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성국으로 향하는 길 (2)
“그런데 제국은 갑자기 왜 시리온을 욕심내는 겁니까?”
호진은 앞장서서 걷는 아르바흐에게 물었다.
예전엔 미련 없이 시리온의 땅을 포기했던 제국이다.
그런 그들이 이제 와 갑자기 소유권을 주장하고 군대를 보내온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에 아르바흐는 작게 신음을 흘리더니 쓰게 웃으며 답했다.
“그게…… 실은 아무래도 소문 탓인 것 같습니다.”
“소문이요?”
호진의 얼굴에 의아함으로 가득 찼다.
도대체 무슨 소문이 났기에 제국이 시리온에 눈독을 들인다는 말일까.
“호진 님이 얼굴 없는 자로부터 시리온을 해방하시고, 이어서 근처에 신 아쉬나학 제국까지 개국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랬죠.”
“그쯤부터 근방에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습니다.”
창궐하는 괴물들을 피해 각지로 도망치고 숨어들었던 사람들.
그들에게 치안이 안정되고, 식량이 풍족한 두 땅은 전설 속의 낙원과도 같은 것이었다.
“소문이 퍼졌습니다. 남서쪽의 사막이 시작되는 땅. 그곳에 지상낙원이 있다는.”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아니 척박한 환경이기에 더더욱.
사람들은 실낱같은 희망에 목을 맸다.
소문이 소문을 부르며 수많은 방랑자들과 생존자들이 시리온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보았다.
웃음과 믿음이 존재하며, 미래와 희망이 가득한 땅을 말이다.
“아.”
호진은 아르바흐의 말을 듣다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소문이 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선 성역이라는 기적은 몬스터들의 침입을 막고 땅을 풍요롭게 했을 터다.
또한 바룩크툼의 난쟁이들은 치안을 유지하고 건물을 증축하며 도시의 규모를 키웠을 테고.
‘그리고 강화도에선 식량 지원과 더불어 치안 유지를 위한 군대를 파견했다. 시리온과 신 아쉬나학은 무서운 성장세로 발전을 거듭했겠지.’
몰려드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며 두 땅은 도시에서 대도시, 나아가서는 하나의 국가라 불리기에 모자라지 않는 수준에 이르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그 정도라고요?”
제국이 욕심내기에는 아직 한참 부족하지 않나?
호진의 이런 의문에 아르바흐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그 정도라고 하더군요. 저도 직접 보지는 못했는지라 자세히는 말씀 못 드리지만요.”
호진은 한동안 방문하지 않았기에, 시리온과 신 아쉬나학이 어떻게 변했는지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아르바흐의 말만 들어보면 분명 이전과는 천양지차이긴 한 모양인데.
아무래도 조만간 직접 두 눈으로 보아야 할 것 같았다.
‘뭐 에우리우스를 찾으면 어쩔 수 없이 방문해야겠지만.’
호진이 그렇게 생각을 이어 나가던 그때였다.
아르바흐가 벽에 손을 올리자 아치 모양의 푸른 문이 생겨났다.
─드르르륵
이미 한 차례 본 적 있는 비밀문이 거친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고 그곳엔.
“……이렇게 금방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인상을 잔뜩 찡그린 난쟁이가 있었다.
***
바룩크툼 비밀 공방.
아직도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전설 속의 장소로 치부되는 장소.
누군가에겐 평생 들어가기 어려운 그곳에 호진은 재차 발을 들여놓으며 입을 열었다.
“오랜만입니다. 노야.”
“그리 오랜만은 아닌 것 같은데.”
머리부터 수염까지 온통 하얀 노인은 들고 있던 망치를 내려놓곤 팔짱을 꼈다.
화로 위에서 하얀색으로 불타오르며 쇠를 집어삼키고 있던 불꽃은, 호진을 발견하곤 가마 안으로 모습을 숨겼다.
호진은 그런 불꽃을 보며 갸우뚱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기별도 없이 찾아와 죄송합니다. 뭔가 놀라게 해드린 것 같네요.”
“확실히 저놈은 놀란 모양이구만.”
“저건……?”
─화륵!
가마 안에서 빼꼼히 고개를 내밀던 불꽃은 호진과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모습을 감췄다.
