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화. 지상낙원 (4)
“…나라.”
어디선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린다.
“일…… 나라.”
누굴까.
한참 단잠을 자고 있었는데.
대학교에서 과 생활도 하고, 연애도 하고 동아리도 들어갔다.
검도부의 에이스라 불리며 대회에서 우승도 했다.
누군지 몰라도 자기를 좀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
안 그래도 방금 여자 친구랑 입맞춤을 하려던 참…….
“일어나라.”
─짜악
날카로운 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뺨이 화끈거렸다.
얼굴에 냉수라도 쏟아진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으아아아…?”
─쏴아아아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고 상의가 축축했다.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다 싶었는데 진짜였다.
“이게 뭔……?”
얼떨떨한 기분으로 눈을 끔뻑이던 그때였다.
용재는 왼쪽에서 풀 스윙으로 날아오던 손바닥을 반사적으로 낚아챘다.
“아, 일어났나?”
“도훈 아저씨?”
용재는 담담하게 손을 거두는 도훈을 바라보며 멍하니 그를 불렀다.
무슨 상황인 걸까.
“어라? 전 분명 방금까지 여자 친구랑 키스를…….”
“꿈인 게 당연하지 않나. 넌 살면서 여자 친구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했다.”
“……맞네.”
묵직한 팩트에, 용재는 그제야 꿈과 현실을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전혀 알 수 없는 공간이다.
어둡고 불그죽죽한 음침한 공간.
그때 귓가를 파고드는 굉음이 있었다.
─카랑!
이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푸른색 빛이 터져 나오는가 싶더니 공중에서 날카로운 불꽃이 튀어 올랐다.
호진이었다.
그의 애검 청성은 보기만 해도 시린 푸른색의 냉기를 흩뿌리며 정체불명의 적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으음……?”
아직도 꿈은 아닐 텐데 도통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안 갔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면.
“위험한 상황이구나. 지금.”
“그래. 그러니까 정신 좀 차려라.”
도훈은 가볍게 일갈하며 용재의 시선을 돌리며 이어 말했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대충 다 끌어모았다.”
도훈은 은색 실에 사람들을 굴비처럼 줄줄이 묶고 있었다.
그들은 다들 어딘가 약이라도 한 사람처럼 헛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중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얼굴들도 있었다.
“에우리우스? 그리고…… 예은 누나!”
용재는 그제야 몸을 벌떡 일으켜 격을 끌어올렸다.
그의 손에서 따스한 기운이 흘러나와 예은에게 들어가자, 상처가 아물고 그녀의 창백하던 안색에 생기가 돌아왔다.
용재는 이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악물며 자신의 격을 더욱 그녀에게 불어넣었다.
이를 지켜보던 도훈은 차갑게 말했다.
“뭐 하는 거냐.”
“누나 팔을…….”
“이미 늦었다. 경험하지 않았나.”
가을의 할머니도 그랬듯, 이미 절단된 신체 부위를 회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또 다르잖아요.”
“…….”
사도가 되며 인간의 탈을 한 꺼풀 벗어던진 용재였다.
이전에 불가능했다고 지금도 못 하리라는 법은 없으리라.
용재는 그렇게 믿으며 어금니를 악물어 힘을 끌어올렸다.
이마에는 핏발이 서고 등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용재가 안간힘을 쓰던 그때였다.
“처음에는 골격이다.”
예은의 절단된 팔 부위를 따라 은색의 실이 실타래처럼 뭉치며 뼈 모양을 형상화했다.
도훈이었다.
그는 이어서 그것 위에 새로운 실들을 이으며 말했다.
“그다음은 동맥이다. 피가 어디서 흘러들어와 어디로 빠져나가는지 봐라.”
용재는 꿈틀거리는 실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바라봤다.
그 흐름을 머리에 때려 박았다.
“그러고 나서 근육과 피부다. 이제 해봐라.”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예은의 팔을 이루었던 실이 회수됐다.
뼈와 핏줄 그리고 근육.
용재는 이미지를 그렸다.
예은이 활을 당길 때 팽팽하게 당겨지던 어깨와 근육을.
유연하게 휘는 관절을.
화살을 걸던 가늘고 길쭉한 손가락도 잊지 않았다.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니, 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환한 빛이 터져 나오며 그 자리를 메웠다.
그리고 잠시 후 예은의 어깨 아래로 새것과 같은 팔이 생겨났다.
