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화. 신들의 안배 (1)
“정말 군대가 없어도 되겠습니까?”
아르바흐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자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저희는 성국과 전쟁을 하러 가는 것이 아닙니다. 병에 걸린 사람들을 전부 죽이러 가는 것도 아니고요.”
확신은 아니지만, 짐작이 가는 바가 있다.
광증의 원인이 여신에게 있으니 만약 그녀가 사라진다면 병에 걸린 이들은 어찌 될까.
어쩌면 증상이 사라질지도 몰랐다.
“최소한의 인원으로 가도록 하겠습니다.”
호진의 뒤로 도훈과 용재 그리고 예은이 섰다.
이에 아르바흐는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같아선 저 혼자라도 따라가고 싶지만…….”
아르바흐가 힐끔거린 곳엔 여섯 가주가 귀신같은 표정으로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만약 아르바흐가 호진을 따라가겠다고 한다면 그들도 따라나설 터였다.
애초에 그들이 아니더라도 아르바흐는 한 나라의 왕이었다.
그가 가장 우선시하는 것은 시민들의 안전이기에, 처음부터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어쩔 수 없지요. 그럼…….”
아르바흐는 소중히 안고 있던 회색의 천으로 꼼꼼하게 감싼 길쭉한 꾸러미를 호진에게 건넸다.
호진은 그것을 소중히 받아들고는 조심스럽게 천을 걷어냈다.
그 안에는 검은색 검집에 담긴 한 자루의 롱소드가 있었다.
“이것이…… 게일의 검이군요.”
“검집은 고룡의 가죽으로 만들었답니다. 뽑아보시죠.”
왠지 뿌듯해하는 아르바흐에게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인 호진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부러져 두 조각이 되었던 검은 다시 한 자루의 검이 되어 있었다.
검은 처음부터 부러진 적 따위는 없었다는 듯 차갑게 빛났다.
은백색으로 은은하게 빛을 뿌리는 검신을 보자, 호진은 무엇이든 벨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웅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검을 쥐고 가볍게 휘둘렀다.
이에 허공이 갈라지며 미세한 틈이 생겨났다.
그저 가볍게 휘둘렀을 뿐인데 공간을 벤 것이다.
“믿기지 않는군요.”
호진은 천천히 도신에 파인 홈을 따라서 새겨진 룬문자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한 자 한 자가 손을 타고 뇌리에 새겨졌다.
의미는 모르겠지만, 마치 검과 공명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노야의 전언입니다. 그 검에는 이자리온 여신님의 뜻과 힘이 깃들었다더군요. 노야가 시작의 불꽃을 통해 여신의 목소리를 들었답니다.”
“이자리온…… 그분께서 정확히 뭐라고 하시던가요?”
“호진 님에게 미안하다고. 동생들을 잘 부탁한다고 하셨답니다.”
호진은 잠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검신과 여신.
이자리온이 말하는 것은 그 둘일 터였다.
‘검신을 봉인한 것은 얀, 즉 선신들이었을 텐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검신을 봉인한 것은 그들이었다.
설마, 일이 이렇게 된 것을 후회한다는 것일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보이지도 않는 곳에서 인간들의 운명을 결정하고 정해놓는 신들이다.
하지만 정작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에 대해 한 치 앞도 알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웃음이 나지 않을까.
결국 신이란 것도 멀리서 보면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다.
적어도 호진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울타도, 여신도, 불사의 신도 모두 똑같다.’
그들은 인간들의 머리 위에서 신탁을 내리고 힘과 은총을 내리며 그들의 운명을 좌우하고, 미래를 결정짓는다.
자신들이 생각한 미래를 향해 나아가게 한다.
그러나 호진은 더 이상 그들의 손에 인간들이 놀아나는 것을 볼 수 없었다.
깨닫지 않았다면 몰라도 세상이 어항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버린 이상, 몸부림치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호진은 차갑게 웃으며 아르바흐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하지요.”
부탁을 받아서가 아니다.
호진은 처음부터 여신과 만나고 끝을 맺어줄 생각이었다.
‘그 이후의 일은…….’
잠시 울타와의 대화를 떠올리던 호진은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지웠다.
어찌 됐든 여기서 멈춰 서 있을 수는 없었다.
“출발하겠습니다.”
“몸 조심히 다녀오시길.”