이를 지켜보던 노야는 혀를 짧게 차며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저래 봬도 불과 철의 여신 이자리온 님의 성유물, ‘시작의 불꽃’이네.”
불타는 망치를 휘두르며 난쟁이들을 이끌고 건축과 야장 기술을 전파한 이자리온.
그녀는 혼란한 이 시기에 모습을 감췄고, 그녀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이 불꽃만이 유일했다.
“공방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 중 하나지.”
차갑게 타오르는 새하얀 불꽃은 아무리 뜨거운 불로도 쉬이 제련할 수 없는 각종 금속과 무구들을 손쉽게 녹이고 무르게 만들었다.
달빛과 시작의 불꽃.
이 두 가지가 지금의 비밀 공방이 있게 한 일등 공신인 셈이었다.
“호오.”
호진이 흥미롭게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노야는 고개를 돌려 뒤에 선 용재와 도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때 가져간 무기들은 어땠나?”
“최고던데요.”
용재는 거인잡이의 도끼창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답했다.
길이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도끼창은 다수의 적이나 거대한 적을 상대할 때 더할 나위 없었다.
도훈 역시 드물게 고대를 크게 끄덕이며 답했다.
“잘 쓰고 있다.”
도훈은 은빛의 실과 두 개의 단검을 얻고 자신의 전투 스타일을 아예 새롭게 재정립했다.
그에게 노야가 만들어준 실과 단검은 인생 최고의 기연이라 보아도 무방했다.
노야는 그런 그들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못 알아보겠군.’
고작 두 달 만이지만 무기를 바꿔 든 두 사람은 괴물과도 같이 성장했다.
이젠 인간이라고 믿기지 않는 기운은 그들이 하나의 벽을 뛰어넘었음을 의미했다.
노야는 그 성장에 자신의 무기가 한몫했음을 깨닫고 내심 뿌듯해졌다.
“그런가. 큼.”
노야는 무심한 척 헛기침을 하며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이번엔 무슨 일로 온 겐가?”
“아, 실은…….”
호진은 말을 흐리며 인벤토리 속에서 물건을 두 꺼내 들었다.
두 조각으로 부러진 검이 호진의 양손에 들렸다.
「게일의 부러진 검」
「종류: 아티팩트」
「정보: 검의 교단의 성유물. 신을 동경하여 모방했던 최초의 신도가 다루던 검이다. 검의 사라진 반쪽의 행방을 알 수 없다.」
은백색으로 은은하게 빛을 뿌리는 도신은 방금 벼려 낸 것처럼 예리했다.
도신에 파인 홈을 따라서 룬문자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고, 크로스가드는 흔들림 없이 견고했다.
반쪽뿐이었던 검의 날에 깨진 모양 그대로 다른 검의 파편이 다가와 맞닿았다.
하나로 이어지는 검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이 검을 고쳐주십시오.”
검신과의 전투에서 부러진 검의 조각들이 하나로 모인 것이다.
이것이 게일과의 전투에서 얻은 보상.
‘사라진 게일의 부러진 검 파편’이었다.
“……터무니없군.”
이를 홀린 듯 바라보던 노야는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나는 못 하네. 내 실력으로는…….”
“아뇨, 하실 수 있습니다.”
호진은 한 발짝 물러나던 노야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곤 흔들리는 노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노야.”
“그게 무슨 말…….”
“말 그대롭니다. 당신이 벼려낸 검이 이 세계의 향방을 결정하게 될 겁니다.”
“…….”
노야의 눈이 더욱 거칠게 떨리기 시작했다.
딱히 과장은 아니었다.
이제 정말 여신과의 만남이 멀지 않음이 느껴졌다.
“아직 검을 어떻게 휘두를지,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여신을 베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걸까.
아니면 고대신들을 베어 그들의 위세를 꺾어야 하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아직 검의 끝이 누구를 향할진 호진도 몰랐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약속드리겠습니다. 당신의 벼려 준 검을, 이 세계를 위해 사용하겠다고.”
호진의 말을 듣던 노야의 눈이 점차 떨림이 멎어갔다.
그러곤 돌연 피식 웃음을 터트리곤 입을 열었다.
