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신들의 안배 (4)
빛이 범람했다.
검과 검이 부딪칠 때마다 압도적인 열이 터져 나왔다.
별이 탄생할 때 생긴다는 광휘가 이러할까.
만약 이곳에 다른 사람이 있었다면 이 광경을 눈에 담기도 전에 불타 사라졌으리라.
하지만 왜일까.
호진은 섬광처럼 짓쳐들어오는 검신의 공격을 간발의 차이로 막아내며 생각했다.
의외로 할 만하다고.
─화악
라멜의 권능인 짙게 깔린 검은 안개 사이를 오가며 호진은 검을 휘둘렀다.
안개 속에서 불꽃이 튀었다.
검신과 합이 길어질수록 손은 얼얼해졌지만, 그 끝에 보람도 있었다.
“크읏!”
검신이 얕은 신음을 흘리며 안개에서 간신히 빠져나갔다.
그가 움켜쥔 팔뚝에는 옅은 자상이 나있었다.
그러기도 잠시, 놈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신나서 웃음을 흘렸다.
“처음 보는 권능…… 마치 검 같아! 재밌네요! 이게 당신의 권능인가요?”
“글쎄, 마음대로 생각해.”
호진은 그렇게 답하며 검을 고쳐잡았다.
일렁이는 대양과 같은 기운이 검의 끝에 머무르며 주위에 얼음 가루를 흩뿌렸다.
지금부터 펼칠 기술은 검신이 봉인된 이후 등장한 최강이라 불리던 검술들을 망라한 것.
검의 교단 초대 교주 게일이 검신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한 오의, ‘검의 향연’이다.
“……그건?”
검신의 표정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한 사람의 검사에게는 고유의 검이 있다.
본인이 평생을 단련해 쌓아 올린 깨달음과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던 기질이 그 검사의 검을 결정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어째서일까? 호진이 쥔 검에선 이전과 전혀 다른 냄새가 났다.
“자랑스러워해도 좋아. 한 남자가 너를 위해 수천 년간 준비한 거니까.”
“그게 무슨…….”
검신이 그 말의 의미를 물으려던 찰나였다.
호진의 몸이 공중으로 튀어 오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검신을 향해 접근해 검을 휘둘렀다.
그건 수면 위를 활공해 먹이를 낚아채는 매의 사냥과도 같았다.
“흡!”
검신은 아슬아슬하게 쇄도하는 호진의 공격을 막아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돌격기에 놀라기도 잠시.
이어지는 공격에 검신은 다시 한번 주춤했다.
정확히 말하면 딛고 있는 땅이 움푹 파이며 뒤로 몸이 밀려났다.
─콰앙!
무겁고 무거운 일격은 태산과 같이 무겁고 대양같이 광활했다.
그러는가 싶더니 이번엔 검이 뱀처럼 휘어지며 어깨를 노려왔다.
─스륵
분명 막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어깨를 타고 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공격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어느 왕가의 비전, 어느 명문가의 결전기, 전설 속 암살교단의 비기.
그것들은 모두 최초의 기사 혹은 검성이라 불린 자들의 검술들이었다.
하나씩 상대해도 제법 상대하기 벅찬 기술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자신을 향해 쏟아졌다.
‘막을 수가 없어.’
검신은 그 일격들에 하나둘 몸에 상처가 늘어갔다.
단순히 위력적이어서가 아니다.
호진의 변칙적인 공격들은 예측을 불허했다.
각 지방의 특성이나 검사들의 고유한 기질이 담긴 그것들은 천재라 불리는 이들이 검의 정수에 다다라 깨우친 묘리들이다.
검신은 그 검들에서 아름다움을 느꼈고 진심으로 경탄했다.
그것은 검신이 봉인된 이후에 창안된 검술들이었고,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검술들이었다.
사람과 시대, 그리고 환경과 만나 맺은 수백 가지의 결실.
“굉장해요! 이런 것들이 존재할 줄이야!”
검신은 어느새 작고 큰 상처들로 너덜너덜해진 채 활짝 웃었다.
어느새 호진의 검은 멈춰 있었다.
검의 향연은 100명의 검사의 기술을 한데 엮은 오의였다.
영원히 계속될 순 없었다.
‘치명상은 피했나.’
호진은 다소 아쉬워했지만,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
게일이 준비한 검의 향연으로 검신을 잡을 수 있으리라곤 애초부터 기대하지 않았으니까.
그게 가능했다면 호진이 게일을 이길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잠시간의 대치가 이어지던 그때였다.
“아, 충분히 즐겼네요. 그럼 슬슬 끝내 볼까요?”
검신은 검을 고쳐잡으며 호진에게 말했다.
이에 호진은 굳은 표정을 지었다.
