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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로 배운 검술이 종말에 유용하다-223화 (223/241)

223화. 성국으로 향하는 길 (4)

호진은 이 싸움에 끼어들지 않았다.

시간이 지체된다거나 부담이 되기 때문은 아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왕국이 아니라 제국의 군대라도 어린애 팔목을 비틀듯 간단하게 쓸어버릴 자신이 있었다.

다만, 두 진영이 내세우는 의견들이 무엇이 옳다 그르다 판단을 내릴 수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같은 편에게 무기를 들이댄 이쪽이 더 마음에 안 들지만.’

호진은 위셔시크의 국왕을 힐끔거린 후 계속해서 말했다.

“군대도 아니고 고작 사람 세 명이 지나가는 것을 막진 않으시겠죠.”

“……그것은.”

영주가 머뭇거리자 호진은 쐐기를 박았다.

“어차피 막을 수 없을 겁니다. 동부 왕국이 하나로 뭉친다 해도요.”

“…….”

그것은 도발도 경고도 아니었다.

선언일 뿐.

호진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그 말이 사실임을 본능적으로 깨닫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영주도.

그 옆에서 이야기를 지켜보던 국왕의 몸도 크게 움찔거렸다.

“저희는 엑시아 왕국의 영토에 어떤 피해도 주지 않을 겁니다. 또한 성국에 이상이 없다는 게 확인된다면 그대로 물러나겠습니다.”

“그것을 어찌 믿는단…….”

힘없이 대꾸하던 영주가 입을 다물었다.

호진이 조용히 그를 바라봤기 때문이었다.

눈 속에는 말로 전할 수 없는 진실이 담기는 법이었다.

영주는 호진의 눈 속에서 차마 표현하기 힘든 거대한 존재감과 격의 차이를 보았다.

‘……정말 우리와 같은 인간이란 말인가.’

영주는 기가 차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옆으로 비켜서며 호진 일행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엑시아 왕국의 북단 데크령에.”

“감사합니다.”

호진은 꾸벅 인사를 받은 후, 뒤에 멀뚱히 선 위셔시크의 국왕을 향해 무심하게 물었다.

“안 가십니까?”

그저 물음일 뿐이었지만 국왕의 귀엔 그것이 최후통첩처럼 들렸다.

국왕 또한 길게 한숨을 내쉬곤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 주일세. 그동안 성국에 대한 소식이 없으면 우린 다시 군대를 움직일 게야.”

한번 소집한 군대를 이대로 징집 해제할 순 없었다.

다른 왕국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만약 호진에게 소식이 없다면 전쟁을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군대를 유지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 그들이 호진에게 줄 수 있는 유예기간은 이 주가 한계였다.

“충분합니다.”

호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성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를 지켜보던 국왕은 재차 한숨을 쉬었다.

그러곤 옆에 있던 왕국의 최고의 무력을 지닌 기사단장에게 물었다.

“자네가 보기엔 저자의 실력이 어느 정도 되는 것 같나?”

그 질문에 잠깐 멈칫한 단장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제가 감히 평가할 인물은 아닌 듯합니다만…… 지난번 제국에서 보았던 푸른 사자 기사단의 단장도 저런 괴물은 아니었습니다.”

일단 전장을 얼어붙게 하는 존재감만큼은 그 이상이 분명했다.

그런 평가에 국왕은 머리를 짚으며 중얼거렸다.

“소문이 진짜였나.”

남부에서 나타난 괴물이 무너져가던 왕국을 되살리고, 나아가 바룩크툼을 위기에서 구하며 남부연맹의 맹주가 되었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

몇 시간 전만 해도 헛된 소문으로 취급하던 이야기가 진짜라니.

“아무래도 선택지가 하나 더 생긴 것 같은데…….”

위셔시크의 국왕은 닫히는 성문을 보며 바삐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

데크령에 들어선 호진에게 영주, 드보르작이 다가와 물었다.

“이곳에 볼일이 있으시다는 말은……?”

“아, 사실입니다.”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물었다.

