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 지상낙원 (2)
성국은 현재 봉문 상태.
누구도 들어올 수 없고 나갈 수 없는 곳이다.
그런데 주교의 입에서 에우리우스와 예은의 이름이 나왔다는 건 어떤 의미인 걸까.
호진은 긴장하며 주교를 바라봤다.
주교는 활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정말 잘됐습니다. 그분들의 행적이라면 제가 잘 아니까요. 신탁 이행을 지체할 필요가 없어져서 다행입니다.”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 겁니까?”
호진의 물음에 교황은 검지를 입가에 붙이며 말했다.
“성으로 몰래 들어오던 그들을 제가 우연히 발견했었습니다. 덕분에 몰래 그들을 빼돌릴 수 있었죠.”
“빼돌렸다 하시면……?”
“지금쯤이면 두 분 다 브리츠에 도착하지 않았을까요? 참고로 이건 비밀이니 조심해 주십시오.”
“……주교님. 제가 듣고 있습니다만.”
성기사 아제토가 떨떠름하게 답하자 주교가 흠칫 놀라더니, 이윽고 아제토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곤경에 처한 이를 돕고, 남에게 해가 될 말을 해선 안 되니. 그것이 복된 길입니다. 형제님.”
주교의 간절함이 담긴 음성에 아제토는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저는 아무것도 못 들었고,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여기 더 있다가는 제 명이 줄어들겠군요.”
그렇게 답한 그는 몸을 돌려 신전을 빠져나가 버렸다.
“휴우, 아제토 형제께서 이해해주신 것 같아서 다행입니다. 형제님들도 이제 그만 푹 쉬십시오.”
“감사합니다.”
아무래도 두 사람은 주교의 배려를 받아 성국의 수도로 향한 모양이다.
호진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한시라도 빨리 만나면 좋겠지만…….’
아직 첫날이었다.
에우리우스를 데리고 시리온으로 가기까진 6일이나 남은 상황.
마음을 졸이기에는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의외로 성국까지 빠르게 도착했으니, 조금은 마음을 놓아도 될 것이다.
호진은 주교의 배려를 받아들여 일행들과 함께 신전의 안쪽 방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피로를 풀었다.
예상보다 일이 잘 풀렸기 때문일까.
아니면 신전의 적막한 고요 덕분일까.
눈꺼풀이 유독 무거운 느낌이었다.
호진은 오랜만에 깊은 잠에 들 수 있었다.
***
─툭 투두둑
“으음?”
호진은 비몽사몽인 채 얼굴을 더듬었다.
뜨겁고 끈적거리는 액체가 손끝에 묻어났다.
그리고 이어서 비릿한 혈향이 느껴졌다.
방금 흘러내린 피가 분명했다.
어째서 이런 것이 얼굴에 묻어 있는 걸까.
‘난 신전에서 자고 있었을 텐데…… 어?’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호진이 눈을 부릅뜨며 상반신을 튕기듯 일으켰다.
그러곤 검을 반쯤 뽑아 들고 주변을 살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의외로 주변은 너무나도 고요했다.
마치 깊은 산속의 눈 덮인 밤에 홀로 있다면 이럴까.
그 적막함에 호진은 문득 소름이 돋았다.
그러기도 잠시, 호진은 그제야 자신의 침상 옆에 쓰러진 한 사람을 보았다.
너무 기척 없이 죽은 듯 쓰러져 있어서 눈치채는 게 늦은 것이다.
호진은 조심스레 다가가 그를 살폈다.
등에 길고 깊은 자상이 나 있고, 왼쪽 어깨 아래로 있어야 할 팔은 보이질 않았다.
팔을 급히 지혈한 듯 보이는 천 조각에선 피가 배어 나오다 못해 바닥에 흐르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에 묻은 피는 이 사람의 것이리라.
얼굴이 바닥을 향해 쓰러져 있기에 호진은 조심스레 그 사람의 몸을 뒤집었다.
그리고 호진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예은 씨?”
이게 현실인지 꿈인지조차 구분이 가질 않아 머리가 멍한 기분이 들었다.
그저 지독한 악몽이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말이 되지 않지 않나.
왜 이 평화로운 신전에 다 죽어가는 예은이 있단 말인가.
그때였다.