속내를 감추기 위해서.
‘드디어.’
기다리던 순간이 왔다.
***
“잘 보십시오. 이것이 저의 권능이며, 신의 검술입니다.”
검신은 돌연 검을 한 손으로 쥔 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호진에게 들으라는 듯 또박또박 발음했다.
“신검(神劍) 소낙비.”
하늘에 수천 개의 빛의 검이 맺혔다.
푸르른 하늘에서 내리쬐던 햇빛조차 그 빛에 밀려날 지경이었다.
검신의 표정엔 자신감과 더불어 오만함이 깃들었다.
“몸에 새기십시오. 이것이 진정한…….”
“신검(神劍) 소낙비.”
빛의 검이 맺힌 위로 찬란한 황금색 검의 무리가 찬란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 광경에 검신은 순간 얼어붙은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 순간.
─챙강
황금색의 검이 쏟아지며 빛의 검들을 산산조각 내기 시작했다.
반짝이는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빛의 검들.
그것을 부순 황금색 검들은 검신을 향해 무수하게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크윽.”
그것들은 간신히 받아내던 검신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세 번째 검술을 펼쳐냈다.
신검(神劍) 용오름.
마치 중력이 뒤바뀌듯 검신의 주위로 일기 시작한 격렬한 폭풍은 지상의 모든 것을 하늘로 날려 보냈다.
그것은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지는 검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콰직
마지막 소낙비까지 모두 쳐낸 검신의 몸이 비틀거렸다.
그런 검신을 향해 호진은 다가서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진정한, 뭐지?”
“……어째서 당신이 제 신검을 쓸 수 있는 겁니까?”
검신은 분한 듯하면서도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세상에서 잊힌 검술일 터다.
아니, 알려져 있다고 하더라도 누구도 따라 할 수 없어야 하는 검술.
그것이 신검(神劍), 신의 검이다.
검신은 그것을 완벽하게 구사한 호진에게 처음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설마 존재를 지워내는 신검의 오의까지 쓸 수 있는 걸까?’
검신의 사고가 거기에까지 미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지금껏 즐기기만 했던 싸움이 영원한 소멸을 걸고 싸워야 하는 싸움으로 변한 것이다.
‘뭐,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다급해진 검신의 표정을 보며 호진은 옅은 미소를 띠었다.
생각보다 준비한 대로 흘러가는 전투 양상에 호진은 묘한 즐거움까지 느꼈다.
호진은 자신의 즐거움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은 이 감정과 여유로움이 검신에게 더 큰 혼란을 안겨 줄 테니까.
“게일에게 배웠지. 죽기 전에 알려주더라. 그거 알아? 게일의 근원은 모방이었다는 걸.”
“……게일 씨가 제 검술을?”
검신은 작게 중얼거리더니 짐작 가는 부분이 있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원래 거짓말은 진실 속에 숨겨 부풀려야 효과적이다.
지금쯤 검신의 머릿속에는, 기억들과 정보들이 멋대로 조합되어 그럴듯한 가설이 뚝딱 만들어졌을 터였다.
“뭐 어렵긴 했지만, 익히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어.”
이것도 거짓말.
죽도록 어려웠다.
아니 실제로 수백 번쯤 죽어서 겨우 첫 번째 검술 되돌리기와 두 번째 검술 소낙비를 익히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호진은 익숙하게 여유를 연기했다.
블러핑이야 이제 몸에 익을 대로 익은 호진이었다.
“원조라 해서 기대했는데 별거 없네. 고작 내 소낙비에 엉망진창으로 부서지다니.”
“…….”
잊고 있던 것을 상기시켜주자 검신의 몸이 움찔했다.
분명 충격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검술이 다른 이의 모방 따위에 무너져내리는 것은 말이다.
하지만 딱히 호진의 신검이 검신의 그것보다 더 뛰어나기 때문…… 은 아니었다.
호진은 신검 소낙비를 익히며, 기술의 약점을 깨달았다.
원래 약점이란 그것을 파훼하기 위해 노력한 사람만이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니까.
신검 소낙비를 발동했을 때 나타나는 검의 내구도는 생각보다 약했다.
낙하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발생하는 충격에는 처참할 정도로 대비가 안 되어 있다는 말이다.
애초에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가속도가 붙은 황금 검들이 검신의 빛의 검을 분쇄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싸움에서 뒤를 잡혔으면 지는 거지 뭐.’
검신이 소낙비를 쓰는 것을 기다린 것.
오직 그것이 호진이 한 전부였다.
검신은 아직 그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말이다.
아마도 약점을 깨달을 기회가 없었겠지.
눈에 띄게 불안감을 드러낸 검신을 향해 호진은 쐐기를 박기로 했다.
