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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233화 (233/241)

233화. 교섭 (2)

“시리온과 신 아쉬나학의 통치자이자 남부연합의 맹주. 그게 나다.”

푸른 사자 기사단장 라인하르트는 그제서야 머릿속에서 지우고 있던 한 이름을 떠올렸다.

불현듯 나타나 왕을 자처한 자.

‘아아, 그랬지. 이름이 분명…….’

이호진.

그게 그의 이름이었다.

분명 사람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거짓된 선전이라고 믿었다.

바룩크툼의 난쟁이들이 시리온과 아쉬나학을 지배하기 위한 허수아비 왕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실존했었나.’

라인하르트는 떨리는 몸을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얼마나 강한 걸까.

소문대로 그의 일검에 산이 무너지고 하늘이 갈라지는 걸까.

그럴 리가 없다.

인간의 몸으로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왜일까.

부정하는 자신의 머리와는 달리 몸의 떨림은 멈출 줄 몰랐다.

호진은 라인하르트를 향해 한 발 내디디며 말했다.

“우리 쪽의 명분은 충분하다. 목 위에 달린 것이 장식이 아니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겠지.”

“…….”

“소문을 듣자 하니 제국 황제는 이런 일을 벌일 만큼 과감하지도, 욕심이 있지도 않다던데.”

“……무, 무엄하다!”

“누군가 부추기고 있군. 황제를 사탕 발린 말로 구워삶으면서 말이지.”

“……!”

라인하르트는 답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으니까.

고대신들의 준동과 그 숭배자들의 만행.

그리고 몬스터들의 침입과 푸른 미치광이라 불리는 역병까지.

제국이 혼란스러운 틈을 타, 일부 귀족파 세력이 권력을 잡았다.

그들은 이번 사태가 황제의 권력을 줄일 기회라 여겼다.

‘권력에 눈이 먼 돼지들.’

분명 살로 뒤덮인 그 옹이구멍 같은 좁은 시야로는 볼 수 없는 거겠지.

작금의 위험은 분명 제국을 무너트릴 만한 것이지만, 아직도 그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라인하르트는 그런 돼지들과는 달리 현실을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망해 버리라지.’

황제파가 권력을 잡든 귀족파가 권력을 잡든 오랜 기간 제국에서 푸대접을 받아온 군부의 명가 라인하르트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런 그가 이번 전쟁을 부추기는 귀족들의 편에 서 시리온에 온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이곳이 소문대로 평화롭고 풍요로운 땅이라면…….’

그렇다면 이 땅을 손에 넣어 라인하르트가(家)의 직속령으로 만든다.

이곳에 파견된 4군단.

그리고 제국에 아직 남아 있는 5군단과 6군단까지

풍전등화 같은 시리온의 군대와는 달랐다.

제국을 뒤흔들 만큼의 군대가 자신의 휘하에 있다.

마음만 먹고 기반만 충분하다면 이곳에 공국의 형태로 자치령을 만들 수도 있을 터.

그렇게 한다고 해도 썩어빠진 제국의 돼지들과 허수아비 황제는 분명 꿀 먹은 벙어리들 마냥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제야 깨닫겠지.

이제껏 손아귀에 쥐고 있던 군부의 목줄을 너무 많이 풀어줬다고.

‘분명 이번 출정은 그 시작이 되었을 터인데…….’

라인하르트는 등허리에 흐르는 땀을 느꼈다.

몸이 차갑게 식어 그 느낌이 더욱 생생했다.

전쟁을 속행해도 되는 걸까.

호진이라는 이 자는 전쟁에서 얼마큼의 변수가 될까.

분명 혼자서는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기사단 전부를 동원한다면 어떨까?

제국의 다른 기사단들이라면 몰라도 푸른 사자 기사단만큼은 자신의 가문에서 돈을 퍼부어 가며 전력을 유지했다.

제국에서 제일가는 기사단이라는 위명이 괜히 붙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렇지만 왜일까.

라인하르트는 호진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의 고민이 길어지던 그때였다.

“생각이 많은 모양이네.”

