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교섭 (3)
“가기 싫어…….”
“충분히 쉬었잖아.”
“으어어어어.”
호진은 침대에 매달려 꼼짝도 하지 않는 용재의 뒷덜미를 낚아채 잡아끌었다.
마치 5성급 호텔을 방불케 하는 편안함 속에서 호진과 일행들은 오랜만에 긴 휴식을 취했다.
큰 부상을 입었던 예은도.
오랜 기간 사선을 넘는 전투를 반복해온 용재와 도훈도.
이제는 몰라보게 바뀌어버린 시리온에서 일주일 가까이 휴식을 취했다.
높이 솟아오른 건축물들과 잘 정돈된 도로와 설비들.
자급자족이 가능하면서도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시민들을 안전하게 보호할 성벽까지.
이미 예전의 황폐했던 공국 시절의 잔해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호진만큼은 꾸준히 왕실의 연병장을 빌려 검을 휘둘렀지만, 그런 호진에게도 이런 휴식 시간은 꼭 필요한 것이었다.
신격이 온몸에 충만했고 피로에 절어있던 머리도 개운해졌다.
한동안 관리하지 못했던 머리와 수염도 멀끔히 정리했고 갑옷과 무기도 솜씨 좋은 난쟁이 대장장이들에게 관리받았다.
사소한 것들이지만 그런 사소함이 모여 컨디션을 좌우하기 마련이다.
한마디로 지금 호진의 컨디션은 최고였다.
그건 도훈과 예은도 마찬가지.
오직 용재만은 침대에 매달려 게으름을 피웠지만, 그렇다고 신경 써줄 호진이 아니었다.
“……이건 납치 아니야?”
“내가 여기 왕이잖아. 누가 뭐라 하겠어.”
이불에 돌돌 말린 채 호진의 어깨에 올려진 용재는 꿈틀거리며 말했다.
“하긴, 근데 이건 이것대로 편하긴 하…….”
─휘익
호진은 용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게이트 안으로 던져 넣었다.
이를 지켜보던 아르바흐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용재님 취급이 조금 너무하지 않습니까?”
“잰 딱 저 정도가 좋습니다.”
“……하긴 묘하게 즐기는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
아르바흐는 고개를 끄덕이며 호진의 뒤에 섰다.
도훈과 예은은 물론 아까 전부터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그럼 가 보죠.”
쉬기도 푹 쉬었고, 무엇보다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동부 왕국의 이들과 약속한 시간이 됐기에.
***
성국과 동부 왕국을 잇는 왕국 엑시아의 관문 데크령 성 앞.
거대한 진영이 구축된 그곳엔 세 명의 왕이 모여 있었다.
“더 기다릴 수는 없습니다!”
“동의합니다.”
제국과 인접한 위셔시크.
지형의 대부분이 산악으로 이루어진 케모어.
동부 왕국에서도 동쪽 끝에 위치한 파타르잔.
성국과의 전쟁을 택한 동부 왕국 군주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위셔시크의 왕 아리엔 아누 데보라는 웃으며 다른 두 왕을 달랬다.
“자자, 아직 약속한 시간이 지나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시죠.”
“아니! 그렇겐 못 하겠소. 애초에 남부연맹의 맹주니 뭐니 그런 허황된 이야기를 믿은 게 문제요.”
─쾅!
성미가 급하고 호전적이기 유명한 전사들의 나라 케모어의 왕은 주먹으로 탁자를 쪼개버렸다.
파타르잔의 왕은 그런 케모어 왕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동의를 표했다.
그는 검은색의 동공으로 차분하게 아리엔을 응시했다.
“저도 믿기 힘들군요. 무엇보다 시간을 끌수록 저희에게 좋을 게 없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아리엔은 손수건으로 두툼한 볼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물론 두 왕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남부연맹의 맹주 호진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이 주가 넘도록 엑시아와 대치를 했다.
그 결과 친 성국 국가인 엑시아의 왕은 물론 엘프들의 나라 라일니에의 왕까지 이곳으로 군대를 끌고 행차할 시간을 줘버렸다.
싸운다면 엑시아와 라일니에의 군대가 더 모이기 전, 적의 방비가 더 굳혀지기 전에 쳐야 한다.
그것이 케모어와 파타르잔 왕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아리엔의 생각은 달랐다.
