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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224화 (224/241)

224화. 지상낙원 (1)

성국의 관문 중 하나인 성채도시 카난.

그 도시의 중앙엔 거대한 백색의 건축물이 하나 있었으니, 그 이름은 데미테르 신전이었다.

“편하게 들어오십시오.”

아델은 환하게 웃으며 호진과 일행을 신전의 안쪽으로 안내했다.

“아.”

밖에서 봤을 때도 웅장함을 자랑하던 신전의 내부는 더욱 놀라웠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스테인드글라스는 신전 전체를 환하게 비췄고, 벽을 가득 수놓은 조각들은 살아 숨 쉬 듯 생생했다.

흔하지 않게 도훈이 감탄사를 터트릴 정도였다.

“아름답지요?”

“그렇군요.”

건물을 말하는 걸까 조각들을 말하는 걸까.

어쩌면 스테인드글라스일지도 모른다.

호진이 얼버무린 그때 아델이 이어 말했다.

“저 조각들은 500년 전부터 모든 주교들이 직접 깎아 만들고 있습니다.”

“굉장하군요. 그럼 주교님도?”

“예, 저도 만들고 있고말고요. 다만, 실력이 부족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겸손하시군요.”

호진은 조각들을 보며 진심으로 그리 생각했다.

어디 하나 부족한 게 없는 작품들뿐이었다.

다만 주교가 말한 대로 조각들은 일정 기점마다 조금씩 그 느낌이 변한다는 게 느껴졌다.

아마 조각을 하는 사람이 바뀐 탓일 터였다.

‘조각들은…… 경전의 내용인가.’

여신의 경전을 한 번도 본 적 없었음에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는데, 조각들이 연결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용은…… 얼추 알겠군.’

조각을 살피던 호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울타가 말해 준 선신들과 고대신들의 이야기.

그 이야기들이 조각과 스테인드글라스에 표현되어 있었다.

고대신들은 더 악하고 잔혹하게, 선신들은 더욱 자비롭고 경이롭게 그려진 것이 인상적이었다.

“호오, 관심이 있으신가요?”

호진이 조각을 꼼꼼히 살피는 것을 눈치챈 아델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이에 호진은 솔직하게 답했다.

“예, 조금은요. 이런 것도 자세히 보면 알 수 있는 게 있으니까요.”

“그렇군요. 혹시 어떤 부분이 그런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주교의 질문에 호진은 잠시 말을 멈췄다가 손가락을 뻗으며 물었다.

“예를 들어 저기 저분은 누구십니까?”

“저희의 주신이신 여신 릴리십니다.”

아델은 성호를 그리면서 기도를 올리곤 여신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그 대답에 호진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500년 전까지만 해도 릴리 여신님만 주신으로 모신 게 아니었군요.”

“……그걸 어떻게 아신 겁니까?”

아델이 놀라며 묻자 호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초기에 만들어진 조각들일수록 다른 다섯 선신들의 비중이 높더군요. 반면 최근에 제작된 것일수록 여신 릴리의 모습만 보였습니다.”

“이거야 참…… 예리하시군요.”

경전의 흐름상 신들의 시대를 다루던 부분에선 다섯 선신들이, 인류의 발전과 교훈을 다룬 부분에선 여신 릴리의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보니 당연시했던 점이다.

오히려 평소 당연하다 여겼기에 눈여겨보지 못한 부분.

열이면 열이 그냥 지나칠 만한 부분을 정확히 파악한 호진의 눈썰미에 아델은 감탄했다.

“맞았다니 다행입니다. 최근에 조각된 것은 여신님이 아니다 보니 확신은 못 했습니다.”

“아아, 제가 조각 중인 것 말씀이시군요.”

두 사람의 시선이 가장 끝에 있는 조각을 향했다.

그곳엔 여신의 형상 대신 화려한 예복을 입고 화려한 관을 쓴 남성의 형상이 있었다.

“죽음을 먹는 신, 얀. 신들의 전쟁에서 가장 활약했던 선신입니다.”

‘가장 활약했던 신은 검신 샤카하가 아닌가?’

호진은 의문이 차올랐지만, 우선은 질문을 참았다.

아직 검신과 자신의 연관성을 굳이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궁금하시다는 게 있다는 표정이시군요.”

“아뇨, 그저 왜 여신님이 아닌 얀 님을 조각하신 건지 궁금했을 뿐입니다.”

호진의 물음에 아델은 미소 지으며 답했다.

