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화. 신들의 안배 (2)
“제 소개가 늦었군요. 263대 교황, 성 율리아 2세라고 합니다.”
“……?”
호진이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묻는 순간, 눈앞에 상태창이 떠올랐다.
─띠링
「여신에게 향하는 길」
「1─3. 라멜의 사도 ‘심연을 유영하는 자 샴’의 서울 침공 저지하기.」(완료)
「2─1. 대사막 ‘시칸’ 횡단하기.」(완료)
「2─2. 릴리온 성국에서 교황과 만나기.」(완료)
‘……진짜군.’
호진은 상태창 내용을 확인하고 없앴다.
더할 나위 없는 증거를 눈앞에 들이민 까닭에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었다.
“실례했습니다. 이호진이라고 합니다.”
“이…… 호진.”
뭔가 낯설다는 듯 입에서 호진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중얼거린 교황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야말로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호진님. 우선 안으로 드시죠.”
대성당의 문을 열자 따듯한 훈풍이 일행들의 머리를 헝클었다.
─뎅
깊고 청아한 종소리가 정오를 알리며 울려 퍼졌다.
대성당의 밖은 지옥도와도 같은 풍경이었지만, 안쪽은 마치 다른 세계였다.
향기로운 향과 건물을 밝히는 촛불들, 그리고 아름다운 조각들까지 건물의 내부는 평화로움이 간직되어 있었다.
그 신비로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조용히 교황의 뒤를 따르고 있던 그때.
교황이 호진을 향해 살짝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뭐 하나 여쭤도 되겠습니까?”
“편하게 물어보시죠.”
호진은 교황의 물음에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호진 님께서는 어떠한 신이십니까?”
“……!”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표정을 굳혔다.
‘그래서였나.’
아까부터 교황의 깍듯하던 태도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호진의 신격을 꿰뚫어 보고 있었던 것이다.
호진이 침묵하자 교황은 당황하며 손사래를 쳤다.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한 질문을 드렸나 봅니다. 질문은 잊어 주셔도…….”
“그런 건 아닙니다.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호진은 그런 교황의 말을 끊으며 답했다.
그러고 민망하다는 듯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신이라…… 저는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게 무슨……?”
“교황께서는 신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호진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교황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신이란……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살며, 인간이 볼 수 없는 것을 내다보시고, 나아가 전지전능한 위대한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역시 그렇죠.”
호진은 그 말에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저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비록 무신론자였지만, 만약 신이 있다면 그런 존재일 것이라 상상했죠.”
교황의 표정이 약간은 기괴해졌다.
호진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그러나 호진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저는 영원과도 같은 삶을 살지도 않았고, 먼 미래의 일을 내다보지도 못합니다. 전지전능 따위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고요.”
“……!”
교황은 뭔가 이상함을 눈치챘는지 눈이 커졌다.
호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인간입니다.”
“……그게 무슨.”
교황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호진을 살폈다.
교황이 호진의 말을 쉽게 믿기 어려운 것도 당연했다.
그의 눈에는 호진이 지닌 끝도 없는 격이 어렴풋이 보였기 때문이다.
현 인류 중 가장 많은 신력을 보유했을 교황 자신조차 호진 앞에선 새 발의 피에 불과했다.
아니, 설사 비교 대상이 신이라 할지라도.
‘이제껏 보아 온 어떠한 신격보다 격이 높거늘…….’
어떻게 이런 이가 인간일 수 있다는 말일까.
교황의 그런 반응에 호진은 담담하게 말했다.
“굳이 말하자면…… 아직 제대로 된 이명조차 없는 무명의 신. 그저 인간의 눈높이에서 신들의 안배를 깨부수고 있는 자. 그렇게 말할 수 있겠네요.”
***
교황은 잠시 놀란 듯 성당 건물의 벽을 짚고 섰다.
“괜찮으십니까?”
호진의 질문에 교황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럼요. 괜찮고말고요.”
“실망하셨습니까?”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한 신이 왔다고 생각했을 텐데, 실상은 그저 괴물같이 강한 인간이란다.
실망을 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일 터.
호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교황의 얼굴을 힐끔 바라봤지만 이내 움찔했다.
예상과 달리 교황이 너무나도 환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은 것이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고대신이든 아니면 그보다 악한 무엇이든.”
“……어째서죠?”
“제가 호진 님을 반긴 것은 그저 이 교황청의 사람들을, 나아가 인류의 미래 따위를 제가 결정짓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기뻤기 때문이니까요.”
자신이 내린 봉쇄령으로 성국의 많은 시민이 죽어 나갔다.
몸을 짓누르는 책임감과 압박.
호진이라는 규격 외의 존재가 등장함으로써 교황은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설사 그가 세상에 종말을 가져올 존재라 해도 말이다.
“그런데 인류의 구원을 목표로 하는 분이시라니요. 제가 어찌 실망을 하겠습니까. 무엇이든 부탁하시지요. 이 또한 여신께서 제게 안배하신 역할일지니.”
“…….”
호진은 교황의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아무리 교황이라 하더라도 쉬이 견딜만한 압박감은 아니었을 것이다.
성국에 닥친 재앙은 회피할 수도, 항거할 수도 없으며 파멸적이었으니까.
“그럼 바로 부탁을 좀 드려도 될까요?”
“말만 해주시죠.”
“여신님을 뵙고 싶습니다.”
“그건…….”
교황의 표정이 어두워지며 말꼬리를 흐렸다.
그때 청아하고 아름다운 목소리가 대성당에 울려 퍼졌다.
“어려운 부탁은 아니군요.”
호진과 교황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언제부터였을까.
