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화. 성국으로 향하는 길 (3)
“그럼, 일주일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쪽은 맡겨주십시오. 어떻게든 균형을 유지하고 있겠습니다.”
아르바흐는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는 무려 제국.
심지어 제국 최강의 무력집단이라 일컬어지는 푸른 사자 기사단까지 출전한 상황이다.
만약 맞붙게 된다면 난쟁이들도 전멸을 각오해야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아르바흐는 겁먹지 않았다.
울그렉 이후트와도 전쟁을 치른 그였다.
이제 와 이 정도의 공포에 몸과 머리가 굳어버리기엔 너무 많은 일들을 겪었다.
“훌륭합니다.”
호진은 그런 아르바흐의 상태를 알아보곤 칭찬했다.
이전의 우유부단하고 겁쟁이였던 난쟁이는 이제 없었다.
그의 눈앞에 선 자는 바룩크툼의 지도자이자 전쟁영웅, 아달바흐의 아들이자 아울레의 후손.
영웅왕 아울레 아누 아르바흐였다.
“여신의 행운이 함께하기를.”
아르바흐의 인사에 호진도 고개 숙여 답한 뒤, 길을 따라 떠났다.
***
높이 솟은 절벽에 지어진 관문을 지난 호진과 일행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협곡에서 빠져나왔다.
푸른 하늘과 삐죽삐죽한 나무들이 자라 있는 숲.
난쟁이들의 왕국과는 또 다른 장관이 눈앞에 펼쳐지자 다들 탄성을 내질렀다.
“와아!”
“여기가 동부 왕국…….”
바룩크툼보다도 작은 규모의 왕국들이 모여 하나의 연합국가의 형태를 지닌 곳.
솔직히 말하면 제국과 성국 사이에서 간신히 균형을 맞추고 있는 국가들의 모임이었다.
만약 제국과 그들 사이에 거대한 산맥만 가로지르지 않았다면 그들 또한 제국에 복속된 지 오래였을 터.
‘운이 좋았군.’
그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운도 이젠 끝나가고 있음이 분명했다.
평화로운 시대에도 간신히 유지되던 힘의 균형이 이 혼란의 시대에 그대로일 리가 없었다.
“연기다.”
동부 왕국에 발을 들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호진은 숲속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발견했다.
밥을 짓거나 할 때 나는 하얀 연기가 아닌, 대량의 목재가 타오르는 검은색 연기였다.
전장의 비릿한 혈향이 코를 스쳤다.
“어떻게 할 건가.”
도훈의 물음에 호진은 하야의 고삐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가보죠. 방향도 어차피 북쪽입니다.”
성국은 동부 왕국 북쪽에 위치해 있었다.
만약 에우리우스와 예은이 성국을 향했다면 이쪽을 지났을 터였다.
연기의 양으로 봐서는 아마 마을이나 도시가 습격을 받은 모양인데, 무언가 정보가 남아있을지도 몰랐다.
결정을 내렸다면 신속하게 움직이는 게 호진의 방식이었다.
대답과 동시에 내달리기 시작한 하야를 쫓아 도훈과 용재도 곧장 말의 고삐를 당겼다.
“아 또 혼자 가네. 같이 좀 가!”
용재는 벌써 멀찌감치 달려 나가는 호진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쫓았을까.
용재와 도훈은 멀뚱히 선 호진을 발견하곤 그에게 다가갔다.
“뭐 해? 안 가고.”
“……아니 그게.”
호진은 드물게 당황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이에 용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호진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고, 이윽고 호진이 왜 멈춰 섰는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미친.”
─와아아아아아아!
“죽여! 죽이라고!”
“기름을 더 가져와!”
매캐한 연기와 불꽃.
시커멓게 쏟아지는 화살이 높게 세워진 방벽 위아래를 가리지 않고 내리꽂혔다.
화살 비에 살아남은 병사들은 방벽에 걸쳐진 사다리를 두려움에 떨며 기어올랐고, 그런 그들을 향해 뜨거운 기름과 돌을 던지는 병사들의 눈 역시 공포와 광기에 젖어 있었다.
방벽을 지키는 자와 공격하는 자.
그 양측은 모두 호진이 지키겠다고 다짐한 인간들이었다.
***
“…….”
호진은 순간 어쩔 줄 몰라 가만히 그들의 전투를 지켜봤다.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기에 함부로 움직이기가 어려웠다.
“어쩔 거야?”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용재가 묻자 호진은 잠깐의 고민 끝에 답했다.
“우선은 멈춰야겠지.”
저 방벽 너머에 있는 마을에서 에우리우스와 예은에 대한 정보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능하다면 인간끼리의 상잔을 멈추고 싶었다.
