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죽음을 먹는 신 (1)
─스칵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왔다.
본능적으로 꺾은 목의 옆으로 섬뜩한 기운이 스쳐 지나갔다.
미처 피하지 못한 머리카락의 일부가 파스스 말라비틀어지며 흩어졌다.
다음 순간 신전의 기둥 하나가 예리하게 절단된 단면을 보이며 무너져 내렸다.
‘뭐가 생명을 수확하는 낫이라는 거냐.’
호진은 불만스럽게 혀를 찼다.
차라리 모든 것을 파괴하는 낫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렸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고 기척조차 느낄 수 없는 공격.
그것은 분명 죽음과 닮아 있었다.
‘그러나…… 잠깐이지만 보였지.’
얀의 부름에 일렁이며 모습을 드러냈던 죽음의 형상.
사신과도 그 모습은 다시금 허공 속에 녹아들어 자취를 감췄다.
‘감시자의 눈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검의 권역으로도 인식이 안 되고.’
신의 권능도.
그동안 극한으로 갈고 닦은 감각도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동안 호진은 자신이 얼마나 ‘눈’과 ‘감’이라는 것에 몸을 맡기고 싸워왔는지 새삼 깨달았다.
‘온다.’
쌓아 올린 격이 있기에 반응할 수 있는 공격.
그것은 일종의 미래 예지에 가까웠다.
호진은 또다시 그 불확실한 능력과 운에 몸을 맡기며 몸을 비틀었다.
─스칵
그러나 언제까지나 행운의 여신이 그의 편인 것은 아니었다.
‘……이번엔 베였나.’
호진의 몸이 기우뚱하며 그 자리에 섰다.
왼쪽 발목 아래가 잘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호진에게 붙어 있기는 했다.
그저 생명력이 다한 밀랍 인형처럼 붙어있을 뿐이지만 말이다.
‘이건 좀 위험한데.’
검의 시작이자 끝은 발에서 나오기 마련이다.
기동성이 빼앗겨서야 이길 싸움도 이길 수 없었다.
하물며 처음부터 불리한 싸움이었으면 더 말할 것도 없을 터.
그런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걸까.
“지금이라도 포기해라.”
호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얀이 덤덤하게 말했다.
얀은 호진의 발목을 베고 그만큼 더욱더 힘을 되찾은 것으로 보였다.
얀의 입장에서는 승부가 이미 난 것이나 마찬가지일 터다.
분명 놈은 호진의 예상치 못했던 분전에 놀란 듯 보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숨겨 왔던 권능을 꺼내 든 얀의 언행에는 확신이 깃들었다.
“죽음으로서 나에게 귀의하기엔 아직 꽃피지 못한 네 능력이 아쉽다.”
너무나 담담해 아쉬움이 묻어나진 않았지만, 진심임은 분명했다.
얀은 호진에게 기회를 주고자 했다.
그 의도가 무엇이든 얀은 지금 호진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다.
“자비롭군. 죽음의 신답지 않게.”
호진 또한 수세에 몰렸음에도 얼굴에 감정을 지운 채 말했다.
이쪽은 몸에 밴 습관이다.
다만 자신의 모습이 점점 신들과 비슷해지는 것 같아 괜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이 흔히 착각하지만, 죽음은 원래 삶보다 자비롭다. 오히려 고통스러워도, 꺾이고 좌절해도 다시 일어서고 나아가기를 강제하는 것이 더 잔인하지 않은가.”
“그럴지도.”
호진은 나지막하게 답했다.
딱히 놈의 말에 반박하며 늘어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부정하기에도 애매했다.
누군가에겐 그의 말이 무엇보다도 와닿을 터였다.
호진의 답이 의외였던 걸까.
얀은 약간 놀라며 입을 열었다.
“네가 이해해 줄지는 몰랐는데…… 어찌 됐든 잘됐다. 그럼 나의 아래로…….”
“들어가지는 않을 거다.”
호진은 그 말을 칼같이 끊으며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는 공격.
하물며 실체조차 존재하지 않고 검으로 벨 수 없는 녀석에게 어떻게 해야 대처할 수 있을까.
사실 그에 대한 해답은 머릿속에 그려진 상태다.
이것도 놈이 공격을 이어 나가지 않고 말을 걸어 준 덕분이다.
호진은 속으로 얀에게 약간의 감사를 표하며 한 손으로 검을 고쳐 잡았다.
“……이유는?”
“내가 더 강하니까.”
붉은 신전에 죽음과도 같은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얼음장같이 차가운 얀의 중얼거림이 그 침묵에 방점을 찍었다.
