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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228화 (228/241)

228화. 지상낙원 (5)

움직임을 제약당한 얀은 당황하지 않았다.

─카앙!

기대했던 절삭음 대신 날카로운 금속음이 호진의 귀를 파고들었다.

녀석의 수십 개의 손 중 하나로 호진의 검을 튕겨 낸 것이다.

비록 막혔지만, 그동안 놈의 털끝 하나 건드리지 못하던 호진으로서는 의미 있는 쾌거였다.

하지만 그것을 기뻐할 시간은 없었다.

무엇보다 호진은 정작 그것을 인지조차 하지 못했다.

호진의 모든 감각과 의식은 다음으로 이어질 공격에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스읍.”

짧게 숨을 들이쉰 호진은 돌연 기세를 바꿨다.

아니, 정확히는 그가 든 검의 기세가 달라졌다.

─스캇

귀를 파고드는 소리에 맞춰서.

─빙글

춤을 추듯 검이 유려하게 허공을 갈랐다.

때로는 빠르고 날카롭게.

때로는 과감하지만 빈틈없게.

한편의 왈츠와 같이 공격은 숨도 쉬지 않고 이어졌다.

이것이 1000년 전 동부 왕국을 일통한 왕족의 검.

‘제오르크 왕가의 검술. 제비의 비행.’

─카랑 캉 카각 캉 캉!

아래에서 위로 솟구쳐 오르는가 싶더니, 정신을 차리고 보면 어느새 목을 노리고 검이 휘둘러지고 있다.

화려하기에 예측하기 어렵고, 화려함 속에 한 가닥 예기를 품은 검.

그것이 바로 제오르크 왕가의 검술이었다.

“독특하구나.”

얀은 그런 검을 받아내며 중얼거렸다.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이 이어지는 연격이었지만, 얀은 담담하게 그것을 모두 쳐냈다.

어디 계속 막아 보라는 듯 호진의 검 또한 점점 빨라지던 그 순간.

─화악!

눈 깜짝할 사이에 벼락처럼 떨어지는 검 한줄기를 보며 얀은 섬뜩함을 느꼈다.

그것은 마치 제비의 활강과도 같아서, 뻔히 보고 있었음에도 순간 가속하는 검에 반응하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끝내 그 공격은 얀의 팔뚝 중 하나에 날카로운 자상을 남겼다.

얀은 몰랐지만, 검술 ‘제비의 비행’의 꽃이라 불리는 ‘먹이 사냥’이었다.

“놀랍…….”

그 사실에 순수하게 감탄하던 얀은 더 말을 잇지 못했다.

─쩌엉!

다른 신들에 비해 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인간에 비하면 충분히 거체라고 할 수 있는 얀의 몸이 주르륵 밀려났다.

검을 막아낸 손이 저릿하게 떨려왔다.

호진을 바라보던 얀이 고개를 꺾으며 물었다.

“그건?”

“제국 라인하르트가(家)의 비전. 용의 심장이다.”

호진은 크게 부푼 가슴의 공기를 독특하게 내뱉으며 답했다.

동공이 뱀의 그것처럼 날카롭게 변하고 심장이 거칠게 맥동하는 소리가 얀에게까지 들렸다.

가만히 숨을 쉬는데도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마나 하트랑 닮았나.’

아무래도 시전자의 힘을 순간적으로 증진하고, 마나를 활성화하는 기술인 모양이다.

얀이 흥미롭게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 찰나.

“그리고…….”

호진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어느새 능숙해진 환영보를 펼치자, 호진의 몸이 얀의 지척까지 빗살처럼 나아갔다.

그와 동시에 ‘새벽을 밝히는 청성’이 머리 위로 높이 들렸다.

검 끝에서 푸른 새벽과 넓은 대양을 닮은 짙은 군청색 빛이 토해져 나왔다.

“이건 라인하르트 가의 결전기.”

잠깐이지만 붉은색의 신전의 빛을 몰아낸 호진이 사납게 미소 지었다.

“개벽이다.”

─콰아아아앙

일검에 담긴 것은 대양.

압도적인 무게감과 파괴력이 얀의 몸을 덮쳤다.

그 몸이 붕 떠오르는가 싶더니 끝내 튕겨 나갔다.

얀은 신전의 기둥을 몇 개나 부숴 먹은 뒤에야 멈춰 설 수 있었다.

“상상 이상인데.”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던 얀은 깨달았다.