아르바흐의 인사를 뒤로하고 호진과 일행들은 성국의 심장으로 향했다.
***
성국의 수도 브리츠.
그 중심에 위치하는 교황청의 정문에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새하얀 수단 위에 하얀 어깨 망토를 두른 성스러운 예복이 그의 직위를 나타내 주었다.
그를 발견한 성기사 하나가 눈을 크게 뜨며 그를 보호하고 섰다.
“교황 예하! 위험합니다. 어서 안으로 드시죠.”
“안쪽이라고 뭐가 다를까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차분한 교황의 말에 성기사는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했다.
그저 교황을 따라 교황청을 둘러싼 담을 바라볼 뿐이었다.
─크르르르륵
─쾅! 쾅! 쾅!
교황청을 둘러싼 노란색의 결계 밖으로 푸른 눈의 사람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짐승처럼 침을 흘리고 주먹의 뼈가 으스러지도록 방벽을 두드려댔다.
목표는 오로지 하나, 결계를 부수고 안에 있는 사람들의 피와 살을 뜯는 거였다.
“푸른 미치광이 병이라…….”
이제 와서 숨기려 들어봤자 무엇하리.
병은 신실한 신자일수록 빠르게 발병했다.
즉, 방벽 앞에 선 저들이야말로 여신을 진정으로 섬기는 종들일지니.
‘불쌍히 여기소서.’
다만, 그것을 깨닫는 게 늦어진 것은 교황청 안의 사람들이 발병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성국의 교황청은 선신들의 은총이 내려진 곳.
그렇기에 외부의 적은 물론 내면의 혼란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아이러니입니다.’
교황은 쓰게 웃음 지었다.
가장 먼저 병에 걸렸어야 하는 자신은 교황청 안에 머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아직 병에 걸리지 않았다니.
그래서 호기심이 들었다.
만약 결계 밖으로 나선다면 자신에게도 푸른 미치광이 병이 발병할 것인가.
‘다른 이들보다 늦게 발병한다면 그건 정말 부끄러운 일이겠지요.’
자신의 신실함을 늘 부족하다고 여긴 교황이기에 영 자신이 없었다.
만약 방벽이 깨진다고 하면 가장 먼저 죽고 싶었다.
그러면 변명이라도 되지 않겠는가.
‘목이 졸리고 눈이 파이려나요. 그래도 괜찮습니다. 사지가 뜯긴 채로 죽어가는 마지막까지 사람들을 따스하게 품을 겁니다. 그러면 나중에 여신님 앞에서 조금은 당당할 수 있겠죠.’
교황은 그렇게 남들이 알면 기겁할만한 자기 파괴적인 상상을 이어 나갔다.
이런 혼란 속에서 죽음을 상상하고 곱씹는 것만큼 무의미하면서도 달콤한 것은 없으리라.
교황은 생각했다.
자신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상상하는 그런 인격자가 되지 못한다고.
그저 남들보다 신력이 뛰어나다는 것 말고는 그는 평범한 사람도 되지 못하는 겁쟁이였다.
‘그나마 장점이던 신력도 이젠…….’
여신의 온화하고 자비롭던 기운에 차갑고 혼탁한 기운이 섞여 들어왔다.
분명 이것이 사람들에게 광증을 일으키는 이유다.
그리고 이런 상태로는 어떤 축도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자신은 쓸데없어졌다는 말이었다.
‘저는 누군가에게 해결책을 제시하지도, 여신께 도움이 되지도 못합니다.’
그저 교황청이라는 작고도 불안정한, 종국엔 파멸이 예정된 요람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미안한 일이었다.
자신을 막아서는 이 성기사들도.
안쪽에서 신들에게 기도를 올리는 사제들도.
교황청으로 피난해온 시민들도.
모두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지만 정작 교황은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어찌 미안하지 않을까.
교황이 그렇게 생각을 이어 나가던 중이었다.
“……저게 뭐야.”
한 성기사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주변의 사람들은 모두 그 소리에 반응해 고개를 들어 올려 성기사의 시선을 쫓았다.
그 목소리에 담긴 경악과 떨림이 너무 생생했기에.
‘드디어 방벽이 깨지기라도 한 걸까요.’
교황은 묘하게 들뜬 기분으로 고개를 돌린 그때였다.
“음?”
