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교섭 (1)
“어우씨, 늦은 줄 알았네.”
용재가 해안가에 늘어선 제국의 군단을 둘러보며 깜짝 놀랐다.
반대로 일행들의 모습을 확인한 아르바흐 또한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후우. 아슬아슬하긴 하셨습니다.”
제국 측은 금방이라도 쳐들어올 듯 기세가 흉흉했다.
아군 병사들도 각오를 다진 듯 긴장된 분위기가 깔려있었다.
분명 조금만 늦었어도 전면전이 벌어진 전장 한가운데로 게이트가 열렸을 것이다.
“……미안합니다. 늦었습니다.”
호진은 아르바흐에게 심심한 사과를 건넸다.
그도 그럴 것이 호진과 그 일행들은 다치고 지친 예은과 에우리우스를 배려해 성국에서 약간의 휴식을 취하다가 온 것이었다.
‘그래도 조금 억울하긴 하네.’
호진은 속으로 그런 생각을 삼켜야 했다.
문제를 알아챈 것은 방금 전.
호진은 붙잡혀 있던 성국의 시민들과 함께 신전을 빠져나왔다.
걱정과는 달리 성국의 군대는 그들에게 적대적이지 않았다.
주교와 성기사 아제토의 실종으로 지휘권에 공백이 생긴 덕이었다.
무엇보다 성채도시 카난의 시민들은 호진 일행을 구원자로 여겼다.
지난 몇 주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던 실종자들과 함께 나타났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그들은 없는 식량을 끌어모아 실종자들에게 나눠줬으며 자신들의 집을 내주며 휴식을 권했다.
일행들 역시 각종 편의를 제공해준 카난 시장 덕분에 알맞게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그러나 휴식을 취한 지 한나절도 지나지 않은 시점.
호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시장에게 되물어야 했다.
‘지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은인분들께서 이곳에 오신 지 일주일째입니다. 모르셨습니까?’
호진은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지하 신전이다.’
호진은 직감적으로 눈치챘다.
시간의 흐름이 그가 느낀 것과 다르게 흘렀다면 그곳밖에 없었다.
죽은 자들의 세계는 현실과 시간이 다르게 흐른다는 이야기는 이 세계에서도 통용되는 이야기.
어쩌면 이 세계에는 죽음을 먹는 신 얀에게서 비롯한 이야기일지도 몰랐다.
그의 신전을 방문했다가 돌아온 사람이 있다면 전설이 퍼져도 이상하지 않았을 테니.
어찌 됐든 중요한 것은 호진과 일행들이 성채도시 카난에 도착한 지 무려 일주일이 지났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말은…….
‘아르바흐와 약조한 기간이 다 됐다는 것을 의미하지.’
표정이 딱딱하게 굳은 호진은 곧장 게이트를 열었고, 무슨 일인지 몰라 당황한 일행들을 반강제로 끌고 왔다.
그것이 현재 상황이었다.
“……여기가 어디? ……어라, 내 팔이 왜 있지?”
예은은 잠이 덜 깬 채 중얼거렸고,
“악덕 고용주를 규탄한다! 노동자에게 휴식 시간을 보장해라!”
용재는 머리에 웬 끈을 둘러매고 그 자리에 주저앉았으며.
“…….”
도훈은 피곤에 절은 표정으로 말없이 호진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 총체적 난국을 지켜보던 아르바흐는 짜게 식은 표정으로 물었다.
“괜찮…… 은 거죠?”
“괜찮습니다.”
아마도.
호진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며 에우리우스를 바라봤다.
‘문제는 이 사람이지.’
정신이 돌아온 에우리우스는 말없이 그저 자신의 발끝만 내려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늘 호탕하게 웃던 웃음도, 흥미로 반짝이던 동공도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려웠다.
호진은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여신의 은총이 사라졌다.’
물론 그녀의 기운이 남기는 했다.
아주 미미하게.
신경 써서 보지 않으면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말이다.
광증을 일으키던 이질적인 기운이 사라지고 정순한 기운만이 남았다는 것이 그나마 작은 위안일 터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스승님.”
“…….”
호진은 휴식을 취하는 동안 그에게 현재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물론 그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마치 내용물이 텅 비어 버린 빈 깡통 같았다.