“혼란한 시대 아닙니까. 예로부터 저희는 주신뿐만이 아닌 다른 다섯 선신도 모셔 왔었으니까요. 때로는 자비보다도 강력한 힘이 더 위안이 될 때도 있으리.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호진은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자비와 평화를 상징하는 여신은 지금의 시기와 어울리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기도에 응하지 않는 여신이다.

‘다른 신에 대한 믿음이 커지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겠지.’

그러던 그때 아델이 인자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호진을 향해 말했다.

“저도 궁금한 게 있습니다. 여신께서 형제님을 부르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진짜입니까?”

어째서일까.

인자한 그 질문 속에서 날카로운 비수와 같은 예리함이 느껴졌다.

호진은 본능적으로 거짓을 말하면 안 되리라는 걸 느꼈다.

무슨 수인지는 몰라도 아델은 지금 진실과 거짓을 구별할 수 있는 게 분명했다.

호진은 신중하게 말을 골라 사실을 답했다.

“사실입니다. 저는 여신님의 은총을 입었으며 나아가 그분께 신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신탁이요?”

“성국의 교황님을 알현하는 것입니다.”

여신으로 향하는 길.

오래전부터 이어진 연계 퀘스트는 이제 그 끝을 보이고 있었다.

교황과 조우하게 된다면 분명…….

‘여신과도 만날 수 있게 되겠지.’

호진은 그렇게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정말이군요.”

아델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그러기도 잠시 표정을 갈무리하며 호진을 향해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형제님의 말씀을 의심한 것은 아니나 어려운 시기인지라…….”

“괜찮습니다.”

“이런 시기에 신탁을 받은 사람이 나오다니, 역시 여신께선 저희를 저버리지 않은 것이 분명합니다. 아아, 여신께 축복이 있으라.”

다행이었다.

방금 질의로 자신에 대한 경계가 많이 풀렸음이 느껴졌다.

호진은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하며 궁금하던 것들을 묻기 시작했다.

“그보다 조금 전의 시민들과 병사들은 어째서 서로에게 무기를 향한 겁니까?”

“그것은…….”

아델의 표정은 어두워지기도 잠시,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긴 이야기가 될 겁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말씀해 주시길.”

호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아델은 담담하게 현재 상황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

약 1년 전.

이 세상에 기이한 현상들이 벌어졌다.

지역 곳곳이 어디론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다른 세계와 이 세계가 이어지는 소동이 일었다.

누군가는 이것이 종말의 징조라 하였고, 누군가는 축복이라 하였다.

하지만 성국에게 있어서 이보다 흉조는 없을 터였다.

격변이 시작됨과 동시에 여신이 모습을 감춘 것이었다.

성국은 급히 나라의 문을 걸어 잠갔다.

여신의 부재 소식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누구도 성국을 들어올 수도 없고, 나갈 수도 없었다.

이런 행위 역시 신앙이 바닥칠만 한 것이었지만, 여신의 부재를 공고히 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세상은 내일 당장이라도 망할 듯했다.

땅은 시꺼멓게 죽어갔고 고대신들의 추종자와 마물들이 각지에서 들끓었다.

이런 상황에 여신의 부재 소식은 신앙의 뿌리가 뒤흔들릴 만한 문제였다.

그렇기에 성국은 봉문을 택했고, 그 판단은 결과적으로 옳았다고 볼 수 있었다.

성국이 일찍이 봉문을 한 덕에 사람들은 여신의 부재를 반신반의했고, 수천 년간 이어져 온 믿음을 쉽게 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졌다.

푸른 미치광이 병.

그 병이 그렇게 명명됐을 때쯤엔 이미 성국은 돌이킬 수 없는 수준이 되었다.

1년 전 그날 이후 나타나기 시작한 의문의 전염병.

처음에는 손에 꼽을 정도로 발병률이 미미했던 환자들이 어느 순간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병에 걸린 이들은 눈에서 푸른 안광을 뿜었고, 이지를 잃어버린 그들은 오로지 파괴와 폭력만을 일삼았다.

성국은 아무도 모르던 사이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시민들이 성국에서 멀어지려는 이유이자. 병사들이 그것을 막는 이유입니다.”

“…….”

호진은 잠시 침묵하다가 물었다.

“주교께서는 시민들을 잡아두는 게 옳다고 보십니까?”

병이 두려워, 그리고 병에 걸린 사람들이 두려워 이곳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이들이다.

그런 그들을 붙잡아 두는 것이 옳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이에 아델 또한 난감해하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시민들이 이곳을 못 나가게 하는 것은 교황 폐하의 명이기도 하지만 제 의지이기도 합니다.”