새하얗고 화려한 복식의 여자가 성당 건물의 구석에 서 있었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없었는데.’
호진은 침착하게 검에 손을 뻗으며 상대를 노려봤다.
이에 여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찰랑거리는 금발이 어깨너머로 흘러내렸다.
그 정적을 깬 것은 호진도 여자도 아니었다.
“어째서…… 여신께서 이제서야?”
교황은 극도로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여신?’
호진의 시선을 받은 여자가 싱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예, 제가 당신이 찾던 그 여신입니다.”
***
“여신이라고?”
호진의 물음에 여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찾아오셨습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으셨군요.”
“무슨 소리를…….”
“선신과 고대신의 힘을 모두 지닌 당신이라면 가능할 겁니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해 주시죠.”
호진이 인상을 구기던 그때였다.
“그럴 시간은 없군요.”
그녀가 웃으며 성당의 밖을 가리키는 그 찰나 무언가 금이 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쩍
빙하에 금이 가는 듯한 소리에 호진의 시선이 자연스레 그곳을 향했다.
은은한 금빛으로 교황청을 둘러싸고 있던 결계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이게 뭐 하는…….”
호진이 고개를 돌린 그곳엔 이미 여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다만 그녀의 희미한 음성만이 남아 성당 내부에 울려 퍼질 뿐이었다.
호진은 소리 나게 혀를 차곤 교황을 돌아봤다.
물어볼 것이 많았다.
두 세계를 연결한 이유가 무엇인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앞으로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말도 안 하고, 이렇게 사라지다니.
연달아 일어난 일들에 교황은 넋이 나간 듯 깨져가는 결계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교황에게 다가가 호진은 다가가 말했다.
“여신을 직접 만나야겠습니다.”
방금의 그것은 일종의 환영 혹은 에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그녀를 직접 만나야 했다.
“교황님.”
호진은 목소리에 신격을 담아 말했다.
─우웅
성당이 작게 진동하고 교황의 흔들리던 시선이 돌아왔다.
간신히 침착한 교황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모든 것은 여신님의 뜻. 제가 그분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방향타를 놓쳤다 할지라도, 이 또한 여신님의 안배이겠지요. 따라오십시오.”
교황은 그리 말하며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그를 따라 일행들은 빠르게 대성당의 지하를 향했다.
─웅성웅성
불안에 떠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래로 향할수록 수많은 인파가 두려움에 떨며 신께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결계가 곧 깨진다! 사제들과 기사들은 1층으로!”
“교황님, 어디 계십니까!”
밖의 소란으로 시민들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교황은 그들의 부름을 외면한 채 그대로 지나쳤다.
갈색 로브를 깊게 눌러써 얼굴조차 가린 채로.
이에 호진은 서두르면서도 조심스레 물었다.
“괜찮겠습니까?”
교황은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지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달콤하고 거짓된 위로가 아닌, 실질적인 구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가 아니라 당신께서 주실 수 있는 것이겠지요.”
“…….”
여신과의 승부가 끝날 때까지 교황청이 무사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호진은 그것을 굳이 입에 담지 않았다.
교황이라고 그 사실을 모르는 것은 아닐 것이었기에.
잠시 뒤 도착한 지하의 공간.
그곳에는 작은 예배당과 문이 있었다.
교황은 인장을 들고는 예배당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 인장은…….”
익숙한 인장의 모습, 그것은 육망성이 새겨진 옥새와 똑 닮아 있었다.
호진의 물음에 교황은 의아한 표정으로 답했다.
“알아보시는군요. 오래전 선신들을 섬기던 비밀단체의 문양입니다. 사오백 년 전까지만 해도 각 왕국의 왕족들을 중심으로 단체가 유지된 모양입니다만, 현재는 그 존재의의조차 불분명하지요.”
“그렇습니까.”
호진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추 이해가 갔기 때문이었다.
시리온의 왕가의 묘소, 아쉬나학의 지하궁전.
그곳들에 숨겨져 있던 방은 모두 검의 교단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선신들과 그들을 섬기는 왕가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게 꾸준히 경계해 왔을 것이다.
그런데 여신의 성역에 검의 교단을 경계하는 인장이 새겨져 있다.
그것이 의미하는 하나뿐이다.
‘검신의 봉인. 그걸 여신이 지니고 있었나.’
호진은 한숨을 쉬며 납득했다.
그간의 일들이 하나로 이어지는 기분이었다.
퀘스트 상태창의 인도.
그것은 여신이 호진의 진로를 유도한 것이다.
그가 검의 교단에 대한 지식을 얻고, 신격을 얻고, 결국 이곳까지 향하도록.
─우웅
열린 예배당의 안쪽은 무저갱과 같이 깜깜하기 그지없었다.
호진이 손가락을 대자 끈적거리는 느낌이 묻어났다.
마치 예전에 하얀 가면이 강화도에 연결했던 차원문처럼 말이다.
─키잉
게이트를 향해 발을 내디디던 호진의 몸이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뒤로 밀려났다.
“설마 형……?”
“음…… 들어갈 수 없는데?”
용재의 질문에 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어, 어쩌지요?”
그 대답에 교황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여기까지 와서 막힐 리가 없다.
게이트를 앞에 두고 고민에 빠진 호진은 이윽고 방금 전 여신의 말을 떠올렸다.
‘선신과 고대신의 힘을 모두 지닌 당신이라면 가능할 겁니다.’
호진이 선신도 고대신도 아닌 인간이라서가 아니다.
선신과 고대신의 힘을 모두 지닌 자이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했다.
‘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는 조건을 말하는 것이겠지. 그렇다면…….’
호진은 재빨리 자신의 인벤토리를 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