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신들의 안배 (3)
‘고대신의 힘…… 뭘 말하는 건지 알겠네.’
호진은 재빨리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물건들을 꺼내 들었다.
샴을 잡고 보상으로 얻은 고대신의 파편.
아쉬나학 지하궁전에서 얻은 라멜의 허물.
울그렉 이후트를 잡고 얻은 세상의 이면에 둥지를 짓는 자의 파편.
데니토와 게일과의 싸움 끝에 얻은 불사의 신의 오른손.
그 모두가 고대신들의 신격이 깃들어 있는 물건들이었다.
호진이 지닌 격은 검신의 것과 유사했기에, 굳이 따지자면 선신에 속할 것이다.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고대신으로서의 힘일 터.
호진의 계획은 간단했다.
‘이걸 모두 흡수한다.’
호진은 망설임 없이 고대신의 성물들을 자신의 힘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파스스슥
그것들을 입에 넣고 삼킬 필요는 없었다.
그저 손에 올리고 힘을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와 동시에 호진의 몸을 타고 고대신들의 격이 흐르기 시작했다.
‘집중.’
이대로 고대신들의 격을 놔둘 수는 없었다.
호진은 하나도 빠짐없이 제멋대로 날뛰는 그 격들을 자신의 신격에 닿게 했다.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마치 바다로 흘러 들어가는 강줄기들처럼 호진의 격에 빨려들기 시작한 격들은 금방 잠잠해졌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호진은 확신했다.
그 기운들은 모두 자신의 것이 되었다고.
충만감으로 몸이 떨리고 전능한 감각이 몸을 휘감았다.
‘됐군.’
그렇게 호진이 재차 게이트로 향하려던 그때였다.
─챙그랑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교황청을 두르고 있던 기운이 사라졌다.
그리고.
“교황님…… 눈이?”
“……예?”
교황의 눈이 푸르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호진의 물음에 의아해하던 교황은 순간 몸을 크게 휘청거렸다.
그러곤 버겁게 고개를 들어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눈을 바라봤다.
“하…… 하하…… 하하하하!”
교황은 돌연 기쁘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일행들이 모두 긴장하던 그때 교황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호진에게 말했다.
“걱정했었는데 다행입니다. 제가 그래도 제법 신실했던 모양입니다.”
결계가 사라지는 그 즉시 교황은 병이 발병했다.
그가 여신에게 가장 신실한 신자라는 의미였다.
다만, 지닌 격이 뛰어나기 때문일까, 아니면 본인의 의지가 강하기 때문일까.
교황은 곧장 이성을 잃지 않았다.
그는 크게 기꺼워하며 호진에게 이어 말했다.
“가십시오. 남겨진 이들은 신경 쓰지 마시고.”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여신의 축복이 함께하시길.”
호진은 교황의 말을 뒤로하고 게이트에 손을 올렸다.
아까와 같은 저항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남은 것은 나아가는 것뿐.
그렇기에 호진은 일행들에게 말해야만 했다.
“이 앞부터는 오롯이 저의 싸움이 될 것 같습니다. 대신이라기엔 뭣하지만, 여러분에게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말만 해라.”
도훈이 고개를 끄덕여 다른 사람들을 대변했다.
그들도 알았다.
이 게이트를 넘을 수 있는 것은 호진뿐이리라.
“용재는 강화로. 도훈 씨와 예은 씨는 시리온으로 가 주십시오.”
호진은 그렇게 말하며 게이트를 열었다.
이미 예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이다.
비극은 늘 예상치 못하게 찾아오는 법이니.
“살아서 보지.”
“기다릴게요.”
도훈과 예은은 그렇게 말하며 게이트를 넘었다.
용재는 한숨을 쉬고는 호진을 툭 쳤다.
“끝까지 같이 가고 싶었는데, 안되네.”
“아니, 넌 끝까지 따라올 거야. 네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어.”
“……?”
“그런 게 있다.”
이건 일종의 직감이다.
신으로서의 격이 높아진 이후부터 느낀 확신에 가까운 감각.
신들이 왜 자아도취적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가 갈 지경이다.
호진은 그렇게 말하며 용재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그만 말하고 얼른 가라.”
“잠깐…….”
그 말을 끝으로 용재는 게이트 너머로 밀려 넘어갔다.
남은 것은 자신뿐.
교황은 대성당의 위로 향했다.