‘큰일인데.’
이렇게 되면 에우리우스를 이곳까지 데리고 온 의미가 없었다.
물론 그가 없더라도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있었다.
다만 명분이 있냐 없냐는 차이가 컸기에 그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었다.
그 순간이었다.
에우리우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보겠네.”
“……!”
됐다.
호진은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시죠.”
전투가 벌어지기 전 마지막 대화의 기회이자 최후통첩.
그것을 위해 양국의 대표는 각 군이 대치하고 있는 사이로 나아갔다.
아르바흐가 앞장을 섰고 그 옆으로 호진이 에우리우스와 함께 뒤를 따랐다.
가까이 다가감에 상대의 얼굴이 눈에 돌아왔다.
나이가 꽤나 지긋한 노장이 가장 선두에 서 있었다.
푸른색의 갑옷과 사자가 그려진 문양의 방패.
‘소문으로 듣던 푸른 사자 기사단장인가.’
그의 위치를 어림짐작하던 그때, 어느 정도 가까워진 그들은 동시에 멈춰 섰다.
먼저 입을 연 쪽은 제국 측이었다.
“약속한 칠 주야는 이미 지났다. 이건 항전의 뜻으로 받아들여도 문제없겠지.”
인사도, 자기소개도 없이 다짜고짜 본론을 꺼냈다.
그것도 한 나라의 왕에게 존대마저도 없이 말이다.
무례함의 끝을 보여주는 태도.
잠시 그 의미를 헤아리던 호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도발하는 거군.’
상대로서는 야전을 택한 아르바흐가 치기 어린 젊은 왕으로 보일 법도 했다.
그런 어리석은 왕이라면 분명 이런 도발에 쉽게 넘어갈 터.
하지만 아르바흐는 그런 뜨내기가 전혀 아니었다.
“원한다면 전쟁을 해도 좋지만, 말은 바로 해야겠지. 지금 남부 연합 소속 왕국 시리온의 땅을 불법으로 점거 중인 것은 그대들, 제국이다.”
담담하면서도 차갑기 그지없는 음성.
그건 분명 제왕의 말과 분위기였다.
그런 아르바흐의 반응이 예상외였던 것일까.
기사단장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러기도 잠시, 그는 날카로운 기세를 뿜어내며 분노를 흘렸다.
“닥쳐라! 시리온은 엄연히 제국 소속의 공국이다. 동부 촌구석의 왕은 있던 곳으로 돌아가 소꿉놀이나 계속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아르바흐는 자신을 모욕하는 그 언행에도 냉소할 뿐이었다.
“요즘 제국의 기사들은 훈련 대신 술과 여색만을 가까이한다더니. 무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교양과 지식마저도 부족한가.”
─움찔
꽤나 아픈 곳을 찌른 걸까.
기사단장의 표정이 썩어갔다.
아르바흐는 그 기세를 타고 품에서 서찰 하나를 내밀었다.
“시리온이 별개의 국가라는 황제의 필체로 쓰이고 날인이 찍힌 서찰이 있거늘. 설마 글조차 못 읽는 건 아니겠지?”
호진은 그 차갑게 비꼬는 모습에서 익숙한 가주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오웬…… 오웬이 보인다.’
일곱가주 중 롱비어드 가문의 가주 오웬의 독설과 닮은 아르바흐의 모습에 호진은 혀를 내둘렀다.
“감히, 그따위 가짜 편지와 망언으로 제국 황실을 능멸하다니!”
기사단장은 기다렸다는 듯 분노를 토했다.
아마 제국의 입장에선 서찰의 존재가 눈엣가시일터.
반대로 서찰만 없다면 시리온의 독립을 공고히 할 증거는 따로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누가 언제 전달했는지 모를 그따위 서찰을 믿고 이리 방자하게 구는 것이라면, 반드시 후회…….”
“아, 그건 아닙니다.”
─뚝
호진이 기사단장의 열변을 딱 잘라 끊어내자 주변이 적막에 빠져들었다.
그제야 호진의 존재감을 눈치챈 것일까.
기사단장의 시선이 처음으로 호진을 향해 돌아갔다.
“뭐냐, 네놈은?”
그 눈에 경멸이 깃들었다.
