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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226화 (226/241)

226화. 지상낙원 (3)

“여긴…….”

호진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최소 수백의 사람들이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누군가는 허공을 응시하며 다른 이들의 이름을 불렀고, 또 누군가는 눈을 감은 채 옹알이를 하고 있었다.

그 형태도 수백 가지.

호진은 그들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일종의 환각, 아니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을 살피던 호진은 우뚝 멈춰 섰다.

“스승님!”

사람들 사이에서 에우리우스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호진은 급히 그에게 달려가 그를 흔들어 깨웠다.

“괜찮으십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그러나 그런 그의 목소리가 닿지 않는 듯 에우리우스는 여전히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답할 뿐이었다.

“전하. 그게 아니지요. 이렇게 검을 쭉 뻗으시면 됩니다. 어렵지 않습니다.”

황제의 어린 시절, 그에게 검술을 가르쳤다던가.

아무래도 그때의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로 깨지 않는다면 호진에게도 방법은 있었다.

‘이 환상도 일종의 권능일 터. 그렇다면…….’

자신의 신격을 불어넣어 밀어내거나 베어버리면 그만이었다.

호진은 붙잡은 에우리우스를 향해 자신의 신격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그러자 뒤에서 이를 지켜보고 있던 주교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그런다고 깨어날 리가 없습니다. 무엇보다 지금 그 남자를 깨웠다가는…….”

─움찔

주교가 말을 끝맺기도 전 호진에게 붙들려있던 에우리우스가 발작하듯 몸을 떨었다.

그러곤 천천히 감고 있던 눈을 뜨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주교는 입술을 비뚜름하게 그어 올렸다.

“후회하실 텐데요.”

“에우리우스 님! 정신이…….”

에우리우스를 부르던 호진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그의 동공에 푸른색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음 순간, 호진은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고 그와 동시에 에우리우스의 검이 호진이 서 있던 장소를 갈랐다.

“에우리우스 님?”

호진이 멍하니 중얼거리자 에우리우스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의 눈동자에서 귀기 어린 푸른색의 안광이 터져 나왔다.

“오오오오오오오!”

에우리우스가 짐승 같은 포효를 토하며 검을 휘둘렀다.

─서걱

주변에 있던 한 노인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그러기도 잠시, 에우리우스는 곧장 다른 표적을 향해 내달려 검을 휘둘렀다.

노인의 옆에 앉아 있는 한 소녀였다.

검이 소녀의 정수리를 향해 떨어지던 찰나.

─카랑

“이게…… 무슨 짓입니까!”

호진은 에우리우스의 검을 막아내며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어째서 에우리우스를 깨웠는데 이런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의 연속으로 도저히 머리가 따라가질 않았다.

에우리우스를 베어야 하는 걸까?

벤다면 어디를?

호진은 그저 에우리우스의 검을 막는 것 이외에는 어떤 판단도 내리기 어려웠다.

그러던 그 순간.

[현실에 지친 자에게 행복한 꿈을]

[괴롭고 아픈 자에게 평안한 안식을]

[죽음이 목전에 이른 자는 내게 오라]

머리에 울리듯.

눈에 잡힐 듯.

성스러운 말들이 호진의 귓가를 울렸다.

그리고 동시에 어둠 속에서 무언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음을 깨달았다.

붉은색의 빛 아래 한 형상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오오!”

주교는 황급히 바닥에 몸을 바짝 붙이며 그것을 향해 절을 올렸다.

성스러운 황금의 관을 뒤집어쓴 존재.

화려한 예복을 걸치고 수십 개의 팔을 합장하고 수인을 맺고 있는 존재.

그것은 죽음을 관장하는 신.

“죽음은 끝이 아닌 시작이니. 나의 안에서 영원한 지고의 행복을 누리리라.”

죽음을 먹는 신, 얀.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

“끄륵.”

얀이 등장하자 에우리우스가 귀기 어린 눈을 스르륵 감더니 바닥에 쓰러졌다.

그러곤 홀린 듯 다시 무언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여신이시여…….”

다시금 환상 속의 세상에 빠져든 것이었다.

호진은 그런 에우리우스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스륵

얀이 걸친 황색의 예복이 바닥에 끌리며 소리를 냈다.