무엇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도 교황으로서 책임을 다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끝을 내보자고.”
호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예배당의 안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
─짹짹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호진을 반겼다.
화사한 햇살과 도랑을 타고 흐르는 냇물.
눈에 닿는 곳은 모두 작고 큰 꽃들이 바람에 몸을 흔들며 피어있었다.
그건 흔히들 상상하는 천국, 아름다운 꽃동산의 모습이었다.
“이곳이 여신의 성역인가.”
이제껏 보아왔던 차갑고 기괴하면 위압감만이 존재하던 다른 신들의 성역과는 분명 달라 보였다.
“인기가 많은 여신님은 다르긴 다르군.”
호진은 피식 웃으며 그곳을 거닐기 시작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야트막한 동산의 꼭대기 의자에 앉아 있는 여신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호진 쪽을 응시하는 여신.
호진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걸음을 옮겼다.
얼굴의 표정을 알아볼 만큼 가까워지자 여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잘 오셨습니다.”
“신경 써주신 덕분에 편하게 왔습니다.”
호진이 이를 비꼬자 여신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까. 다행이네요.”
‘역시 이상한데.’
호진은 뺨을 긁적이며 생각했다.
괜한 의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호진은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물었다.
“왜 저였습니까?”
호진의 질문에 여신을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당신이어야만 했으니까요.”
“여신에게 향하는 길. 그 연계 퀘스트를 주셨을 때 저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신격도 얻지 못한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의 가능성을 봤을 뿐입니다.”
여신의 대답에 호진은 더 이상 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거짓말.”
호진은 차가운 얼굴로 비웃고 있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 퀘스트. 제가 신격을 얻은 후에 받았거든요. 정확히는 시리온에서 얼굴 없는 왕과 굴라를 처치한 이후에.”
“…….”
“당신이 모를 리가 없지. 근데 모르고 있네?”
여신의 얼굴에서 자애로운 웃음이 천천히 사라졌다.
무표정을 한 여신을 향해 호진은 다른 이름을 입에 담았다.
“난 그 이유를 알 것 같은데. 안 그래? 검신 샤카하.”
***
잠시 침묵하던 검신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눈치가 제법이네요.”
“처음부터 의심하고 있었을 뿐이야.”
이미 여신은 완전히 자신의 힘에 대한 통제력을 잃었었다.
자아가 남아 있을 수도 있지만, 아닐 가능성이 컸다.
하지만 정작 막상 만난 여신은 너무나 멀쩡해 보였다.
의심이 되지 않을 리가.
“그런가요? 누나를 제법 잘 따라 했다고 여겼는데. 아쉽네요. 뭐 그래도 원하던 대로 당신이 이곳에 왔으니 상관은 없지만요.”
“날 왜 불렀지?”
호진은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물었다.
여신이 자신을 부른 이유는 대충 짐작이 됐다.
이미 감당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검신을 자기와 함께 죽이는 것.
그러기 위해서 호진을 성장시키고, 퀘스트를 통해 이곳까지 이끌었다.
분명 그것이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검신이 여신의 몸을 빼앗고도 퀘스트를 수정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검신이 이곳에 자신을 부를 이유는 도통 짐작 가는 곳이 없었다.
그런 호진의 질문에 검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답했다.
“그야…… 싸워 보고 싶으니까요?”
“…….”
호진은 검신의 말과 행동에서 그것이 거짓이 아님을 느꼈다.
그러기도 잠시 호진은 수긍했다.
인간의 잣대로 신들의 안배를 그리고 그 욕구를 이해하려 하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
“그랬군. 싸워보고 싶었다라.”
“예,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애초에 누나의 몸을 빼앗은 이유도 그뿐이니까요.”
“여신의 몸을 뺏은 게 나와의 싸움 때문이라고?”
호진이 질린다는 듯 묻자 검신은 애매하다는 듯 답했다.
“그렇긴 한데. 꼭 그렇진 않아요. 사실은 게일 씨랑 싸워 보고 싶었는데, 당신에게 당했더라고요.”
“너를 쓰러트렸던 게일 말이지. 그건 복수 때문에?”
“아뇨, 그럴 리가요.”
검신의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흥분과 즐거움이 들어찼다.
“아무리 고대신과의 싸움으로 지쳐있었다 하더라도 게일 씨는 저를 쓰러트렸습니다. 얼마나 흥분되던지…… 봉인되어 있던 내내 다시 싸워보고 싶었거든요.”
