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화. 죽음을 먹는 신 (2)
“원본보다 뛰어난 모조품이 있을 리가 있나.”
호진이 거리를 좁혀오자, 얀은 이를 부드득 갈며 손의 수인을 바꾸었다.
다음 순간 죽음을 수확하는 낫이 다시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호진은 내심 침음을 흘렸다.
‘권능을 못 쓰는 게 아니었나.’
놈이 가진 팔 중 일부를 무력화함으로써, 권능의 사용을 막았다고 여겼다.
하지만 남은 몇 개의 팔로도 놈은 자신의 권능을 부리고 있었다.
“오라, 필멸자여.”
얀의 목소리가 사납게 갈라졌다.
이를 지켜보던 호진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아니, 이전과는 다르군.’
자신의 권능을 무리하게 쓴 대가일까. 수인을 펼친 손의 일부가 짓무르고 있었다.
아까와 달리 죽을 각오를 다진 것이다.
‘인정받은 건가.’
호진은 자조적으로 웃음을 흘렸다.
다른 건 몰라도 저 ‘죽음을 수확하는 낫’만큼은 호진에게도 위험했다.
신검의 사용에도 횟수 제한이 있고, 무엇보다 얀의 손이 줄어버린 만큼 수인의 규칙도 바뀌었을 터다.
솔직히 한 번의 권능도 받아낼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놈을 죽이고 같이 죽는 건 가능할 것 같긴 한데.’
그렇게 동귀어진을 한다면 누가 더 손해인가.
두말할 것도 없다.
얀은 언젠가 부활할 것이고 호진은 높은 확률로 되살아날 수 없을 거다.
‘뭐, 불사의 신이 자신의 밑으로 오라고 권유해 줄지도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것은 지구와 이 세계는 멸망의 길을 걸으리라는 점이다.
그렇기에.
─스륵
호진은 천천히 검을 든 손을 내렸다.
***
“……뭐 하자는 거지?”
호진을 지켜보던 얀은 공격하는 대신 떨떠름하게 물었다.
얀은 언제라도 권능을 휘두를 준비가 된 상태였고, 호진이 무방비한 지금이 기회라면 기회일 터다.
하지만 호진에게 계속해서 휘둘려온 탓일까.
모든 게 의심스러운 나머지 얀은 쉽사리 공격할 수 없었다.
그런 얀을 향해 호진이 말했다.
“보내 주마. 이곳에서 떠나라.”
“……!”
얀의 몸이 덜컥하고 멈췄다.
얀은 정신이 멍해졌다.
예상치 못한 말을 들어서가 아니었다.
호진이 보내 준다는 말에 처음으로 들었던 감정이 기쁨이었다는 점이 당혹스러웠다.
수치심으로 머리가 뜨거워지는 기분이었다.
‘다행이라고? 인간이 봐줄 테니 떠나라는 말을 듣고 느낀 감정이?’
그래서는 안 됐다.
그런 모욕적인 행위에 안심해서는 신으로서 존재할 수 없었다.
얀이 다시 한번 결사의 각오를 다지려던 그때였다.
“가지 않는다면…… 벨 뿐이다.”
호진이 손에 쥔 검을 얀을 향해 곧게 뻗으며 읊조렸다.
그 검의 끝에 목이 닿은 얀은 느꼈다.
자신이 평생을 함께 해온 죽음을.
하지만 그것은 이제껏 자신을 도와주고 함께한 친숙한 것이 아닌, 너무나도 낯설고 차가운 냉혹한 것이었다.
‘아아…….’
본적이 있었다.
저 기수식.
검신.
놈의 진정한 힘.
모든 존재를 지우는, 신의 존재조차 무로 되돌리는 기술.
신검(神劍)/ 멸(滅).
‘그것조차 사용이 가능하다는 말인가…….’
얀은 처음으로 소멸의 공포를 느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처음은 아니다.
검신이 그것을 선보였을 때도 이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었다.
그렇기에 반복된 결전 끝에 힘이 빠진 검신을 봉인한 것이 아닌가.
그 공포를 느낀 것은 비단 자신만이 아니었기에.
“그만하지.”
얀은 손의 수인을 풀고 자신의 권능을 슬그머니 회수했다.
더 싸우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모욕이고 수치고 상관없이 지금 당장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물러나겠다. 이곳에서 떠나지.”