“해…… 냈다.”
용재가 어안이 벙벙하게 중얼거리자, 도훈이 그런 용재의 머리를 툭 치며 말했다.
“고생했다. 다 됐으면 정신 똑바로 차려라.”
“예? 뭐를…… 아.”
고개를 든 용재는 곧장 도훈의 말을 납득했다.
어느새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정체불명의 괴물들.
눈알들이 가득히 박힌 꿈틀거리는 거머리.
사람의 얼굴이 달린 거대한 거미.
문어 얼굴을 한 거대한 촉수 괴물까지.
그것들은 마치 꿈에서 나올 법한 악몽과도 같은 형상들을 하고 있었다.
“다들 생긴 게 살벌하네.”
용재의 중얼거림에 누군가 웃음을 흘렸다.
웃음이 나오는 쪽을 바라보자 괴물들 틈으로 하얀 사제복에 붉은색 띠를 몸에 두른 주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형상화한 사신들입니다. 죽음으로 인도하는 천사들이라고 할까요. 그들의 생김새가 흉측한 건 그들의 잘못이 아닌 인간들의 탓이지요.”
주교는 씁쓸하다는 듯 말을 하다가 돌연 활짝 미소 지으며 이어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흥분과 열의가 담겨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젠 끝입니다! 더 이상 죽음은 두려움이 아닌 축복이 되어 지고한 행복이 될 테니 말이죠. 이들은 지금부터 사신이 아닌 천사가 될 것입니다!”
“아, 어제 봤던 주교 아저씨다. 어젠 분명 여신님이니 뭐니 하시더니. 오늘은 괴물들 사이에서 나오시네.”
“……듣기는 하신 겁니까?”
“뭘 들어요? 그보다 그새 개종하신 거예요? 떡볶이 준다고 교회 따라가는 초등학생도 아니고. 쯧쯧.”
용재가 혀를 차자 주교는 웃음을 지은 채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무슨 말인지 정확히는 몰라도 굉장히 모욕적인 언사임은 분명했기에.
그 얼굴은 순식간에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가라. 목숨만 붙여서 잡아 와라.”
그 명령에 괴물들이 일사불란하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용재는 이에 지지 않고 불퉁하게 말을 뱉어냈다.
“할만 없으니까 화내기는. 제가 왼쪽?”
“내가 오른쪽을 맡지.”
도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단검을 양손에 쥐었다.
역사에 영원히 기록될 두 신들의 싸움이 벌어지던 한쪽 구석.
그곳에서도 또 다른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
─콰앙
폭음과 함께 신전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호진의 입꼬리에 가는 호선이 그려졌다.
이를 지그시 바라보던 얀이 말했다.
“그대가 원하던 대로 권속들이 정신을 차렸나 보군.”
“어, 그런가 봐.”
호진이 신전에 묵직하게 깔린 얀의 신격을 밀어내자 도훈이 가장 먼저 정신을 차렸다.
예상보단 늦었지만, 용재도 무사히 깨어난 듯하고.
이제 저쪽에 대한 걱정은 덜어도 되리라.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까.”
얀은 무심히 중얼거리며 합장을 했다.
또다.
아까부터 이것에 애를 먹던 호진은 이를 악물었다.
[죽음이 가로되 나는 빗살처럼 천 번을 내찌르는 전신의 창이요.]
머리에 울리듯 손에 잡힐 듯 형상화된 말.
격이 담긴 말에는 힘이 있고, 그 힘은 격에 따라 각기 다른 위력으로 형상화하니.
장담컨대.
─슉 슈슉
녀석의 말은 호진이 경험한 그 어떤 공격보다 위험한 것이었다.
“크으윽.”
호진은 날아드는 황금의 창들을 막아내며 신음을 흘렸다.
창 하나하나가 신격을 찔러 죽인다는 도훈의 미스틸테인과 비슷했다.
그런 것들이 바닥에 쏟은 쌀알처럼 무수히 그리고 무심하게 호진을 향해 쏘아져 내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이루어진 천 번의 찌르기.
모조리 쳐냈음에도 불구하고 팔에 생채기가 생겨났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피가 살결에 맺히기도 잠시 상처는 금방 아물었다는 점이다.
호진의 회복 능력은 이미 어느 신격 못지않았으니까.
─스륵
호진은 공격을 막아냄과 동시에 환령보를 밟았다.