그 대답에 호진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미친놈이군.’
머릿속에 든 것은 오직 전투뿐.
죽고 죽이는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강함만이 검신을 이루는 전부였다.
‘검’이란 결국 날붙이이며, 투쟁의 도구.
‘검의 신’의 머릿속에 투쟁밖에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리라.
“그래서 게일 대신에 나를 이곳까지 오게 한 거네. 나와 싸우곤 뭘 할 거지?”
“절 봉인한 형이나 누나들이랑도 싸워야죠. 그리고 보아하니 고대신들이 다시 강해지고 있다던데 그들이랑도 싸우고 싶어요. 아아, 기대된다. 봉인돼 있기를 잘했어.”
이놈은 죽여야 한다.
호진은 그렇게 마음먹었다.
고대신조차, 그 불사의 신조차 자신만의 이상향을 꿈꾸었다.
하지만 검신은 아니었다.
그저 모든 것과의 투쟁.
그 이후의 것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생각지 않고 있었다.
‘이것이 선신들이 검신을 두려워하고 봉인한 까닭인가.’
호진은 그제야 선신들의 선택에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검의 교단을 토사구팽한 놈들이 지금도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분명 선신들의 행동 원리는 인간에 가까운 편이었다.
하지만.
‘이놈은 파괴와 투쟁밖에 바라지 않아.’
검신은 분명 선신들 사이에서 어울리기 어려울 정도로 모난 돌이 분명했다.
선신의 으뜸인 여신의 몸을 강탈하고도 바라는 것은 투쟁뿐이라니.
이야기는 여기까지.
궁금했던 것은 어느 정도 정리됐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뿐이다.
검신이 호진에게 바라는 것도, 호진이 검신에게 바라는 것도 같다.
“준비는 됐어?”
“아직은 조금 부족하지만…….”
여신의 몸으로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하던 검신은 신나 하며 답했다.
“당신을 상대하기엔 충분할 것 같네요.”
“너는 더할 나위 없는 신이구나.”
자기 멋대로 에다가 오만하기까지 한.
호진은 피식 웃으며 게일의 검을 뽑아 들었다.
이를 지켜보던 검신도 밝게 빛을 토해내는 검을 꺼내 들었다.
분명 어디에도 없었는데, 처음부터 그 손에 들고 있었던 것 같다.
놀랄 것도 없다.
그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검이자, 모든 검.
검신은 의자에 일어나며 검을 가볍게 허공에 그었다.
태양처럼 뜨거운 열감이 호진의 몸을 후끈하게 휩쓸고 지나갔다.
방금까지도 아름답게 살랑이던 꽃들도.
도랑을 타고 흐르던 냇물도.
모조리 까맣게 시들고 증발해버렸다.
흡사 사막과 같이.
호진이 들고 있는 검이 별빛이라면, 검신의 손에 들린 것은 태양이다.
너무나 가까워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리는 태양.
호진은 그것을 바라보며 신화 속 파에톤이 몰았다던 태양 마차를 떠올렸다.
“그래 그러시겠지.”
악의 따위는 없을 거다.
단지 아름다운 꽃들과 시냇물 따위는 검신의 입장에선 아무런 가치가 없었을 뿐.
그저 그렇게 태어났을 뿐이다.
모든 것에 호승심과 투쟁심을 지니도록.
그저 모든 가치를 싸움에서밖에 느낄 수 없도록.
호진은 검의 신을 연민했다.
그와 동시에 공감했다.
호진 역시 그랬으니까.
남들과는 유별난 투쟁심으로 인해 다른 이를 상처 입혔고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았었나.
검신과 호진의 차이는 하나뿐이었다.
호진은 그런 투쟁심이 자신을 지배하지 않도록 경계했고, 검신은 그 투쟁심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다는 것.
호진과 검신은 우선시하는 가치가 다르다.
호진은 옅게 미소 지으며 검신을 향해 검을 치켜들었다.
시리도록 차가운 푸르른 기운이 열풍이 몰아치는 세상 속 오롯이 호진의 주위에 머물렀다.
뜨거운 여름, 바다 깊이 잠수한 것과 같은 고적함이 주위에 흘렀다.
다음 순간.
한 줄기의 잔상을 그려내는 푸른 검과 백색의 빛을 토하는 검이 맞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