이제 와 자신을 모시는 신전 따위는 손에 꼽았다.
하물며…….
얀의 시선이 신전의 한쪽을 향했다.
그곳에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다져진 자신의 사도가 있었다.
마지막에 이르러 숨겨놓은 이형의 힘을 끌어낸 모양이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시…… 신이시여. 제가 죽음의 자비를…….”
단검이 눈에 박힌 채 숨만을 깔딱거리는 주교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실에 베이고 도끼에 몸이 터졌다.
눈앞의 인간의 권속들이 해놓은 짓이다.
‘사도조차 저 모양이어서야.’
얀이 작게 한숨을 내쉬던 그때 호진이 말했다.
“허락할 수 없다. 이곳에서 너는 무엇 하나 가지고 갈 수 없을 거다.”
“인색하군.”
“자비로운 누구와는 다른지라.”
호진은 단호하게 확언했다.
그야 그럴 만도 했다.
얀은 죽음을 먹는 신.
사도인 주교의 죽음을 먹는다고 하면 얀은 많은 힘을 회복할 것이다.
호진은 그런 위험을 감수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어쩔 수 없지.”
얀은 미련 없이 몸을 돌리며 게이트를 열었다.
그의 음성을 들은 주교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시…… 신이시여! 이럴 수는 없나이다! 제가 여신을 배신하고 신께 귀의하였음에 어찌…….”
“미안하구나.”
얀의 대답에 주교는 말문이 턱 막힌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것은 너무나도 건조하고 담백한 사과.
마치 지나가던 사람에게 길을 물을 때 할 법한 표면상의 예의였기 때문이다.
아무리 사도라 할지라도 신에게 필멸자의 가치는 고작 그 정도에 불과했다.
그렇게 얀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게이트 너머로 걸음을 옮겼다.
남겨진 주교의 주위로는 진득한 절망과 적막만이 흐를 뿐이었다.
***
‘살…… 았다.’
호진은 얀이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신검의 다섯 번째 기술이자 최종 결전기.
멸(滅).
당연하지만 호진은 그것을 익힐 수 없었다.
게일이 선물해 준 가면무도회에서 수도 없이 봤지만, 기껏해야 기수식밖에 흉내 내지 못했다.
어딘가에 써먹을 수 있을 거라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는데 일이 이렇게 풀릴 줄이야.
역시 뭔가를 배워놓으면 어딘가에 쓸데가 있는 법이었다.
‘놈이 신검에 대해서 알아서 다행이다.’
만약 모르는 상대가 보았다면 아무런 의미 없는 허풍이었을 터지만, 얀은 신검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스륵
호진은 극한으로 끌어올렸던 기운을 갈무리하며 몸을 돌렸다.
마지막에 얀과 상잔을 벌이지 않은 덕에 아직 몸에 힘이 남은 것이었다.
그때, 용재도 도훈이 있는 곳에서 소란이 일었다.
“……으음?”
“여긴 어디야? 난 방금까지 분명…….”
어린아이부터 젊은 여자와 나이 든 노인까지.
얀이 모습을 감춤과 동시에 미몽에 사로잡혀있던 수백의 사람들이 눈을 뜬 것이다.
그리고.
─콰직
“크르르르르륵!”
그중에는 에우리우스도 있었다.
정신이 돌아온 에우리우스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자신을 묶고 있는 실을 풀기 위해 몸부림을 쳤다.
그 모습은 마치 덫에 걸린 맹수와도 같았다.
“아저씨. 정신 좀 차려…… 젠장.”
용재는 그런 에우리우스를 말리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실이 살을 파고들어 피가 튀기고 상처가 벌어졌다.
그럼에도 에우리우스는 고통스럽지도 않은지 더욱 격렬하게 몸을 비틀 뿐이었다.
“잠시만.”
호진이 그런 용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에우리우스를 힘으로 붙잡던 용재는 호진을 보고 반색했다.
“형!”
호진은 고개를 작게 끄덕여 안심시키고는 에우리우스를 바라봤다.
영혼을 불태우듯 거칠게 일렁이는 푸른 불꽃이 눈에서 타올랐다.
한눈에 봐도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성국에서 전염병처럼 퍼지고 있다는 푸른 미치광이 병.
그것이 분명했다.
‘정작 릴리 그 아이는 너무 욕심을 내서 잡아먹혀 버린 듯하지만.’