“필멸자는 결국 죽음에 이끌리는 것인가…….”
얀이 두 손을 모아 합장하자 등 뒤의 수인들도 형태를 바꿨다.
[죽음이 가로되 때가 되었다고 했으니.]
얀의 권능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명을 수확하는 죽음의 낫이 호진의 목을 향해 드리워졌다.
그러나 이어지는 호진의 행동은 얀이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포기한 건가?’
기세등등했던 말과는 달리 무방비하게 늘어트린 검과 팔.
얀의 눈에는 호진의 그 모습이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에 이르러 허풍에다가 좌절이라니. 날고 긴다 해도 결국 필멸자인가.’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빨리 생명을 거둬주는 것이 자비일 터.
얀은 자신의 권능에게 명했다.
인식조차 할 수 없는 고통 없는 죽음을 선사하라고.
그리고 다음 순간.
─서걱
익숙한 절삭음에 얀은 미소를 띠었다.
이로써 모든 것이 끝났다.
비록 호진이란 녀석을 이용해 미쳐 버린 여신의 힘을 깎아 놓으려던 계획은 실패해 버렸지만…….
‘저 정도의 격을 집어삼킨다면 나도…….’
─투둑
무언가 얀의 옆구리로 힘없이 떨어져 내렸다.
의아함을 느끼며 고개를 돌린 곳엔 시들어버린 초목과 같이 축 늘어져 있는 팔들이 있었다.
“이게 무슨…….”
얀의 입에서 처음으로 격앙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망연한 얀의 앞으로 누군가 천천히 다가왔다.
이미 죽음이 선고된 자.
서 있어서는 안 되는 자.
호진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의문을 입에 담으려던 그때, 얀은 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을 목격했다.
─저벅저벅
호진의 왼쪽 발목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축 늘어졌던 왼손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검을 잡고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다.
빼앗긴 생명력을 되찾는다니, 그것은 자신이 아니고서야 그 누구도 할 수 없다.
불사의 신을 데려온다고 해도 자신의 권능이 무효화되는 일은 일어날 수 없었다.
‘하물며 검이나 다루는 인간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얀의 뇌리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있었다.
이런 일이 가능한 신이 딱 하나.
“설마…….”
그런 얀의 중얼거림을 듣던 호진은 웃으며 답했다.
“돌려 줬다. 너의 권능을.”
***
호진은 호흡을 길게 늘어트리며 모든 감각을 집중했다.
한 치의 실패도 용서되지 않았다.
상대의 권능은 말 그대로 죽음 그 자체였으니.
조금이라도 실수한다면, 혹은 지금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게 착각이라면 그걸로 끝이었다.
하지만 호진은 자신을 믿고 판돈을 모두 테이블 위로 올렸다.
한 번만 성공한다면 그다음은 문제 없을 터였다.
[죽음이 가로되 때가 되었다고 했으니.]
‘온다.’
보이지도 않는 죽음이 자신의 목을 뎅겅 잘라 생명을 끝내기 위해서.
호진은 침착하게 검을 늘어트렸다.
어디서 어떤 형식으로 올지는 전혀 몰랐다.
그렇다면 어떤 자세를 취하는 것도 무의미하다.
다만.
‘보인다.’
호진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얀을 뚫어지라 지켜봤다.
그의 눈에 형태를 바꾸는 수인이 보였다.
활짝 손바닥을 펼친 수인.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잇는 수인.
검지를 세워 바닥을 향하는 수인.
그것들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순간.
‘놈의 권능은 발동된다.’
호진은 얀의 수인이 완성되는 그 찰나, 이 순간만을 위해 아껴왔던 자신의 기술을 선보였다.
검을 늘어트린 채 무방비하게 선 자연체.
그것은 한 가지 오의를 위한 기수식이었다.
타이밍만 맞출 수 있다면 그 어떤 공격도 상대에게 돌려보낼 수 있는 검술.
‘신검(神劍)/ 되돌리기.’
─스읍
숨을 깊게 들이쉰 호진의 눈이 시간의 틈에서 찰나를 낚아챘다.
‘신의 권능을 상대하기 위해선 신의 검술을 쓸 수밖에.’
─스륵
검의 끝에 무언가 걸리고 휘감겼다.
목표는 오직 하나.
호진은 아까부터 못 박힌 듯 고정된 시선을 유지했다.
그러고는 흔들리지 않는 마음가짐으로 베어냈다.