순식간에 놈의 지척까지 파고든 호진이 검을 휘두르려던 순간.
[죽음이 가로되 나는 손에 쥘 수 없는 허상이니.]
검이 허공을 갈랐다.
그곳에 마치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 텅 빈 공간만이 호진을 반길 뿐이었다.
다음 순간.
[죽음이 가로되 나는 어떠한 형상도 될 수 있느니라.]
용의 발톱이 호진이 있는 곳을 갈라놓았다.
호진은 다급하게 이화접목을 사용해 그 공격을 흘려냈지만, 그럼에도 한참이나 튕겨 나가 신전의 기둥에 부딪히고서야 멈출 수 있었다.
부딪친 등이 욱신거렸지만 그보다 관절이 삐걱거리는 느낌이 더 문제였다.
‘완벽하게 흘린 줄 알았는데.’
호진은 쓰게 웃으며 앞을 바라봤다.
어느새 용의 형상에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얀이 그를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필멸자의 몸으로 격의 벽을 뛰어넘은 자여. 나는 그대를 높이 산다.”
“……그건 또 영광이군.”
호진은 청성을 고쳐 잡으며 비꼬듯 답했다.
그럼에도 얀은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오래전에도 그대와 같은 존재가 있었다. 인간의 몸으로 신격을 얻어 신을 죽이던 자였지. 그대는 그자를 떠올리게 한다.”
“근데?”
“그대는 분명 그자에 준하는 강인한 존재가 될 것이다. 지금에라도 나와 손을 잡는다면 여태 있었던 일들은 신경 쓰지 않으마. 난 진실로 그대와 함께하고 싶다.”
얀의 말을 듣던 호진은 잠시 고개를 숙이고 침묵했다.
이를 고민한다고 여긴 얀이 기다리기도 잠시.
“……푸핫.”
호진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이에 얀은 아까보단 다소 차가워진 음성으로 말을 뱉었다.
“……그 웃음은 무슨 의미인가?”
“아니, 미안하군.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말이야.”
“…….”
자신을 지그시 응시하는 얀을 향해 호진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말했다.
“그니까. 지금 말하는 게 너희들의 전쟁에서 실컷 입맛대로 써먹은 검의 교단의 초대 교주 게일을 말하는 거잖아? 마지막에는 사냥이 끝난 사냥개처럼 처리당한.”
“……어디서 들었지?”
얀의 음성이 한층 더 낮고 무거워졌다.
이에 호진은 즐겁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네가 나를 그렇게 써먹기 좋은 말로 보고 있다는 게 중요하지.”
“예시가 잘못됐군. 오해다. 나는…….”
뭔가 이야기를 하려던 얀은 돌연 말을 멈추더니 손을 모아 합장했다.
수십 개의 손이 수인을 그려내며 덤덤히 말했다.
“아니, 됐다. 의미 없는 이야기군.”
“역시 신이라 그런가. 말이 잘 통하네. 그런 의미로 좋은 걸 보여주지.”
게일의 신역, 가면무도회.
호진은 그곳에서 익힌 기술들을 자신에게 맞게 변형시켰다.
이제 신을 상대로 그 기술들을 써먹어 볼 셈이었다.
게일이 안다면 무척 기뻐했으리라.
호진은 자신의 격을 더욱 끌어올렸다.
게일을 흡수하며, 또 각 도시들에서 신앙이 두터워진 덕에 한층 더 커진 호진의 세계는 어느덧 바다처럼 크고 깊어져 있었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기운이 주변에 흩뿌려진 얀의 격들을 집어삼키듯 씻어냈다.
잠깐이지만 자신 주변의 격까지 밀어낸 기운에 얀은 진심으로 놀랐다.
“……내가 잘못 보고 있었군.”
호진이 손에 쥔 청성에 심해와도 같이 짙푸른 군청색의 기운이 머금어졌다.
반짝이며 흩뿌려지는 냉기 조각들이 푸른 기운에 반사되어, 마치 밤하늘의 은하수처럼 빛났다.
이어서 주변에 퍼져나가는 검은 안개.
라멜의 권능이 사방에 흘러나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얀의 목덜미에 차가운 기운이 서렸다.
정신을 차리니 하반신이 꽁꽁 얼어붙어 움직임도 봉해진 상태.
얀은 놀람을 머금으며 중얼거렸다.
“이미 전성기의 검의 교단의 초대 교주를 뛰어넘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