‘그건 권능도 무엇도 아닌 격의 충돌로 인한 부산물. 찌꺼기일 뿐이니.’
호진은 얀과의 대화를 곱씹었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릴리는 힘을 얻고자 어느 신격을 집어삼켰다.
하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격을 온전히 유지하지 못하게 됐고, 끝내는 그것과의 충돌로 인해 자신을 섬기는 이들로 하여금 푸른 미치광이라는 병을 발병시켰다는 것이다.
호진은 불현듯 과거, 울타가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여신은 손대서는 안 될 힘에 손을 댔다.
하지만 그 힘은 여신의 예상과는 다른 것이었으니.
여신은 망가졌고 세상의 균형은 비틀렸다.’
이야기에서 말하는 손대서는 안 될 힘.
그것이 다른 신격을 말하는 것이라면 모든 게 이어지긴 했다.
어찌 됐든 여신은 감당할 수 없는 힘을 원했고 그로 인해 망가져 가고 있는 게 분명했다.
‘어쩌면 최근 시스템이 잠잠한 것도 여신의 증상과 관련이 있을지도.’
자아를 유지하기 어렵다면, 퀘스트를 내어 주는 것도 불가능할 테니까.
연계 퀘스트를 내어준 이후론 몇 달째 묵묵부답 중인 여신이었다.
당연하지만 교황을 비롯한 다른 신도들과도 대화가 불가능할 터.
사람들의 바람과는 달리 여신은 점점 더 자아를 잃어 가고 있는 것이다.
“제 생각이 맞을까요, 스승님?”
“크륵!”
호진은 간절함을 담아 에우리우스를 불렀다.
에우리우스는 그런 호진을 향해 침을 질질 흘리며 이를 뿌득 갈 뿐이었다.
분명 가까웠다면 입질이라도 했을 것 같았다.
호진은 감시자의 눈을 최대로 활성화해서 에우리우스를 살폈다.
예상대로 에우리우스를 이루던 여신의 격이 엉망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호진이 보고 느꼈던 자비로움 대신 거친 야성과 투쟁본능이 내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마치 수도복을 뒤집어쓴 늑대와 같았다.
‘이미 여신의 격이라기보다는…….’
다른 격의 기운이 더욱 명확하게 느껴졌다.
자아와 정체성이 잡아 먹히기 직전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았다.
어찌하면 좋을까.
호진이 고민에 빠진 그 순간.
정말 오랜만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격을 집어삼키거라.”
“울타님?”
호진은 너무 반가운 나머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강신무를 펼치지 않았음에도 울타가 육신을 가진 채 자신의 뒤에 서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호진의 시선은 다시 에우리우스를 향했다.
“그르르륵!”
실을 풀기 위해 너무 힘을 준 나머지 에우리우스의 입에서 피거품이 일기 시작했다.
더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말이었다.
호진은 일단 에우리우스에게 손을 얹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울타가 이어서 말했다.
“놈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거친 기운. 그것에 집중해라. 다른 누구도 할 수 없겠지만, 너만은 가능할 게다.”
그게 무슨 말일까.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호진은 늘 그렇듯 울타의 말을 믿었다.
그렇기에 에우리우스가 지닌 격을 끄집어냈고 그것을 흡수하고자 했다.
다른 이가 지닌 신격을 흡수한 적은 있지만, 그건 모두 상대를 처리한 후였고 시스템의 힘을 빌린 것이었다.
살아있는 상태로 에우리우스의 힘을 어떻게 가져오면 좋을까.
그렇게 고민하던 그 순간.
“어라?”
그저 흡수하겠다고 생각만 했을 뿐인데, 기운이 서서히 호진에게 흡수됐다.
그 기운이 어딘가 익숙하다고 느낄 무렵.
─털썩
정신을 잃은 에우리우스가 앞으로 꼬꾸라지면서 넘어졌다.
호진이 급히 그를 붙잡아 살폈지만,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보였다.
“다행이다.”
호진은 옅게 웃으며 실을 풀어 그를 바닥에 뉘었다.
기운을 흡수했으니 곧 정신이 돌아올 터였다.
호진은 용재에게 그의 치유를 부탁하고는 몸을 돌렸다.
그곳엔 무너진 신전의 기둥에 몸을 기대고 있는 울타가 있었다.
“오랜만이다. 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