─서걱
이어지는 날카로운 절삭음이 기분 좋게 귓가에 울려 퍼졌다.
‘됐다.’
호진은 자신도 모르게 검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힘없이 늘어져 있던 손과 발이 움찔거렸다.
빼앗겼던 힘이 돌아온 것이다.
‘약간 기대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 잘 풀릴 줄이야.’
호진은 기쁨을 감추고 당연함을 연기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예상대로 흘러갔다는 태도가 필요했다.
그래야 자신이 판을 주도하는 줄 알았던 얀이 더욱 혼란스러워할 테니까.
그리고 그 의도는 잘 먹혀든 듯했다.
“믿을 수 없다. 언제부터 그 힘을…….”
얀은 혼란스러워하다 이를 부득 갈았다.
아무래도 검신의 검술임을 눈치챈 듯한데, 반응이 기대 이상이었다.
“힘을 숨긴 게 너뿐이라고 생각했나?”
호진이 냉소하며 말했다.
지금이었다.
상대가 혼란스러워하는 지금이라면 감춰왔던 패를 모두 보여줘도 될 터였다.
얀은 화가 난 듯 목소리를 키우며 호진의 말을 부정했다.
“허튼수작이군. 어떻게 그놈의 힘을 어떻게 흉내 냈는진 모르겠지만, 그래 봤자 모조품일 뿐이다. 고작 그런 잡기술 하나론 나를 이길 수 없…….”
“누구 마음대로 하나랬지?”
호진은 말과 동시에 위압을 주변으로 뿌렸다.
원래라면 눈곱만큼도 영향을 줄 수 없었겠지만, 얀의 마음속이 혼란해진 까닭일까.
얀은 내뱉던 말을 집어삼키며 몸을 멈칫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검술은 호진이 가진 가장 파괴적인 검술.
‘신검(神劍)/ 소낙비.’
─콰과과과곽
호진의 시야에 닿는 모든 곳에 황금처럼 빛나는 검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붉은 신전은 화려한 황금색 검의 물결로 잠겨 갔다.
“끼이이이이익!”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겨나가는 피륙음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악몽의 형상을 한 얀의 권속들은 비명을 내지르기도 잠시, 질퍽한 살덩이가 되어 바닥에 눌러붙을 뿐이었다.
“말…… 도 안 되는…….”
얀은 충격에 빠진 듯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검들 중 일부를 놓쳐, 화려한 예복 위로 황금색의 검이 꽂힌 모습이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얀은 돌연 호진을 향해 분노를 터트렸다.
“네놈…… 필멸자 주제에 감히!”
얀의 주위로 강력한 격이 일렁였다.
이형의 다리를 단 그의 아래로 검은색의 기운이 일렁이며 사방을 잠식해 나갔다.
그 기운에 닿는 것은 돌이든 기둥이든 그의 권속이든 꿀렁이는 어둠 속으로 집어삼켜졌다.
그리고 그 틈으로 보이는 끔찍한 지옥도.
수천만의 영혼이 뼈를 녹이는 불과 살을 저미는 칼날 속에 몸부림치는 곳.
“끝없는 고통에 몸부림치거라.”
신역 나락(奈落).
그것이 죽음을 먹는 신 얀이 지배하는 공간이자 사후세계였다.
그 어둠이 호진을 집어삼키기 위해 내달려오던 그 순간이었다.
“내 검술이 모조품이라고 했나?”
─스륵
그렇게 읊조리는 호진의 손에는 처음 보는 검 한 자루가 쥐어져 있었다.
그 검을 예전에 봤던 이들이라면 지금의 검이 그것과 같은 것이리라고 믿을 수 없으리라.
푸르고 푸른 아름다운 검 한 자루.
아직까지 자신만의 심상 세계를 끌어내지는 못하지만, 이것만큼은 처음부터 가능했다.
호진은 자신의 근원에 닿아 있는 심상의 검을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다가오는 어둠을 향해 올곧게 내리그었다.
─콰직
세계와 세계가 부딪치며 공기가 떨려왔다.
맞닿은 두 세계가 힘을 겨루고 있었다.
그러나 곧 작지만 단단한 푸른 세계가 검게 일렁이는 거대한 세계를 산산이 깨부숴 버렸다.
“이럴 리가…… 없다.”
얀이 그것을 보며 망연히 중얼거렸다.
그런 그를 향해 호진이 다가서며 말했다.
“내 검술은 모조품인 적이 없다.”
호진의 입매가 즐겁다는 듯 올려졌다.
“원본보다 뛰어난 모조품이 있을 리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