마치 자신의 머릿속을 읽은 것 같은 그의 말에 라인하르트는 몸을 크게 움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호진은 천천히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분명 고민이 길어지는 건 가지고 있는 정보가 불확실하기 때문이겠지.”

호진의 시선이 어딘가에서 멈춰 섰다.

라인하르트의 눈도 반사적으로 그 시선의 끝을 쫓았다.

그곳에 있는 것은 다름 아닌.

‘군선?’

제국이 자랑하는 강철 함대 수백 척.

바다를 가득 메운 군선들이 라인하르트의 눈에 들어왔다.

그때였다.

가벼운 미풍과 같은 기운이 라인하르트의 머리를 헝클이며 지나간 것은.

그 바람에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가 뜬 라인하르트는 돌처럼 굳어 버렸다.

─스륵

하늘의 구름 사이로 황금색으로 번쩍이는 셀 수 없는 검들이 수 놓여 있는 장관.

“저, 저건?”

몇몇 기사들과 병사들도 그것을 눈치챘는지 점점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말들도 본능적으로 두려움에 떨며 바다에서 멀어지고자 몸부림을 쳐댔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콰지직!

검 하나가 떨어지며 배의 메인 마스트를 산산이 부수고 바다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쾅! 콰과과과곽! 쾅!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검의 비가 쏟아져 내렸다.

군선들의 갑판, 선미와 후미를 가리지 않고 떨어진 검들은 그 모든 것을 장난감처럼 부숴댔다.

적들의 충각에도 마법사들의 불덩이에도 꿈쩍하지 않던 군함들.

그것들이 너무나 무력하게 바닷속으로 천천히 수장됐다.

“신벌이다…….”

푸른 사자 기사단의 젊은 기사 하나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 신벌.

저것이 신의 이적이 아니면 뭐라고 표현할 수 있겠는가.

잔해조차 남기지 않고 바다로 가라앉은 군선들이 서 있던 자리에는 바다의 하얀 포말들만이 떠돌아다닐 뿐이었다.

정확하게 절반.

자로 잰 듯 떨어진 신의 징벌은 정확하게 함선의 절반만을 남기고 나머지를 수장시켰다.

라인하르트가 두려움에 떨며 고개를 돌린 곳엔 천천히 손을 내리는 호진이 있었다.

누가 이런 이적을 일으켰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건 라인하르트뿐만이 아닌 이곳에 선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그들의 눈앞에 서 있는 건 한낱 필멸자가 아니라고.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황제를 구워삶고 있는 그 돼지들에게 전해라.”

그 음성이 머리에 울리는 듯하다.

예전에 신전에서 신의 축복을 받았을 때와 같이 몸이 떨려왔다.

라인하르트는 확신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상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를 상대하고 싶으면 최소한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을 데리고 오라고.”

***

─와아아아아아!

승리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병사중 하나가 바닷가를 향해 손짓하며 소리쳤다.

“꽁지 빠지게 도망가는 꼴 좀 보라지!”

“와하하하하하!”

긴장감을 지워내듯 병사들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 말대로 제국의 병사들은 가져온 물자들과 말들까지 버려가며 남은 배에 옹기종기 올라탔다.

멀쩡한 배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으니 어쩔 수 없었다.

벌써 함대의 일부는 바다로 나아가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바다는 오늘따라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했다.

돌아가는 길에 폭풍을 만나 배가 전복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런 그들을 지켜보던 아르바흐는 천천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에우리우스 경을 모셔 올 필요는 없던 것 아닙니까?”

“……크흠.”

에우리우스는 민망한 표정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왜인지 에우리우스는 호진의 신검을 본 이후 다시금 생기가 돌아와 있었다.

호진은 그게 기꺼워 기쁘게 미소 지으며 아르바흐의 말에 답했다.

“아시지 않습니까. 모든 것은 명분이라는 것을.”

제국에게도 최소한의 명분이 필요했다.

전쟁을 위한 명분이 아닌, 전쟁을 멈추기 위한 명분이.