어떤 사정이 있는지는 호진도 모르고, 그가 참견할 만한 일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호진은 눈앞에서 인간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모습을 그저 가만히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때마침 호진과 일행들을 발견한 기마병 셋이 이쪽을 향해 다가왔다.
아마 방벽을 공격하는 공격 측의 병사들일 터였다.
“뭐야, 이 새끼들. 뭘 훔쳐보고 있어?”
“당장 무기 해제하고 말에서 내려라. 변명은 듣지 않겠다.”
“윽, 이 도마뱀은 뭔데 이렇게 커?”
그런 그들의 말에 호진이 답했다.
“미안하지만 전 이야기를 좀 듣고 싶은데요.”
“뭐라는 거야 이 버러지가! 당장 내리지 않으면…….”
처음부터 호진들에게 욕을 내뱉었던 기마병이 허리춤에 검을 반쯤 뽑으며 다가왔다.
“멈추시죠.”
정적이 흘렀다.
고작 한마디를 내뱉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땡그렁
“아…….”
호진을 향해 다가오며 검을 뽑아 들던 병사가 검을 놓쳐 바닥에 떨어트렸다.
바지춤을 타고 오줌이 줄줄 흘러내렸다.
패왕의 위엄.
그것을 바로 앞에서 받아낸 기마병 세 명은 백치라도 된 듯 벌어진 입에서 침을 흘렸다.
다른 병사들이라고 그다지 다르지는 않았다.
사다리를 기어오르던 병사는 매미처럼 사다리에 매달려 얼어붙었다.
악을 쓰며 내달리던 병사는 달리던 자세 그대로 멈추며 바닥을 굴렀다.
활의 시위를 당기던 병사는 힘이 풀려 허공에 화살 줄을 퉁겼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강렬한 압박감이 모두를 짓눌렀다.
움직일 수는 없지만, 의식은 모두 깨어 있었다.
─저벅 저벅
적막이 찾아온 전장의 한가운데를 향해 세 명의 기수가 유유자적하게 들어섰다.
사람들은 이 사태를 만들어낸 자가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호진이 일부러 강렬한 기운을 흘려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모았기 때문이었다.
굳어버린 상태로 사람들은 눈만을 돌려 이 전장에 끼어든 사람을 확인했다.
‘저렇게 젊다고? 이런 기운을 지닌 괴물이?’
양 진영의 무력을 대표하는 기사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호진을 바라봤다.
호진이 힘을 조절했음에도 그들의 눈엔 호진이 걸어 다니는 천재지변쯤으로 보였다.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각 진영의 대표자들은 이리로 오시죠.”
호진은 성문 앞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내리며 말했다.
그와 동시에 위엄을 거두어들이자 병사들이 기진맥진하며 바닥을 뒹굴었다.
“허억. 허억!”
“무…… 무슨 일이.”
불가해한 현상과 압도적인 힘 앞에서 무기를 들고 거드럭거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태풍과 산사태를 상대로 검을 휘두르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그건 이곳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무기를 거두고 물러났다.
그러기도 잠시, 성문이 열리며 방벽에서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은 기사가 나왔다.
성을 공격 중이던 진영에서도 화려한 망토를 두른 인물이 호진을 향해 다가왔다.
“동부 왕국 엑시아의 데크령 영주 드보르작입니다.”
성에서 나온 기사는 곧장 호진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반대로 화려한 망토를 두른 인물은 드보르작이라 자신을 소개한 영주를 힐끔 바라본 후 호진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짐은 동부 왕국 위셔시크의 국왕. 아리엔 아누 데보라다. 그대는?”
다소 거만한 국왕의 소개에도 호진은 별 신경 쓰지 않으며 답했다.
“시리온과 신 아쉬나학의 왕이자 바룩크툼과 맺은 남부연합의 맹주, 이호진입니다.”
호진의 소개에 두 사람의 반응은 거의 즉각적으로 튀어나왔다.
“……쿨럭!”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국왕의 눈은 튀어나올 듯 커지더니, 사레가 들린 듯 기침을 터트렸고, 드보르작이라는 영주는 말에서 뛰어내려 호진을 향해 머리를 숙였다.
수행인이라고는 용재와 도훈만 대동한 호진이다.
다른 사람이 고작 두 명의 수행인을 데리고 스스로를 왕이라 칭한다면 보통 미친 사람 취급하며 무시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호진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호진이 보여준 압도적인 힘은 내뱉은 말의 자리를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호진은 그런 그들을 향해 손을 내저었다.
딱히 대접과 존중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호진이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그보다 무슨 일로 싸우고 계신 겁니까.”
“…….”