예복의 아래로 언뜻언뜻 촉수와 살덩어리로 이루어진 이형의 하체가 보였다.

그의 얼굴은 앞서 보았던 동상과 마찬가지로 녹인 쇠를 얼굴에 부은 듯, 녹아내린 살점과 쇳조각이 엉켜 가면과도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눈도 코도 귀도 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호진은 얀과 시선을 마주쳤다.

호진이 그를 바라보듯, 얀도 오롯이 호진을 바라봤다.

먼저 말을 건넨 건 얀이었다.

“길을 잃은 영혼인 줄 알았거늘. 이미 깨달음을 얻은 신격이었나. 어째서 이런 곳까지 온 거지?”

호진은 그를 경계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 의지로 왔다기보다는 끌려온 게 맞는 것 같다만.”

도저히 말이 곱게 나오질 않았다.

모든 상황이 호진의 신경을 예민하게 만들고 있었다.

‘언제냐.’

호진은 몸을 짓누르는 압박감을 버텨내며 검을 양손으로 강하게 쥐었다.

놈이 적의를 드러내는 순간 곧장 반격할 셈이었다.

그러나 이어 나온 그의 대답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그런가. 미안하게 됐군. 나의 신도가 실수를 한 모양이다.”

“아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얀의 대답에 주교는 머리를 바닥에 피가 나도록 찧으며 사과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은 공포와 죄송함 그리고 다급함으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무슨 상황인 걸까.

호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뱉으며 호흡을 갈무리했다.

그러자 머리가 조금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지금 필요한 것은 대화였다.

“나는 여신에게 향하다 우연히 이곳을 지났을 뿐이다. 당신에게 볼일은 없으니 내 사람들만 돌려준다면 물러나겠다.”

머리가 식으니 알 수 있었다.

이전까지 조우했던 고대신들과는 기세부터가 전혀 달랐다.

예전의 호진이었다면 뭣도 모르고 일단 부딪쳤을 것이다.

그러나 신격을 확고히 다진 지금은 알 수 있었다.

눈앞의 신격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존재인지.

공기가 무겁고 살이 칼날에 저미듯 따끔거렸다.

압도적인 감각이 몸을 짓눌렀다.

호진의 눈앞에 있는 것은 진정한 신의 진체이자 본신.

솔직히 말하면 눈앞의 괴물을 상대로 이길 자신이 없었다.

지그시 호진을 바라보던 얀이 고요하게 말했다.

“알겠다. 그리하고 싶다면 그리하거라.”

너무나도 손쉽고 담담한 허락에 호진은 잠시 멈칫했다.

“……진심인가?”

“자네가 말한 사람들은 이들이겠지.”

얀의 뒤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왔다.

텅 빈 동공의 용재와 도훈이었다.

그들 역시 무언가 좋은 꿈을 꾸는 듯 행복한 미소를 입가에 걸고 있었다.

“필멸자라지만 이들도 격을 지닌 사도들. 내게 깃들게 한다면 분명 큰 힘이 되겠지. 다만 그쪽에게 미움을 받고 싶지는 않군.”

“……고맙다.”

호진은 얀이 자신에게 베푸는 호의에 당황하면서도 감사를 표했다.

“여자와 그 기사도 마찬가지. 원한다면 얼마든지 데려가거라.”

정말 이게 끝인가?

호진은 용재와 도훈 그리고 예은과 도훈을 자신의 쪽으로 끌어왔다.

그럼에도 목이 까끌거리는 기분이 남았다.

이곳의 남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

궁금해해서는 안 됐다.

분명 그 대답을 듣게 된다면 호진은 이곳에서 조용히 물러나지 못할 것이다.

그렇기에 호진은 이를 악물고 다른 질문을 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만든 거지?”

호진의 질문에 얀은 자애로움을 담아 입을 열었다.

“죽음이란 나에게로 귀의하는 진정한 안식이지만, 필멸자들은 그것을 두려워하곤 하지. 그렇기에 그들에게 보여 주는 거다. 죽음이란 두려운 것이 아닌 지고의 행복임을.”