“사람을 좀 찾고 있습니다. 기사 한 명과 여자로 이루어진 이인조로, 기사는 인상 좋아 보이는 중년이며 여자는 제 또래로 활을 소지하고 있었을 겁니다.”

“기사와 여자…… 입니까?”

호진이 설명한 말을 곱씹은 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흔하진 않은 조합이군요. 이곳을 지났다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호진의 부탁에 영주는 곧장 병사들을 소집해 그와 관련된 정보를 모았다.

방금까지 전쟁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일사불란하게 명령을 하달받아 움직였다.

호진이 가볍게 감탄사를 흘리며 칭찬했다.

“훈련들이 잘돼 있군요.”

“이곳은 제국과 성국의 인접 지역이니까요.”

이 영지만 지난다면 곧장 성국이었다.

동부 왕국 입장에서는 제국과 성국에 인접한 지역에는 군대를 투자하는 게 당연했다.

그렇기에 특별한 작물도 없고 입지도 애매한 이 숲속의 성에 이만한 군대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한 성의 영주가 왕국의 군대를 막아낼 수 있었던 이유도 이거였나.’

호진은 방금 전의 전황을 납득하며 쓰게 웃음 지었다.

왕국들에게 지원을 받은 그들이 왕국을 상대로 검을 겨눈 것은 아이러니했다.

호진은 잠시 감상에 젖었다.

“찾았습니다!”

그때 장교로 보이는 병사 하나가 영주를 향해 달려와 보고했다.

이에 영주는 호진과 눈을 마주쳤고 호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라.”

영주의 명이 떨어지자 병사는 숨을 고른 뒤 보고하기 시작했다.

“약 3주 전 동일한 인상착의의 인물들이 이곳을 지났다고 합니다.”

“그 이유와 목적지는?”

“방문 목적은 생필품의 구매였던 모양입니다. 뭔가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묻고 다닌 모양이지만 자세한 건 캐묻지 않고 필요한 물건들을 사서 성국으로 향했다고 합니다.”

“……성국엔 들어가지 못할 텐데?”

“사람들이 소용없다고 말렸음에도 가서 직접 봐야 하겠다고 떠났다고 합니다.”

“그렇군. 고생했다.”

보고를 들은 영주는 고개를 돌려 호진을 바라봤다.

호진은 그와 눈을 마주치자 고개 숙여 감사를 표했다.

“덕분에 확신이 생겼습니다. 감사합니다.”

호진이 사례를 위해 바룩크툼에서 받아온 돈을 꺼내 들자 영주는 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러더니 이내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아닙니다. 그 정 그러시다면 부디…… 성국을 잘 부탁드립니다.”

“성국을요?”

호진은 의아해하며 물었다.

엑시아 왕국은 어째서 다른 왕국들을 적으로 돌리면서까지 성국을 지지하는 걸까.

그 이유에 대한 답은 간단했다.

“지금은 비록 성문을 걸어 잠갔지만, 성국과 여신님은 저희에게 아낌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었습니다. 저희는 그 은혜에 보답하고 싶을 뿐입니다.”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

뻔한 말이었지만, 호진은 그런 것을 싫어하지 않았다.

받은 게 있다면 그것이 원한이든 은혜이든 돌려주는 게 옳다고 여겼으니까.

“노력해 보겠습니다.”

호진은 그의 진실된 마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했다.

하지만 한때 선했던 이들이라고 영원히 그럴 것이라는 보장은 없었다.

만약 성국이 예상대로 곪아 버린 것이라면 성국과 여신을 구해내겠다고 확언할 수 없었기에.

호진은 입에 모래가 들어간 듯 까끌거리는 기분이었다.

***

호진 일행은 계속해서 길을 따라 이동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백색의 성벽을 마주할 수 있었다.

“이곳이 성국인가.”

“화려하네.”

성벽 곳곳에 새겨진 조각들과 휘날리는 깃발들은 거대한 성당을 연상케 했다.

“성문은 닫혀 있군.”

일행들이 속도를 줄이며 성문 앞까지 이동했음에도 닫힌 성문은 요지부동이었다.

성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쳐도 굳게 닫힌 성문은 열릴 줄을 몰랐다.