“끝을 볼까.”
신검 멸(滅).
신의 영원함조차 지워내는 기술의 기수식이 호진의 손끝에서 펼쳐졌다.
너무나도 익숙한 그 기수식에 검신은 반사적으로 같은 동작을 취했다.
누가 먼저 펼치냐의 싸움.
검신은 그것을 순식간에 깨닫고 재빠르게 식을 완성했다.
“제가 이겼습니다!”
확신에 차 소리를 지르며 검을 휘두르는 검신은 문뜩 이질감을 느꼈다.
‘기수식이…… 달라?’
신검 멸의 기수식이 아니다.
어느새 호진은 검을 팔 아래로 늘어트린 채 자신의 공격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저 또한 익숙한 준비 자세다.
그것까지 생각이 미친 찰나, 한 줄기의 빛이 검신의 몸을 뒤덮었다.
─콰직
검을 든 팔이 어깻죽지 채 뜯겨나갔다.
하지만 팔은 물론 검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야 당연했다.
자신이 당한 기술은 멸.
불사의 신조차 두려움에 떨 모든 것을 지워내는 소멸의 빛, 그 자체였으니까.
그리고 그제야 깨달았다.
이 기술 또한 자신의 신검이라는 것을.
“……되돌리기?”
“정답이다.”
호진은 지친 표정으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호진은 지쳐있었다.
몸이 아니라 심적으로 말이다.
호진은 방금 죽음의 강에 한쪽 발을 담그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죽었겠지.’
하지만 하지 않아도 죽을 뿐.
즉사기라는 불합리한 기술을 휘두르는 적을 상대론 목숨을 걸고 상대하는 수밖에 없었다.
신검(神劍)의 첫 번째 검술, 되돌리기.
모든 것을 부수는 소멸의 빛과, 모든 것을 되돌려보내는 반격기라니.
모든 걸 뚫는 창과 모든 걸 막는 방패의 싸움을 자신이 선보이게 될 줄은 몰랐다.
호진은 한 줄기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팔 한쪽인가.’
되돌리는 과정에서 힘이 반감되었거나 아니면 반격의 방향이 틀어진 까닭일 터였다.
검신은 뭐가 그렇게 억울한지 입을 벙긋거리다가 물었다.
“……그렇다면 아까 취한 기수식은?”
“속임수인 게 당연하지. 애초에 멸 같은 기술은 쓸 줄도 모른다.”
호진은 굳이 사실을 말해줬다.
그래야 검신이 더 충격에 빠질 테니까.
호진은 게일의 영역 속에서 검신을 만났을 때, 검신의 외모가 어리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리고 지금의 일전으로 확신했다.
아마도 검신은 정신적으로 성숙한 신격이 아닐 것이다.
그는 투쟁과 파괴 외의 모든 것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
마주치는 모든 것들을 날카로운 검으로 베어버리는 검의 화신이 심리전이나 속임수를 중요시할까?
‘검에는 눈이 없다.’
아군도 적도 없이, 이치도 이유도 없이 마주치는 모든 것을 베는 가장 어리석은 신.
비로소 호진은 검신이란 신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기 파멸적이고 유아적이며, 모든 것을 부수고 베는 것으로 해결하는 자.
그렇기에 가장 날카로울 수 있는 자.
‘이대로 무너져 줬으면 좋겠는데.’
호진은 그렇게 생각하며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게일의 검을 든 손에 다른 검의 형상이 맺혔다.
환상 따위가 아닌 호진의 근원이자 본질.
벤다는 말을 물체로 형상화한 마음의 검.
‘마음속에 잘 벼려진 한 자루의 검이 있다면, 손에 쥐어진 것이 나무작대기라 해도 베지 못할 것이 없으리라.’
이전에 얻은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어느새 커진 자신의 격만큼이나 아름답고 예리해진 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그리고 천천히 검신을 향해 내리그었다.
“심검(心劍).”
그러나 검신은 그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하나 남은 그의 손에 새롭게 쥐어진 검.
검신은 그것을 완벽한 순간에 휘두르며 호진의 검을 막으려 들었다.
신검(神劍) 되돌리기.
검신이 자랑하는 무적의 반격기.
멸(滅)조차도 튕겨내는 저 기술을 심검이 베어내기란 불가능하다.
‘다만.’
─후웅
검신의 검이 허무하게 허공을 갈랐다.
호진의 공격이 애초에 없었던 것마냥.
“……무슨?”
검신이 의아해하던 그 순간, 그의 몸에서 피가 솟구쳐 올랐다.
이를 지켜보던 호진이 낮게 중얼거렸다.
“거짓 베기.”
애초부터 그런 뻔한 공격을 내가 해줄 리가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