얀은 행복에 겨워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사람들은 향수에 젖어 혹은 지금은 사라진 행복한 미래를 꿈꾸며 미몽을 거닐지. 이보다 죽음에 가까운 형태는 없으리라. 죽지 않는 존재를 먹는 게 쉽진 않았지만. 덕분에 좋은 힘을 얻을 수 있었다.”

“……?”

호진은 덜컥 몸을 멈추며 얀을 돌아봤다.

‘아아.’

그러곤 깨달았다.

선신인 얀의 모습이 어째서 저런 이형의 형태를 하고 있는지.

힘을 잃어 가는 중이라던 선신이 어째서 이 정도로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

─꿈틀

얀의 뱃가죽의 피부 아래 무언가가 비추는가 싶더니 이질적인 눈동자가 피부 위로 뒤룩거렸다.

“너…… 먹었구나.”

“먹었다. 힘을 얻기 위해서. 고대신 ‘달콤한 미몽’을.”

***

모든 게 이해됐다.

어째서 죽음의 신이라는 얀이 환각을 다루는 권능을 쓰고 있는지.

힘을 잃어가는 중이라 알려진 선신이 이토록 강대한 신격을 지니고 있는지 말이다.

얀은 고대신들 중 하나를 먹음으로써 그 권능과 격을 자신의 것으로 삼은 것이었다.

“반신반의했지만 생각보단 잘되더구나. 이것도 위대하신 여신님 덕분이지.”

이전과는 달리 얀은 처음으로 빈정거리는 투로 말을 뱉었다.

그 말속에는 시기와 질투, 그리고 비웃음을 섞여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을 초월한 자처럼 말하던 방금까지의 말투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말 그대로다. 릴리 그 아이가 아니었다면 떠올리지 못했을 방법이었으니까.”

얀은 그렇게 답하며 에우리우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정작 그 아이는 너무 욕심을 내서 잡아먹혀 버린 듯하지만.”

‘잡아먹혔다고?’

그게 무슨 말일까.

여신이 다른 고대 신에게 먹혔다는 걸까.

호진의 생각이 이어지던 그때였다.

“궁금증은 해결됐나? 나도 슬슬 식사를 이어 나가고 싶은데.”

얀이 조금은 질책하듯이 말했다.

호진은 얀이 바라보는 것으로 느껴지는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몸의 하반신이 뜯겨나간 채, 간헐적으로 웃음을 흘리고 있는 한 남자가 있었다.

“성기사 아제토……?”

그 중얼거림을 들은 주교가 여전히 고개를 바닥에 박은 채 답했다.

“그 여자가 사라진 탓에 양질의 제물을 구하기 어려워서 그를 대신 바쳤습니다. 일이 이리될 줄은 몰랐지만, 결과적으론 다행이군요. 저도 호진 님과 싸우고 싶진 않으니까요.”

호진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호진은 뒤를 돌아 얀을 바라보며 다시금 물었다.

“깜빡했는데, 여기 에우리우스를 깨우니까 뭔가 난리를 치던데 고쳐줄 수 있을까?”

“그건 내 힘으로는 불가능하다. 그의 광란은 권능도 무엇도 아닌 격의 충돌로 인한 부산물, 찌꺼기일 뿐이니. 미몽의 권능으로 잠재웠을 뿐. 깨어난다면 똑같이 행동하겠지.”

“이런, 큰일이네. 그럼 여기서 빠져나간다면 미몽의 권능은?”

“풀릴 거다. 위에 있는 신전까지가 내 권능이 닿는 부분이니.”

“……그래? 어떡하지. 그럼 나갈 수가 없겠는걸.”

호진은 곤란하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

“…….”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며 신전에는 적막함이 흘렀다.

잠시 지그시 호진을 바라보던 얀이 덤덤하게 되물었다.

“너는 정말 조용히 물러나고 싶은 게 맞는가?”

“아. 미안.”

호진은 기다렸다는 듯 사과했다.

그러곤 검의 끝을 얀에게 향하며 신격을 끌어올렸다.

─화악

날카로운 기운이 폭풍처럼 몰아쳤다.

주변을 억누르던 무겁던 공기와 악취가 갈기갈기 찢겨 나갔다.

“아무래도 아니었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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