호진은 현재 자신의 힘을 극한으로 억누른 상태.
그 시선의 의미는 자격도 없으면서 대화에 끼어든 자를 향한 경멸이 분명했다.
“서찰이 전부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게 뭔 헛소리냐. 무엇보다 여긴 네까짓 놈들이 끼어들…….”
말을 잇던 기사단장의 시선이 에우리우스를 향하더니 천천히 말꼬리를 흐렸다.
의문, 불신 그리고 경악.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기사단장의 표정은 여러 번 뒤바뀌었다.
호진은 그런 기사단장을 향해 옅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여기 그 증인이 있으니까요.”
***
‘에우리우스?’
기사단장는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신경을 쓸 겨를조차 없었다.
믿고 싶지 않지만 눈앞의 남자는 실종됐던 에우리우스였다.
갑옷 이곳저곳이 부서지고 몰골이 말이 아니었지만, 그를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제국의 무력을 상징하는 푸른 사자 기사단과 견줄 수 있는 유일한 단체.
황제의 눈과 귀라 불리는 푸른 늑대 기사단의 단장이 바로 그였으니까.
‘하필 왜 지금……!’
기사단장은 이를 뿌득 갈았다.
에우리우스로부터 연락이 끊긴 지도 오래였거늘, 이렇게 나타날 줄이야.
기사단장은 애써 침착하며 입을 열었다.
“에우리우스 경? 경이 맞는가?”
“……예. 오랜만입니다. 라인하르트 경.”
에우리우스는 건조하고 메마른 목소리로 입을 열어 답했다.
그제야 기사단장은 에우리우스의 상태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늘 시끄럽게 웃음을 터트리고, 쓸데없이 자신만만한 미소가 없다.
무엇보다 그에게서 짙고 거대하던 여신의 신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기사단장은 생각했다.
이건 써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갑자기 연락이 끊겨서 걱정이었네. 무슨 일이 있었던 겐가? 아니, 그보다 증인이라니.”
에우리우스는 잠시 침묵하다가 옆에 사내를 스윽 쳐다봤다.
그러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입니다. 제가 황제 폐하와 그 서찰을 주고받으며 중개를 했습니다. 시리온은 더 이상 제국의 땅이 아닙니다.”
“……이런.”
기사단장은 돌연 침통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그러기도 잠시, 거친 기운을 흘리며 분노했다.
“감히 제국의 기사를 포박하여 고문하고 끝내 거짓된 증언까지 이끌어내다니. 네놈들은 얼마나 더 죄를 지을 셈인가?”
“……뭐라?”
영웅왕 아르바흐는 물론 그 옆에 선 남자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졌다.
그들도 알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억지 논리로 밀어붙이고 있는지.
‘그래서 어쩔 거지?’
어차피 역사는 승자의 것이다.
기사 단장의 목표는 전쟁.
자신의 빈약하고 억지스러운 논리를 역사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게끔, 말끔하게 이 땅의 모든 것을 지워 버리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기사 단장이 비릿한 미소를 짓던 찰나, 앞서 대화에 끼어든 남자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가. 하긴, 명분이야 대충 가져다 붙이면 그만이니까. 이길 자신이 있다 이거지?”
“……네놈은 누구길래 주제도 모르고 자꾸 나서는 거지?”
남자가 입을 열 때마다 불쾌감이 끓어올랐다.
힘도 없는 버러지가 뭔데 자꾸 끼어드는 걸까.
‘차라리 잘됐군.’
기사단장은 남자의 목을 베어 개전의 효시로 삼고자 했다.
그러던 순간 기사단장은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덜컥
반쯤 뽑혀 나오던 검이 무언가에 걸린 듯 멈췄다.
아니, 멈춘 것은 검이 아닌 자신의 어깨였다.
몸이 굳은 듯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다.
마치 거대한 무언가가 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내가 누구냐고?”
남자가 평범하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왜일까.
─달그락달그락
다리가 후들거리고 검을 쥔 손이 달달 떨리며 쇠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뭐냐…… 도대체 이놈은…….’
지금껏 감히 본적도 상상도 해본 적이 없는 존재.
기사단장의 동공은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리온과 신 아쉬나학의 통치자이자 남부 연합의 맹주. 그게 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