“즉, 내 손에 이 세계의 운명이 달렸다는 그 말인가?”
“예.”
“크흐흐흐.”
노야는 쇳소리같이 거친 웃음을 목에서 내뱉으며 답했다.
“……그거참. 멋지군.”
작게 중얼거린 그는 호진이 내민 게일의 검을 받아들었다.
그러곤 곧장 가마를 향해 다가가며 돌아선 채로 호진에게 말했다.
“일주일 후에 오게.”
됐다.
이제 남은 것은 검이 제 형태를 되찾기를 기도할 뿐.
호진은 노야를 향해 감사 인사를 하며 몸을 돌렸다.
그때 호진의 눈에는 뭔가 아쉬워 보이는 용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모처럼 왔는데 우린 뭐 없나?”
“앗, 그것이…….”
용재의 혼잣말 아닌 혼잣말에 당황한 것은 아르바흐였다.
무기를 더 내어 주는 건 문제가 아니었지만, 지금 용재에게 어울릴만한 무기는 노야에게 직접 부탁하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노야는 지금 호진의 의뢰로 검을 만드는 중, 방금의 분위기로 보아선 아마 한동안 다른 작업은 손도 못 댈 듯싶었다.
“비밀 공방의 장인은 노야가 유일해서…… 죄송합니다.”
이를 지켜보던 호진은 한숨을 쉬며 용재의 이마에 딱밤을 놓았다.
─콰직
바위가 부서지는 소리가 공방에 울려 퍼졌고.
“아파!”
용재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욕심 좀 내지 마라. 힘만 강해지면 뭐 해. 아직도 속은 꼬맹인데.”
“아니, 그냥 혼자 해본 말인데…….”
“손 내밀어 봐.”
“응?”
─툭
호진은 용재의 손위에 반짝이는 돌 하나를 올려놓았다.
다음 순간.
─띠링
「자유 교단의 사도가 탄생했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자유 교단의 이름이 널리 퍼집니다.」
「모든 도시에 신앙이 크게 증가합니다.」
「플레이어의 격이 크게 상승합니다.」
「플레이어의 격이 크게 상승합니다.」
“이건……?”
용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호진과는 다른 시스템 창이 용재에게도 이것저것 떠올랐으리라.
이로써 용재는 명백한 신의 사도, 즉 인간에서 벗어난 존재가 된 것이다.
호진은 얼이 빠진 용재에게 말했다.
“힘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라. 너의 존재가 곧 인간들의 가능성이나 마찬가지니까.”
“왜 나를……?”
용재는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호진을 바라봤다.
이에 호진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짬 순이다. 대충 받아.”
“……고마워. 형,”
“됐어. 저리 가.”
용재가 감동하며 호진에게 다가가자 호진은 손을 내저으며 답했다.
이에 용재가 슬며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에이, 부끄러워하기는. 안 어울려 형.”
“다시 내놔.”
“앗, 줬다 뺐는 건 반칙이지.”
그렇게 둘이 티격태격하기도 잠시, 호진은 묵묵히 서 있는 도훈에게 다가갔다.
“도훈 씨도 우선 받아 두세요.”
“이건?”
도훈은 호진이 내민 반짝이는 돌을 바라보며 물었다.
“신에게 기도 올리는 돌. 원래는 돌에 신격을 담아 사도가 될 후보에게 선사하는 물건입니다.”
“사도라면 이미 용재가 된 거 아닌가?”
도훈은 눈치가 빨랐다.
둘의 대화만으로도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금방 눈치챘다.
하지만 섭섭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직 실력 면에서 용재보다 부족했고, 용재의 순수함과 선한 기운은 분명 자신보다 사도의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그런 도훈의 반응에 호진은 안도하며 설명했다.
“맞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돌에 담긴 제 기운이 도훈님이 위험할 때 도움이 될 겁니다.”
“그렇군. 감사히 받도록 하겠다.”
도훈이 내민 손에 호진이 돌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띠링
「자유 교단의 두 번째 사도가 탄생했습니다.」
「자유 교단의 이름이 널리 퍼집니다.」
“?”
“??”
호진과 도훈은 얼굴에 물음표를 띄우며, 황당한 시선을 교환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