시리온이 제국 땅이 아닌, 독립된 땅이라는 다른 증거가 나옴으로써 그들은 전쟁을 멈출 수 있게 됐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명예 때문이라도 제국의 4군단은 죽는 한이 있어도 이곳에서 호진들과 마지막까지 싸웠어야 할 것이다.

서로 오해였던 것.

그렇게 넘어갈 만한 명분이 생긴 것이다.

“그건 알고 있지요. 그보다 방금 전의 그건? 그게 불사의 신과 싸우며 익히신 기술입니까?”

아르바흐가 흥미가 가득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에 호진은 고민하다 그냥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그렇다기보다는 실전된 검신 샤카하의 기술입니다.”

“검신!”

호진의 대답에 감탄하며 소리를 내지른 건 다름 아닌 에우리우스였다.

그는 이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자네의 그 힘은 검신님의 힘인가?”

호진은 그런 에우리우스의 갑작스러운 태도의 변화에 당황하다가 이내 납득했다.

‘그런 거였나.’

호진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아닙니다. 기술은 그의 것일지 몰라도 이건 오롯이 저의 힘입니다.”

“그…… 런가?”

에우리우스가 무언가 힘이 빠진 채 답하자 호진이 이어 말했다.

“지금 스승님께 필요한 것은 새로운 신입니까?”

“……!”

에우리우스의 눈이 커지며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유라니 그야…….”

에우리우스는 쓰게 웃으며 말을 이으려던 찰나 호진이 그 말을 끊었다.

“여신의 힘과 은총이 약해져서? 스승님이 그녀를 섬겼던 이유는 무슨 이유에서였습니까?”

“……아.”

에우리우스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충격에 빠졌다.

그러곤 그 표정에 한줄기의 깨달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런 거였나.”

에우리우스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더 이상 그 표정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런 그에게 호진은 넌지시 물었다.

“단순히 강한 힘을 원하신다면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예전의 여신이 주던 것보다도 더욱 강한 힘을 드리죠.”

그 말에 에우리우스는 특유의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으하핫! 그것도 아주 괜찮겠군. 하지만 거절하겠네.”

“어째섭니까?”

“어릴 적 고아인 시절. 나에게 빵을 건네던 신부님이 말하시더군. ‘여신님의 자비는 가장 낮은 곳을 향하시는 법’이라고. 난 그 말이 참 좋았네.”

에우리우스의 입매에는 잔잔한 미소가 걸렸다.

“그 뒤에 경전을 읽었지. 기사가 된 후로도 꾸준히. 몇 번이나 정독하면서 말이네.”

에우리우스와 호진의 시선이 교차했다.

그의 눈엔 확신이 깃들어 있었다.

“난 그분의 말씀을 듣고 가슴이 뛰었네. 쉽게 말하자면 반해버린 거지.”

“그렇습니까.”

호진 또한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에우리우스가 지닌 미약한 신력이 작지만 분명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은 이제 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을 터인 완전하면서 오롯한 여신의 신격.

검신에게 집어삼켜진 지금의 여신에게서도 볼 수 없을 신격의 파편이었다.

“내가 그분의 뜻을 받들 것이네. 미약한 힘일지라도 사람들을 도우며 말일세.”

에우리우스가 자신의 검을 들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 의지에 맞추어 그의 신력이 맥동했다.

‘저건 이제 여신의 격이라 보긴 어렵겠네.’

에우리우스가 품은 뜻에 반응하는 저것은 이제 그 자신의 격이라 보아야 옳았다.

여신의 격과 뜻을 그가 계승한 것이다.

호진은 그런 에우리우스에게서 정순하고 올바른 기운을 느꼈다.

그라면 분명 이 혼란스러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또 다른 이정표가 되어 줄 터였다.

“난 우선 제국으로 향할 걸세. 황제 폐하께도 충심으로 간언할 신하가 한 명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잘 부탁드립니다. 제국이 더 이상 엇나가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나야말로 잘 부탁하지. 우리 인류의 미래를…… 그리고 여신님을.”

에우리우스와 호진이 강하게 손을 맞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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