‘그렇게 하기엔 너무 늦었어.’
물론 전쟁을 한다면 이기기야 하겠지만, 성국을 치기도 전에 이렇게 힘을 빼서야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무엇보다 아리엔은 직접 보지 않았는가.
‘결코 뜬구름 잡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남부연맹을 단신으로 만들어낸 패자 이호진.
그의 소문은 부풀려진 전설이나 선전 따위가 아니었기에.
아리엔은 그에게 모든 패를 걸었다.
그렇게 막사 안에서 어색한 침묵이 감돌던 그때였다.
“폐, 폐하! 밖으로 나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경비병이 급히 부르는 소리에 세 왕은 벌떡 몸을 일으켜 밖으로 향했다.
“적습인가?”
“젠장, 그러니까 우리가 먼저 쳐야 했다니까!”
그렇게 그들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며 밖으로 나왔을 때 본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꿈틀
푸른색의 게이트와 그 앞에 떨어져 있는 건 이불에 감싸진 애벌레. 아니, 사람 하나.
“아야야. 그걸 냅다 던지네. 아! 저번에 봤던 아저씨다.”
이불에 둘러싸여 꿈틀거리는 용재가 웃으며 아리엔에게 아는 척을 하자, 다른 두 왕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아는 사람이오?”
“음…… 기억이 나질 않는데…….”
아리엔은 애써 용재를 외면했다.
차마 용재가 호진의 가신이라는 이야기를 입에 담을 수 없었기에.
하지만 파타르잔의 통찰력은 생각보다 예리했다.
“검은 눈에 검은 머리. 설마 저자가 남부연맹의 사람입니까?”
텄다.
이렇게 물어보면 얼버무릴 수가 없었다.
아리엔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습니다.”
“허.”
“아니, 저런 꼬라지로 무슨…… 하아.”
두 왕은 역력히 실망한 표정을 드러내며 한숨을 쉬었다.
아리엔은 그저 입을 꾸욱 다물 뿐이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던 찰나.
─저벅 저벅
다시 한차례 푸른 게이트가 일렁이며 다른 인형들이 그곳으로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케모어의 왕은 비꼬듯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오기는 온 모양이구만. 어디 허풍쟁이 왕의 낯짝 좀 봐볼까.”
“가신이 저 모양이니, 기대도 안 되는…….”
파타르잔 왕은 말을 더 이상 잇지 못했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도 까먹은 까닭이다.
케모어의 왕 역시 마찬가지다 웃던 표정은 고장이라도 난 듯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화악
주변을 둘러싼 공기가 변했다.
나무도 돌도 하늘에 떠오른 해마저도, 마치 이곳을 향해 시선을 주목하는 것 같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감각 속에서 한 사람이 유유하게 게이트를 넘어 걸음을 내디뎠다.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동공.
등에는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은 푸른 대검을 메고 있다.
그 자리에 모인 모두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저 사람이 소문의 그 왕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한 무리의 사람들이 따라 나왔다.
강한 기세를 뿜어내는 활을 맨 여인과 두꺼운 군복 아래 무기를 숨긴 남자 하나.
그리고 고룡을 탄 난쟁이 왕과 그를 따르는 황금색 갑옷으로 전신을 가린 난쟁이군단까지.
“저들이 남부연맹…….”
파타르잔의 왕은 자신도 모르게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것이 반응의 전부.
그 압도하는 감각에 누구 하나 쉬이 입을 열지 못했다.
─꿀꺽
‘상상 이상이다.’
심지어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있던 아리엔조차 마른침을 삼킬 뿐 호진에게 쉽사리 말을 건네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그들을 향해 호진이 다가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자신을 소개했다.
“못 보던 분들도 계시는군요. 반갑습니다. 남부연맹의 이호진입니다.”
“반갑…… 습니다.”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케모어와 파타르잔의 왕들은 반사적으로 인사를 받았다.
그런 그들을 보며 아리엔은 확신했다.
제국도 성국도 아니다.
지금 잡아야 할 것은 이들, 남부연맹의 손이었다.
***
호진의 주최로 동부 왕국 5인의 왕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 중 더 이상 호진과 남부연맹의 힘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 모두가 훌륭한 왕의 재목이라 보기는 어려웠지만, 각자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자들이다.
본인의 무력이든, 정치적 안목이든.