“부술까.”

호진이 인상을 찡그리며 중얼거리던 그때였다.

“열, 열어줘! 우릴 내보내 줘!”

“돌아가라. 10초 안에 해산하지 않는다면 모두 베겠다.”

성문의 안쪽에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겁에 질린 다수의 웅성거림과 사막같이 건조하고 무뚝뚝한 음성의 대답.

호진은 어렵지 않게 상황을 눈치챌 수 있었다.

‘외부에서의 출입을 막았듯, 안쪽에서도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금지한 거야.’

도대체 뭘 숨기려는 걸까.

호진은 멀쩡한 방법으로는 성국의 비밀을 알아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5, 4, 3…….”

세는 숫자가 줄어들며 날카로운 금속음이 들려왔다.

검이 검집을 빠져나오며 내는 쇳소리였다.

“2, 1.”

카운트 다운이 끝나도록 겁에 질린 사람들의 웅성거림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에 누군가 얼음장같이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자비는 충분히 베풀었다. 저자들에게 신벌을.”

“용재야. 부숴.”

호진이 작지만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다음 순간, 시민들의 죽음을 외면하기 위해 눈을 감았던 성기사에게의 귀에는 피륙음과 비명이 아닌, 귀를 먹먹하게 하는 폭음이 들려왔다.

─콰아앙!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이 부서지며 나무와 쇠로 된 파편이 성안 쪽을 향해 비산했다.

그 잔해에 맞은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고, 시민들을 향해 검을 뽑아 들었던 성기사의 눈은 동그랗게 떠졌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뿌연 먼지 사이로 세 인영이 보였다.

그들은 거침없이 성 안쪽으로 걸어 들어오며 들으라는 듯 소리쳤다.

“문이 많이 삭았네. 노크 좀 했다고 부서지다니.”

‘……노크?’

성기사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검을 뽑아 들었다.

외부에서 누군가 온다는 소식은 들은 적 없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뿐.

“침입자다! 병사들은 적을 제압하라!”

잠시 얼이 나갔던 병사들은 성기사의 일갈에 정신을 차리며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잠시 뒤 뿌연 먼지를 뚫고 모습을 드러낸 세 사람은 무기조차 뽑아 들지 않은 채, 성기사와 병사들 그리고 그 뒤에 선 시민들을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너희들은 지금 성국의 땅을 무단으로 침입했다. 신의 이름으로 즉결 처형하도록 하겠다!”

“아, 미안합니다. 한데, 저는 그 여신님이 불러서 온 거라.”

“뭐?”

성기사는 자신도 모르게 표정을 구기며 반말을 내뱉었다.

저 정신 나간 인간 중 가장 앞에 선 놈이 여신님을 친구라도 된 듯 말했기 때문이었다.

“곱게 죽여선 안 될 놈이구나.”

성기사가 분개하며 검을 휘두르려던 그때였다.

“그만! 멈추시오!”

하얀 사제복에 붉은색 띠를 몸에 두른 사제 하나가 겁에 질린 시민들 사이로 튀어나왔다.

그의 등장에 시민들은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존경을 표했고, 이는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델 주교님.”

성기사마저 그를 보자 검을 내려놓았다.

이에 아델이라 불린 이가 시민들을 향해 무릎을 꿇고 읍소했다.

“미안합니다. 형제자매님들. 이 모든 게 부족한 저의 탓입니다. 하나, 아직은 이곳에서 떠나선 안 됩니다. 저를 죽여 분이 풀린다면 그렇게 하십시오. 하지만 조금만 더 이곳에 남아 여신께 힘을 보태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주…… 주교님. 일어나십시오.”

“주교님의 잘못이 아닙니다.”

시민들은 주교의 모습에 안절부절못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러기도 잠시 사람들은 주교의 부탁에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둘 해산하기 시작했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호진은 그것들을 조용히 지켜보며 상황을 파악했다.

그런 그를 향해 몸을 일으킨 주교가 다가와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십니까, 형제님. 저는 이 성의 관리자이자 교구장 주교인 아델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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