교황은 자신도 모르게 의문을 토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눈으로 보고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광경에 반사적으로 나온 반응이었다.
교황청의 정문에는 큰 대로가 있었다.
일면 ‘여신에게 향하는 길’이라 불리는 그 대로는 종교 행사 때 참배와 행렬을 위한 길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저벅 저벅
몇 명이 그 길을 따라 교황청을 향해 곧장 걸어오고 있었다.
아직 멀리 있었지만 그들은 역병에 걸린 사람들이 아니었다.
병에 걸린 이들은 흡사 늑대를 만난 양이라도 된 듯 그들이 지나감에 거리를 벌리고 납작 엎드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적막에 빠져버린 교황청의 안에 한 줄기의 빛과 같은 노크 소리가 울려 퍼졌다.
“문 좀 열어주시죠. 좋은 말씀 전해드리려고 왔는데요.”
“아…….”
교황은 탁해진 신력으로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곳에 서 있는 자는 신의 위에 다다른 이라는 것을.
교황에게는 그 노크 소리가 천국의 종소리처럼 들렸다.
***
─덜컹
굳게 닫혀 있던 철문이 둔탁한 소리를 내며 열리기 시작했다.
호진은 자신의 위압을 조금 더 세밀하게 사용해, 주변에 몰려들었던 푸른 미치광이 병에 걸린 사람들을 교황청으로부터 떨어트렸다.
덕분에 교황청의 문이 열려도 안으로 따라 들어오는 이들은 없었다.
“들어가죠.”
호진이 앞서 걸음을 옮기자 그 뒤로 일행들이 따라 들어왔다.
그런 그들을 가장 먼저 반긴 것은 하얀 예복의 사제였다.
사제는 철문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헐레벌떡 뛰어 내려오며 활짝 웃었다.
“어서 오십시오! 형제자매님들. 환영합니다.”
뭘까.
분명 호진이 본 교황청과 성국의 상황은 상상 이상으로 최악이었는데.
이 사제는 왜 이렇게 신나 보이는 걸까.
호진은 티 나지 않게 표정을 관리하며 그의 인사를 받았다.
“환영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반가워해 주실 줄은 몰라서 조금 놀랐습니다.”
만약 경계를 하느라 문을 안 열어주면 어쩌나 고민했었는데 말이다.
곱게 문을 열어준 덕분에 서로 귀찮은 일을 덜었다.
그런 호진의 말에 사제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뇨, 아닙니다. 당연한 일인 걸요. 여기서 이러실 게 아니라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그럴까요?”
호진은 사제의 과한 친절에 의아해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남부연맹의 맹주니, 어디의 왕이니 하면 이런 대접을 받기도 했지만, 일반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대접은 아니었다.
잠시 고민하던 호진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렴 어때.’
어차피 목표는 교황과 만난 후에, 여신과 조우할 수 있는 방법을 듣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하얀 예복의 사제를 따라 올라가던 호진은 그제야 허겁지겁 뛰어 내려오는 성기사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위험하십니다! 거리를 두시지요!”
‘저게 정상적인 반응이지.’
호진은 그런 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사제를 보호하며 서는 기사들을 보며 새삼 놀랐다.
‘꽤 높은 사람인가?’
워낙 철이 없어 보여서 높은 사람일 거라고 생각지 못했다.
“아아, 괜찮습니다. 여러분. 귀인들이시니 제가 직접 안내토록 하겠습니다. 물러들 가셔도 좋습니다.”
“그게…….”
“어서요.”
사제의 말에 쩔쩔매던 성기사들이 좌우로 비켜섰다.
그와 동시에 호진 일행들을 향해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생각보다 더 높은 사람인가 본데.’
호진은 그 모습에 움찔하면서 사제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얼마나 따라갔을까, 거대한 순백의 문 앞에 다다른 사제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 왔습니다. 여기가 교황청의 산 베네딕토 대성당입니다.”
‘아차.’
교황을 만나려면 대성당이 아니라 궁전으로 가야지 않나.
호진은 그제야 자신이 방문 목적도 말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말씀을 드리는 게 늦었습니다만.”
“네, 편하게 말씀해주시죠.”
“혹시 교황께서는 이 안에 계신 겁니까?”
“예?”
잠시 멍한 표정을 짓던 하얀 예복의 사제는 곤란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제 소개가 늦었군요. 263대 교황, 성 율리아 2세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