그것도 아니면 뛰어난 가신의 조언이든.
각기 다른 이유로 왕들은 호진이 이 사태를 결정지을 자라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왕들의 주목을 받으며 호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성국은 이미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어느새 공손해진 파르티잔의 왕이 조용히 손을 들며 물었다.
이에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호진은 그들에게 성국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성국이 봉문을 한 이유는 여신의 잠적 때문이었으나, 지금은 역병으로 인해 피폐해져 있고.
나아가 성국의 관문 카난은 이미 이단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는 것까지 말이다.
“……그래서 지금 카난의 시민들은 지금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난민들을 수용해줄 수 있겠습니까?”
“역병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성국과 가장 가까운 엑시아의 왕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쉽게 설명드리기 위해 역병이라고 했으나. 이미 여러분들도 아시는 병입니다. 푸른 미치광이 병이 그것입니다.”
“……푸른 미치광이 병.”
몇몇 왕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특히 엑시아와 아리엔이 말이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던 호진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엑시아와 아리엔에서도 꽤 발병했죠. 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야 간단합니다.”
“설마.”
눈치 빠른 아리엔은 무언가 눈치챈 듯 낮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의심에 호진이 방점을 찍었다.
“그 병이 발병한 환자들의 공통점은 하나뿐입니다. 모두 신실한 릴리 여신의 신도들이라는 것.”
호진의 말에 왕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허어.”
“설마, 그럴 리가…….”
쉽게 믿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하지만 증거가 너무나 뚜렷했다.
실제로 다른 신들을 숭배하는 다른 국가들은 대부분 문제가 없었다.
바룩크툼은 물론 시리온과 아쉬나학 그리고 동부 왕국의 다른 세 국가들도 마찬가지.
문제가 있는 것은 오직 국교를 여신으로 지정한 국가들뿐이다.
“지금의 성국은 분명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그것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필요하면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호진은 담담하게 말하자 동부 왕국의 왕들은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친 성국 성향의 왕들도 더 이상 성국의 편을 들 수 없었다.
적막이 흐르던 중 아리엔이 물었다.
“그렇다면 제국은 어찌 되는 겁니까?”
“아, 그러고 보니 시리온이…….”
동부 왕들에게도 세계 각지에 퍼진 눈과 귀들이 있었다.
예전만큼 원활하지는 않더라도 제국의 강철 함대가 이주 전에 시리온 연안으로 향했다는 것쯤은 파악할 수 있었다.
왕들의 얼굴에 호기심, 걱정 등이 내걸렸다.
“그것이라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호진이 도훈에게 눈짓하자 도훈이 무언가를 가져오더니 펄럭이며 펼쳐 들었다.
푸른 사자가 그려진 거대한 군기.
왕들 중 그 군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건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단 중 하나이자 제국의 무력을 상징하는 집단의 깃발이었으니.
“푸른 사자 기사단……!”
“설마 제국을?”
왕들이 경악하자 호진은 말을 덧붙였다.
“제국을 적으로 돌린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오해해서 시리온의 영토를 밟았었고, 잘 설명해서 화해했습니다. 이 깃발은 화해의 증표로 받은 것이죠.”
왕들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그들은 제국의 방식을 알고 있다.
제국은 논리가 통하는 집단이 아니다. 최소한의 명분만 있으면 어떻게든 실리를 챙기는 자들이지.
‘제국이 오해를 했다고 화해를 요청해? 심지어 군기를 바쳐가면서?’
그럴 리가.
차라리 해가 서쪽에서 뜬다는 것이 더 믿음이 갈 것이다.
아리엔의 입꼬리가 찢어지게 벌어졌다.
역시 눈앞의 남자, 호진은 제국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자다.
그가 제국에게 어떤 ‘설명’을 했는지, 아리엔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리엔은 왕국의 명운을 그와 함께하기로 마음먹었다.
“저희 위셔시크는 남부연맹과 함께하겠습니다.”
그 말에 눈이 크게 떠진 다른 왕들.
하지만 그들도 이내 앞다투어 호진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들은 만장일치로 이곳에 모인 병력들로 호진을 지원하겠다고 했다.
이에 호진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저희 남부연맹과 뜻을 함께해 주신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만…….”
“……?”
“성국에 가는 것은 저 혼자로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