다.
만 개의 검이 있다면 무엇 할까.
호진은 자신의 손에 익은 검 하나를 더 신뢰하는 편이다.
하지만 검신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었다.
“이 세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선 제 본질이 담긴 검을 찾아 부러트리셔야 합니다. 그전까지 저는 불사. 죽지 않아요.”
“……뭐?”
호진은 그 어처구니없는 조건에 입을 벌렸다.
아니, 그보다 약점을 왜 말해주는 거지?
그런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검신은 웃으며 말했다.
“이 조건을 말해 주는 것까지가 제 불사의 조건이니까요. 방금 절 죽일 유일한 기회를 놓치신 겁니다.”
“…….”
호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셀 수 없이 많은 검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들 중 하나의 검을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상대방을 가두고 죽을 때까지 전투를 반복하기 위한 구조의 심상세계.
검신은 이런 식으로 스스로를 단련하고 쌓아 올린 것이다.
호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이를 지켜보던 검신이 실망스럽다는 듯 물었다.
“설마 포기하시는 건 아니죠?”
“아니, 그럴 리가.”
호진은 즉답했다.
분명 이 세계는 터무니없는 규칙을 강요한다.
하지만 그것은 그것을 얌전히 따라줄 때의 이야기.
호진은 자신이 있었다.
이곳의 규칙을 새롭게 바꿀 자신이.
***
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병신 같은 놈.’
─서걱
날카로운 절삭음과 함께 호진의 등에 피가 튀었다.
뼈까지 닿지는 않았지만, 꽤 깊었다.
쉽사리 아물 상처가 아니라는 말이다.
‘돌아 버리겠군.’
호진은 반격조차 하지 못한 채 뒤로 물러났다.
몇 번째로 입는 치명상일까.
세어 보진 않았지만, 백번은 족히 넘었다.
특유의 회복력으로 여태 버텨 왔지만 슬슬 체력이 따라오질 못하고 있었다.
새로 베인 상처가 아물지 않는 게 그 증거다.
이미 코트와 옷들은 넝마가 되었고 온통 피로 젖어 있는 수준이다.
“역시 대단해요.”
그런 호진을 향해 검신이 해맑게 말했다.
“놀리는 거냐?”
“아뇨, 정말로요. 꼬박 하루를 버티셨는걸요.”
하루라니.
‘왠지 더럽게 피곤하더라.’
호진은 짧게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지금까지 수십 개의 검을 부수고 몇 번이나 검신의 목을 벴다.
그리고 검신은 앞서 설명한 심상세계의 규칙이 진실임을 증명해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면…….
‘저놈이 뒤지질 않는다는 거지.’
호진은 문득 예전에 읽었던 경전을 떠올렸다.
‘검신은 고대의 신들과 가장 격렬하게 전투를 벌였다. 매일같이 그 몸이 찢어지고 녹았으며 부서졌다. 하지만 그는 검. 끝없는 단조와 담금질 속에서 검은 더 단단해지고 예리해졌다.’
심상세계 나유타의 규칙은 검신의 본질에 맞닿아 있었다.
아무리 깨고 부수더라도 검신의 본질은 더욱 단단해지고 강해질 뿐이었다.
지금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다.
그는 호진과의 전투를 통해 점점 강해지고 있다.
반면에 자신은 지치고 점점 느려지고 있다.
이대로라면 결과는 뻔했다.
호진은 초조함을 느꼈다.
‘슬슬 감이 잡히긴 하는데.’
지금 호진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자신만의 세계를 불러오는 것.
오직 그것만이 이 세계를 파훼할 방법이었다.
호진은 몇 번이나 보았던 장소이자 닿았던 그곳의 풍경을 계속해서 그렸다.
하지만 이전처럼 차분히 자신의 내면을 관조할 여유가 나질 않았기에 좀처럼 쉽지가 않았다.
그런 호진의 초조함을 느낄 걸까.
검신이 호진을 향해 달래듯이 말했다.
“더 시간을 끄는 것도 실례겠죠. 슬슬 끝내볼까요?”
“…….”
쓸데없는 배려는 하지 않아 줬으면 했다.
하지만 이미 검신의 기세가 달라진 이후다.
‘이건 못 막겠는데.’
호진은 허탈하게 웃기도 잠시 각오를 다졌다.
그나마 몰아치던 공격이 멈춘 지금이 마지막 기회임은 분명했기에.
‘불러오지 못하면 죽을 뿐.’
시간을 쪼갰다.
익숙한 감각이다.
심상세계로 진입하고 빠져나올 때 생기는 정지된 시간.
호진은 그것을 되새겼다.
초를 일백 분의 일로.
그것을 다시 재차 조각내어 수천 개의 파편으로.
그 파편을 다시 수억 개의 시간으로 나눈다.
조(兆)분의 일에서 경(京)분의 일로.
경(京)분의 일에서 해(垓)분의 일로.
해(垓)분의 일에서 자(?)분의 일로.
─틱
똑딱이던 초침이 멈춰 섰다.
성공이었다.
쪼개지고 쪼개진 시간이 늘어진 라디오 테이프처럼 느릿하게 흘렀다.
그리고 끝내 오직 의식만이 부유하는 세계가 찾아왔다.
검을 휘두르려는 검신도, 눈이 시리도록 빛을 뿜어내는 불꽃도 멈췄다.
세상 모든 게 흑백 사진처럼 그대로 멈춰 있었다.
물론 그건 호진의 몸도 마찬가지.
하지만 호진은 이로써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다.
완전히 멈춰 버린 세계 속에서, 오롯이 호진의 의식은 그 내면을 향해 조용히 침전했다.
투쟁과 욕망으로 가득한 무의식의 경계를 지나 더 깊은 내면으로 파고들었다.
얼마나 내려왔을까.
어둡고 고요한 적막만이 흐르는 회백색의 공간.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곳에 호진은 홀로 섰다.
호진의 전부인 검조차 이 자리엔 없었다.
하지만 호진은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 세계 자체가 검이다.’
모든 것을 베어 없애버리는 한 자루 검. 그것이 이 심상세계의 정체였다.
수많은 검이 존재하는 검신의 심상세계 ‘나유타’와는 정반대였다.
그렇기에 이 심상세계에서 베지 못할 것은 없었다.
관념이든 의념이든.
설령 하나의 세계라 할지라도.
호진은 자신의 심상 세계를 수면으로 끌어올렸다.
멈춰진 시간의 흐름이 점점 가속화되고 그것에 맞춰 하나의 세계 또한 빠르게 개화했다.
─화악
땅은 검게 하늘은 새하얗게.
무채색으로 된 세계가 온 세상을 뒤덮었다.
그것이 호진의 심상세계.
‘무아(無我)’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