죽은 듯 감겨 있던 예은이 힘겹게 눈을 뜨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호…… 진 님. 겨우 정신이…….”
“무슨 일입니까. 이게 무슨.”
호진은 인상을 찡그리며 다급하게 물었다.
재회를 고대했지만, 결코 이런 모습을 상상한 적은 없었다.
“기다려 주십시오. 용재가 금방 치료를…….”
“용재는…… 이미 끌려갔어요. 도훈 씨도요.”
“……예?”
호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방금 전에 느꼈던 적막이 왜 그리도 섬뜩했는지 말이다.
옆에서 잠들었던 용재와 도훈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호진 님이 제때 깨어나서…… 빨리 도망을…….”
“도망이라뇨. 예은 씨……?”
호진은 더 이상 묻지 못했다.
예은이 머리를 툭 하고 떨구었기 때문이었다.
가슴이 덜컹 떨어졌으나 자세히 살피니 아직 옅게 숨을 쉬고 있었다.
‘나로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해.’
지금 필요한 것은 용재였다.
정작 그 용재가 정체불명의 적에게 끌려간 모양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호진이 해야 할 것은 너무나도 분명했다.
‘용재와 도훈을 데려간 적을 죽이고. 예은을 치료한다.’
그녀를 둘러업은 호진은 재빨리 방을 빠져나왔다.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평안하고 달큰했던 신전의 공기에서 지독한 악취가 느껴졌다.
부패한 생선에서 날법한 비리고 역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
신전의 예배당에 들어선 호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달빛을 받아 신전 안을 비추는 스테인드글라스는 피에 젖은 듯 붉게 빛났다.
깔끔하던 신전의 내부는 허름했으며 거미줄이 처져 있을 정도로 낡아 있었다.
이곳이 정말 아까 전에 보았던 그곳이란 말인가.
호진은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듯 벽에 새겨진 조각들이 호진의 눈을 사로잡았다.
여신 릴리의 얼굴들이 모조리 부서져 바닥을 구르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분명 낮에 본 조각들이 분명했다.
호진은 예은이 흘린 핏자국이 그 조각을 향해 이어진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끝에는.
“죽음을 먹는 신, 얀.”
그 조각이 있던 위치에 처음 보는 형태의 조각이 있었다.
성스러워 보이던 황금관 아래에는 뜨거운 쇳물이 부어진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화려한 예복 아래에 밀랍처럼 솟아난 수십 개의 팔과 무수한 가시들.
그리고 촉수처럼 꿈틀거리는 이형의 하반신까지.
그것은 이미 고대신과 진배없는 모습이었다.
낮에 본 모습과 닮은 점이 있지만, 이미 이것은 선신의 범주에서 아득히 벗어난 이형이었다.
일찍이 보았던 아난타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호진은 꺼림칙함을 느끼면서도 조각상의 앞으로 다가가 그것을 건드렸다.
다음 순간.
─드르르르륵
조각상이 매끄럽게 밀려 들어가며 아래로 향하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예은이 흘린 핏자국은 그곳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올라온 것이리라.
“용제와 도훈도 이곳으로 내려간 거겠지.”
이 아래에 무엇이 있을지는 호진도 몰랐다.
다만, 그곳에 용제와 도훈은 물론이고 호진마저도 까무룩 속일 정도로 위험한 존재가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호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거침없이 칠흑같이 어두운 계단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자신이 커져야 할 것이 너무나 명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금이지만 그 걸음에는 분노가 섞여 있었다.
눈앞에서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자책과 자신의 사람들을 상처 입힌 적을 생각하면 머리가 뜨거웠다.
‘방심했어.’
충분히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내심 검신 정도가 아니면 자신을 이길 상대가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곳은 지구가 아니라 강력한 선신들과 고대신들의 본거지이다.
호진은 어금니를 물며 낮게 중얼거렸다.
“어디 얼마나 위험한 분인지 그 잘난 낯짝 좀 볼까.”
***
어두운 계단을 빠르게 뛰어 내려갔다.
좁고 깊은 통로는 마치 다른 세상으로 향하는 입구와 같았다.
마치 오래전 하픈덤의 안개 낀 해안가에서 지났던 터널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호진은 통로의 끝에 도달하고 바로 얼굴을 찡그렸다.
‘여기군.’