아직 호진의 차례가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파지직

날아가는 얀과의 거리를 쉬지 않고 좁힌 호진의 검에서 벼락이 뿜어져 나왔다.

그것은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벼락이었다.

푸른색 스파크가 튀는 호진의 검이 얀을 향해 휘둘러졌고, 공격을 막아낸 얀은 또다시 몸이 경직됨을 느껴야 했다.

“이건 카리아 류 오의 낙뢰.”

이어 몸을 비튼 호진의 검에서 향긋한 꽃내음이 피어오르며 꽃의 형상을 그렸다.

“이름 모를 방랑자의 검술 앵무.”

호진의 손이 바삐 움직이자 읊조림의 수도 자꾸만 늘어갔다.

“폭풍검가 4대 가주의 천공 베기.”

“제국 최초의 기사 지그문트 류 일식. 올빼미의 태세.”

“검성 티리온 식 나락.”

그야말로 천태만상.

읊조림 한 번에 완전히 새로운 검술이 하나.

그것도 하나하나가 한 시대를 상징하고 그 세상을 발아래 둔 이들의 검술이다.

천재라고 불리는 이들이 일평생을 쌓아서 익혔을 것들이 지금 한 사람의 손을 통해 물 흐르듯 펼쳐지고 있었다.

그중 몇 개는 얀도 아는 것이었지만, 그가 알던 것과 달랐다.

‘놀라워.’

하나같이 원본 검술들보다 뛰어나고 위협적이다.

그래봤자 필멸자들에게나 먹힐 것이라고 여겼던 검술들이 눈앞에서 펼쳐질 때마다 저릿한 감각이 몸을 타고 흘렀다.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실수로라도 공격을 허용한다면 꽤나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화한 건가.’

얀에게는 그 모든 것이 놀람의 연속이었다.

분명 눈앞의 인간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해야 20년 남짓.

고작 그 정도의 시간 동안 저 많은 검술들을 어떻게 익힐 수 있었던 것일까.

‘대부분은 억겁의 시간을 준다 해도 저 중 하나조차 익히지 못할 터인데.’

인간이란 참으로 기묘한 존재였다.

원래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눈앞의 인간이 인류의 한계와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었다는 것을 새삼 깨닫자 얀은 묘한 흥분과 즐거움까지 느낄 수 있었다.

“집중해라. 기껏 알려 주고 있는데.”

호진은 말과는 달리 얀의 빈틈을 날카롭게 찔러 들며 말했다.

이에 얀은 그것을 어렵사리 막아내며 답했다.

“그저 감탄하고 있었을 뿐. 전부 보고 듣고 있다.”

“그래?”

호진은 되물으며 중얼거렸다.

그러곤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앙코르 공연을 할 맛이 나겠군.”

“앙코르?”

“이전까지 보여 준 걸 다시 보여 준다는 거다.”

“그렇다면 지루하겠는데.”

놀라기는 했다지만 이미 한번 본 기술들은 더 이상 위협적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애초에 지금까지 호진이 보여 준 검술 중 유효한 타격은 몇 개 되지 않았고 말이다.

이에 호진은 웃음을 흘리며 단언했다.

“꼭 그렇지만도 않을 거다.”

찌르기가 막히고 잠시나마 검을 멈췄던 호진이 자세를 잡는가 싶더니, 또다시 신형을 감추자 그곳에는 호진의 읊조림만이 남았다.

“지금부터가 진짜니까.”

지금부터 그가 보여줄 것은 검술과 검술을 융합하는 극한의 기교.

100여 개가 넘는 전혀 다른 악곡을 한데 모아 연주하는 괴상한 교향곡.

호진만의 오리지널.

검술들의 매시업(Mashup)이었다.

***

“저게 뭐야…….”

용재가 멍하니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챙

날아든 단검에서 불꽃이 튀는가 싶더니 용재를 향해 날아들던 공격을 빗겨냈다.

이어 도훈이 그의 옆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뭐 하나. 집중해라.”

“아니 저 미친 인간 좀 보라니까.”

도훈이 힐끔 시선을 돌려 전투가 벌어지는 곳을 향했다.

그제야 용재가 무얼 말하는지 알 수 있었다.

“괴물이군.”

자신들이 상대 중인 악몽의 형상을 한 괴물들보다도 더한 괴물이 그곳에 있었다.

─촤르르륵 캉!

검을 휘두름에 주변의 대기가 진동하고 땅이 흔들렸다.