“그건 어째서죠?”

“신께서 힘을 회복하셔야 하니까요. 사람들이 떠난다면 신께서는 더더욱 약해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불행이 반복될 뿐입니다.”

“……?”

힘을 회복한다니? 여신은 실종되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호진의 의아한 표정을 본 아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분은 돌아오실 겁니다. 저는 그분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호진은 아델의 말을 들으며 팔짱을 꼈다.

아델의 믿음은 틀리지 않았다.

여신에게 신탁까지 받은 호진이다.

그녀는 모종의 이유로 자신의 성역에 문을 걸어 잠그고 모습을 감췄을 뿐이다.

마음 같아선 시민들이 이곳에서 도망치도록 돕고 싶었으나, 아델의 생각도 잘못됐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비전이 있는 것은 그의 쪽이겠지.

‘여기서 나서는 건 오지랖일까.’

호진은 망설였다.

아직 무언가를 선택하기엔 보고 들은 것이 적었다.

어찌 됐든 성국의 상황을 파악한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그나저나 주교님은 인망이 있으신 것 같습니다.”

고작 말 한마디로 죽기를 각오했던 시민들의 발걸음을 돌려놓았다.

검을 뽑았던 기사와 병사들의 무기를 내려놓게 했다.

그건 단순히 높은 지위를 지녔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호진의 질문에 아델은 쓰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저 이 못난 사람도 주교라고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따라주는 것뿐입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주교님.”

호진의 말을 끊으며 누군가 신전의 안으로 따라 들어왔다.

두꺼운 판금으로 된 갑옷과 새하얀 망토로 장식한 기사.

성문에서 보았던 성기사였다.

“아제토 형제님 아니십니까. 여기는 무슨 일로?”

“듣자 하니 또 저녁을 거르셨더군요. 오늘도 딱딱한 밀 빵 하나와 물만 드셨다고 들었습니다.”

그의 손엔 두툼한 염장 고기와 치즈, 그리고 부드러워 보이는 흰 빵이 들려 있었다.

“전 괜찮은데…….”

성기사가 내미는 음식을 엉겁결에 받아든 주교는 당황스러워하다 돌연 활짝 미소 지었다.

“아아. 마침 잘됐군요. 제가 먼저 손님들을 챙겨드려야 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형제님. 또 저의 미숙함을 이리 채워주시는군요.”

“예? 아니 이건 주교님이 드셔야…….”

“제가 돌봐야 하는 시민들도 배를 주리고 있는데, 제가 어찌 음식을 탐하겠습니까. 여신께서는 용서하실지 몰라도 저 스스로가 용서가 안 됩니다.”

주교는 음식이 든 바구니를 호진에게 건네며 말했다.

“교황 예하라면 성국의 수도, 브리츠에 계십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길을 안내해드릴 테니 우선 쉬시는 건 어떻습니까?”

호진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 성기사가 놀라며 소리쳤다.

“교황님이라니요?”

“이분은 여신님의 신탁을 받으신 예언자님이시거든요.”

“신탁이라니…….”

성기사는 떨떠름하게 호진을 훑어보더니 혀를 차며 말했다.

“교황께서도 여신의 목소리를 못 들은 지 1년이 다 되어 갑니다. 하물며 주교님처럼 신실하신 분도 그럴 진데 저런…… 아니, 저분이 신탁을 들었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신의 뜻은 인간이 알 수 없는 법입니다. 하물며 이렇게 훌륭한 형제님이라면 신께서 신탁을 내리시고 남지요.”

호진은 그 둘의 대화를 들으며 난감해하다가, 그냥 묻고 싶은 걸 묻기로 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주교님, 한데 신탁을 따르기 전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만.”

“불경한……!”

성기사가 즉각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이어지는 주교의 물음에 호진은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신탁보다도 우선시하는 일이라…… 그게 어떤 일입니까?”

호진은 속으로 혀를 찼다.

말하는 방식이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때로는 솔직한 답변이 어떤 변명보다도 좋을 때가 있는 법.

호진은 자신이 생각한 그대로를 입에 담았다.

“앞서 이곳을 지난 제 동료들을 찾고 있습니다. 저에겐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지라.”

“오호.”

주교는 돌연 어딘가 즐거워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후 물었다.

“동료라 하면 어떤 분들이십니까?”

“중년의 기사와 제 또래에 여성 사냥꾼 하나. 이름은…….”

“에우리우스와 이예은. 맞지요?”

호진은 자신의 말을 가로챈 주교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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