지독한 악취의 근원지.
신전처럼 보이는 이곳은 그 크기가 너무나도 광활했다.
호진의 눈으로도 꿰뚫어 볼 수 없는 짙은 어둠 아래 천장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높게 솟은 기둥들이 어둠을 받쳐 들고 있었다.
기둥에 달린 붉은빛을 내는 광석이 시야를 겨우 밝히고 있을 뿐이었다.
속이 뒤틀리는 듯한 악취에 호진은 고통을 느끼며 앞으로 나아가려던 순간, 등 뒤에서 예은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우리 어디가?”
지치고 갈라진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지만, 마치 아이처럼 해맑아 너무나 즐거워 보였다.
피를 너무 흘려서 환각을 보는 걸까.
호진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돌아보던 그때.
누군가의 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저벅
가벼우면서도 규칙적인, 격식 있는 걸음걸이.
호진은 그 걸음의 주인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주교님.”
“아니, 형제님이 어떻게 여기 계신 겁니까?”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주교의 모습에 호진은 이를 바득 갈았다.
다친 예은을 발견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예은과 에우리우스가 성국의 수도로 갔다고 한 거짓말을 한 사람이 바로 주교였으니까.
“아아, 뒤에 업고 있는 분은…… 그렇군요. 그분께서 기대하시던 제물이 사라져서 어디로 갔나 했더니 형제님을 모시러 간 것이었군요. 그리 급하게 가지 않으셔도 제가 모시러 갈 예정이었는데 말이죠.”
“…….”
대충 이해했다.
주교가 예은과 에우리우스를, 나아가 호진과 용재 그리고 도훈을 왜 이곳으로 데리고 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데리고 왔는지를 말이다.
뻔하지 않은가.
호진의 눈조차 속이는 허상, 제물, 주교.
신이었다.
신의 개입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건 아마…….’
신의 정체까지 대충 짐작이 갔다.
더 이상 듣고 싶은 것은 없었다.
이 자리에서 주교를 베어 없애고, 신이라는 놈을 찾아 용재와 도훈을 되찾으면 그만이었다.
호진이 검을 뽑으려던 그 순간 주교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따라오시죠. 그분에게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무래도 당신은 그분이 말씀하신 대로 특별한 존재이신 것 같으니.”
“내가 뭘 믿고 당신을 따라가야 하지?”
호진은 등을 보인 주교를 향해 차갑게 답했다.
이에 주교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이곳에서 길을 찾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물론 계속 돌아다니다 보면 그분께 도달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예은 양에겐 그리 시간이 많아 보이지 않는군요.”
“…….”
그 말대로였다.
등을 타고 전해지는 예은의 심장 고동이 점점 약해져 가고 있었다.
호진은 고민했다.
상대는 교묘한 속임수로 호진의 감각마저 속인 놈이다.
이상한 술책을 벌이기 전에, 당장 칼을 빼 들고 눈앞의 모든 것을 베어버리는 것도 방법.
그러나 호진은 만약에라도 자신의 사람들을 잃을 리스크를 짊어지고 싶지 않았다.
‘역시…… 방심했어.’
성국으로 들어온 순간, 이미 그는 적진 한복판에 있었던 것이다.
“안내해라.”
호진은 툭 하고 말을 내뱉으며 주교의 뒤를 따랐다.
주교는 거침없이 어둠 속을 향해 걸어 나갔다.
그런 그를 뒤따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호진은 들을 수 있었다.
─히히히히
사람들의 웃음소리였다.
“엄마. 엄마.”
“아이고 우리 애기 잘한다.”
“이겼다. 이겼어.”
“사랑해.”
웃음소리에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더욱 크게 들려왔다.
그 말소리엔 당연하게도 맥락이 없었다.
하지만 공통점은 있었다.
하나같이 행복하고 즐거운 음성, 그것은 행복에 젖은 자들 특유의 목소리였다.
“아빠…….”
뒤에 업힌 예은이 다시 중얼거렸다.
그제야 호진은 이 상황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 사람들은 지금…….”
“달콤한 꿈을 꾸는 중입니다. 아니, 달콤한 현실을 살아가는 중이죠.”
주교는 호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서 오십시오. 이 끔찍한 세상의 유일한 낙원. 죽은 자들의 신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