호진은 지켜보는 이들이 도저히 종잡을 수 없는 변칙으로 신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저것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뱀처럼 휘어지는 검에서는 남부 사막지대 유사의 묘리가 담겼다.

숲의 흙내음이 묻어나는 동부의 신비가 검 끝에서 피어오른다.

정형화되고 체계적인 검술은 제국의 그것이었고, 무겁고 단단한 일격에는 북부의 강철 같은 불변을 연상할 수 있었다.

물론 검술에 조예가 없는 도훈은 그런 세부적인 사항을 알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저 검술들 중 무엇 하나도 자신은 제대로 익힐 자신이 없다고.

그러던 중 호진이 잠깐 물러나는가 싶더니 무언가 신과 대화를 나눴다.

그러곤.

호진의 몸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다음 순간 도훈은 볼 수 있었다.

백 명이 넘는 검사의 환영을 말이다.

호진은 그가 습득한 결전기 혹은 오의라 부를 수 있는 기술들을 한 호흡 만에 끌어냈다.

그러자 그 모든 검술들이 차례대로 신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호진이 휘두르는 검 끝에서 대륙의 수많은 검술들이 쉴 새 없이 형상화됐다.

고금을 일컬어 영웅이라 불린 자들이 지금 이 순간 한자리에 모여 하나의 적을 상대한다.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장면이었다.

─서걱

얀이라 불린 신의 형상이 조금씩 검에 베이고 찢겨 나갔다.

이전까지 호진의 검을 어떻게든 막아냈었지만, 이제는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끝낼 수 있나?”

도훈이 생각하던 것을 용재가 입 밖으로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그들의 맞은편에 있던 주교가 비릿하게 웃으며 말을 건네 왔다.

“그렇게 보이시나요?”

“…….”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호진과 얀의 싸움을 지켜보는 주교.

그를 따르는 악몽과도 같은 사신들 또한 전투를 멈추고 그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도훈이 주교의 말에 답하지 않았음에도 주교는 즐겁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한 가지 착각하시는 게 있으신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지.”

“미몽과 허상은 ‘달콤한 미몽’의 권능일 뿐.”

주교는 무엇이 그렇게 즐거운지 계속해서 빙글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이를 지켜보던 도훈의 미간이 구겨지려는 그때였다.

주교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아직 저의 주신께선 권능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콰앙

돌연 굉음과 함께 호진의 공격이 멈췄다.

아니, 호진의 모습이 사라졌다.

‘어디에?’

급히 호진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도훈은 그 모습을 간신히 발견할 수 있었다.

얀과 한참이나 떨어진 곳에서 먼지구름이 피어오르며 신전의 기둥이 부서졌고, 그 아래에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사람이 보였다.

호진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도훈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

보지 못했다.

피한 것은 그저 운에 불과했다.

그동안 쌓아 올린 격과 본능에 의한 반사적인 움직임.

그것들이 호진의 목숨을 살렸다.

다만.

─툭

왼손이 축 늘어졌다.

마치 신경이 끊겨버린 것처럼 아예 감각이 느껴지지 않았다.

왠지 모르게 알 수 있었다.

왼손에 깃든 생명을 빼앗겼다는 것을.

“……뭘 한 거냐.”

호진의 물음에 얀은 놀라며 답했다.

“그걸 피할 줄이야. 격이 높은 신들조차도 이것만큼은 두려워하거늘.”

얀의 뒤로 펼쳐진 손들의 수인이 조금씩 형상을 바꿨다.

그와 동시에 얀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난 전쟁에서 죽지도 않는 신이라는 놈들을 누가, 어떻게 봉인했다고 생각하나?”

죽음을 먹는 신.

고대신조차 집어삼킨 권능을 지닌 자.

얀이 호진을 향해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나다.”

그의 말투는 오연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을 나무랄 수 없었다.

“오직 나만이 신들에게조차 죽음과도 같은 영원을 선물할 수 있다.”

그저 손가락의 모양을 바꾸는 것만으로 필멸자의 생명을 앗아간다.

확정된 죽음이 그의 선고대로 이 세계에 내려진다.

태어날 때부터 죽음과 함께하고 죽음을 다뤄왔던 자.

그의 권능은 죽음을 수확하는 보이지 않는 사신.

그것이 그의 권능이었으니.

“어처구니가 없네.”

호진은 얀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상처투성이이던 얀의 몸이 씻은 듯 나아 있었다.

자신에게서 빼앗은 생명력으로 몸을 회복한 것이다.

부조리하기 그지없는 능력이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저 부조리함이야말로 그가 신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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