마치 어린이들을 달래는 듯한 호진의 발언에 국왕의 얼굴을 붉게 물들었다.
반면 영주는 헛기침을 터트리곤 죄송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딱히 저도 전쟁을 원한 것은 아닙니다. 그저 말도 안 되는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을 뿐.”
“그게 뭡니까? 무엇이 한 나라의 군대가 이곳으로 향하게 한 겁니까.”
“외부인이 끼어들 문제가 아니오!”
국왕은 더 이상 못 참겠다는 듯 호진을 향해 소리쳤다.
이에 호진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으며 답했다.
“딱히 외부인은 아닙니다. 제가 이 방벽 안에 볼일이 좀 있어서.”
“그게 말이 된다고……!”
“안 됩니까?”
호진은 가볍게 기운을 끌어올렸다.
그러자 국왕이 입에 본드라도 바른 듯 다물고, 떨리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수행원으로 함께 다가온 제법 실력 있는 기사가 몸을 떨며 국왕에게 속삭였다.
“전하 부디……. 저희 군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
국왕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더니 결국 삐걱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호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짐이 군대를 일으킨 이유는 엑시아 왕국과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했기 때문이오.”
“그게 뭡니까?”
입장 차이라니. 이런 위기의 시기일수록 더욱 단단히 뭉쳐야 할 연합을 이렇게까지 분열시킨 것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일까.
의아해하던 호진은 국왕의 이어지는 말에 탄식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성국은 더 이상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 동부 왕국 연맹은 지금이라도 제국의 편에 서야 하오!”
‘……그랬군.’
호진은 간과하고 있었다.
외부의 위협이 극대화될수록 결속이 강해지기도 하지만, 반대로 흔들리는 경우도 있었다.
성국의 침묵과 제국의 위협을 어떻게 극복할지에 대해 의견이 갈린 모양이었다.
“오랜 기간 제국의 위협으로부터 동부 연맹을 지키던 성국입니다! 어찌 성국을 배신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영주는 굳은 표정으로 국왕을 향해 쏘아붙였다.
이에 국왕은 침을 튀기며 소리쳤다.
“성국이 봉문을 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알기는 하나! 도로에선 강도와 몬스터들이 활개를 치고 땅이 시커멓게 죽어가며 그 괴상한 전염병이 돌고 있는데 성국은 뭘 하고 있는 거지?”
“……그거야.”
영주는 국왕의 말에 답하지 못하고 말을 흐렸다.
국왕은 그 기세를 타고 울분을 토하듯 소리쳤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 아니! 오히려 나아가 성국이 의심스럽다! 이 모든 흉조가 시작된 것은 성국이 봉문을 한 이후가 아닌가?”
“억지입니다!”
“억지인지 아닌지는 성국에 가보면 알겠지. 그러니 길을 열어라!”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상대해 드리죠.”
두 사람이 열을 내던 그때였다.
“그러니까.”
호진이 입을 열자 금방이라도 싸울 듯 고조됐던 분위기가 차갑게 식었다.
“위셔시크의 국왕께서는 지금 엑시아의 영토를 지나 성국으로 향하시겠다는 말씀이군요.”
“……짐뿐만이 아니네. 다른 세 왕국의 군대도 이곳으로 향하는 중이지.”
동부 왕국은 다섯 개의 나라로 이루어진 연맹 국가.
그렇다는 말은 엑시아와 다른 한 나라를 제외한 다른 국가들은 제국의 편에 붙었다는 말이었다.
“흠.”
호진은 잠시 침음을 흘리며 고민한 끝에 입을 열었다.
“우선 지금은 돌아가시죠. 다른 세 왕국의 군대에도 전달해 주십시오.”
“……뭐?”
국왕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지금 이 자리에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호진을 죽이겠다는 듯 눈을 부라렸다.
“제가 위셔시크의 편에 서겠습니다.”
“……?”
“……?”
호진의 대답에 양 진영의 지도자들의 표정에 의문이 떠올랐다.
이는 용재와 도훈도 마찬가지였다.
“저…… 형 잘못 말한 거 아니야? 이쪽의 통통한 아저씨 쪽이 위셔시크야.”
용재가 소리를 낮추며 호진에게 말했지만 너무나 조용한 탓에 다른 이들도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호진의 말에 집중하느라 용재의 무례를 지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알고 있어. 그래서 말하는 거야.”
호진은 고개를 돌려 영주와 국왕을 향해 선언했다.
“우리 남부 연맹은 제국과 대적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리고 현재 성국이 의심스럽기에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보고 돌아가라는 겐가?”
국왕이 인상을 찡그리며 묻자, 호진이 담담하게 답했다.
“그 진상의 규명을 제가 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