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성국으로 향하는 길 (1)
─띠링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자유 교단의 이름이 널리 퍼집니다.」
‘이건…….’
게이트를 막 넘어선 호진은 예상치 못한 시스템 창을 보며 당황했다.
분명 자신의 행동으로 인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짐작이 가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아무래도 강화도로 이동한 가을이 뭔가를 한 모양이다.
우연히 만나 도움을 주었을 뿐인데,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았다.
비단 가을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번 하얀 가면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자신을 도와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뭔가를 바란 건 아니었는데.’
호진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싸워 나갈 뿐이다.
그 목적이 이타적인 것이라고 할지라도 분명 그건 호진이 원해서 하는 것.
다른 이들이 목숨을 걸고 호진을 위해 싸워야 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받았던 것을 갚기 위해 얼마든지 목숨을 걸어 줬다.
‘쉽진 않았겠지.’
무려 목숨을 거는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전장에 서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그들의 무거운 진심이 느껴졌기에 호진은 그저 감사할 뿐이었다.
그때 뒤에 선 도훈이 물었다.
“문제라도?”
“……아니, 괜찮습니다.”
호진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지금은 멈춰 서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들의 희생과 믿음에 답하기 위해서라도, 호진은 계속해서 나아가야 했다.
호진은 호흡을 가다듬고 걸음을 내디뎠다.
***
바룩크툼의 왕성 카라즈 안코르.
호진은 드워프들이 놀라지 않도록 이미 설치된 게이트와 연결된 문을 열었다.
시리온과 이어지는 그 게이트는 드워프 왕실 근위대가 지키고 있는 중이었다.
“당신은……!”
용재와 도훈을 보고 긴가민가하던 근위대원들은 호진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그러기도 잠시 재빨리 경례를 올려붙이며 소리쳤다.
“귀인의 방문을 환영합니다!”
“오랜만입니다. 다들.”
호진이 인사를 받아주자 근위대원들의 얼굴에 자부심이 가득해졌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호진은 몰랐지만, 이미 바룩크툼 내에선 호진의 신격화가 어느 정도 진행된 상태였다.
영웅왕 아르바흐를 제외하면 지금 이 왕국에서 가장 추앙받는 존재는 호진일 터.
그런 그와 함께 전장에 섰던 것만으로도 충분한 영광인데, 자신들을 기억해 주다니.
이보다 더한 영광은 없으리라.
뿌듯함에 취해 잠시 자신의 역할을 망각했던 근위대원들은 이내 고개를 흔들며 정신을 차렸다.
“그러고 보니 게이트에서 오셨다는 건 시리온 문제는 해결된 겁니까?”
“시리온 문제요?”
“……혹시 처음 들으십니까?”
“시리온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곧장 오는 길이라서요. 시리온에 무슨 문제라도?”
“이런. 이럴 때가 아니었군요.”
근위대원은 골치 아프다는 표정으로 이마를 짚었다.
아무래도 무언가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따라오십시오. 아르바흐 전하께 안내하겠습니다.”
***
근위대원은 짧은 발을 부단히 놀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나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호진은 왕성의 내부에 발을 들일 수 있었다.
근위대원이 게이트에서부터 챙긴 깃발을 높이 들자 모든 이들이 길을 내어줬기 때문이었다.
다만…….
‘사람들이 시선이 따갑군.’
호진들이 걸음을 옮김에 따라 수많은 인파의 시선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호진은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서야 근위대원이 챙긴 깃발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거미를 관통하는 검.’
그 문양이 새겨진 깃발이 호진을 상징하는 깃발인 듯했다.
그리고 이를 증명하기라도 하듯 누군가 급하게 뛰어 내려오는 소리가 왕성의 입구에서부터 들려왔다.
“호진 님!”
“전하! 부디 체통을!”
해맑은 표정으로 뛰어 내려오는 아르바흐와 그 뒤를 쫓는 근위대장 토그림 브론즈비어.
아무래도 토그림은 여전히 고생이 많은 듯했다.
호진은 몸을 낮추며 아르바흐에게 인사를 건넸다.
“영웅왕을 뵙습니다.”
“무슨……! 부디 말을 낮추십시오, 호진 님! 호진 님에겐 그럴 자격이 충분하십니다. 예전처럼 아르바흐라 불러주십시오.”
호진은 잠시 망설이며 뒤에 선 토그림을 바라봤다.
토그림은 한숨을 깊게 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슬아슬하지만 세이프라는 건가.’
호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하죠. 아르바흐.”
“예!”
얼굴이 환해진 아르바흐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인 후 호진의 손을 잡아끌었다.
“할 이야기가 많습니다. 호진 님!”
“저도 궁금한 게 많습니다. 전부 이야기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원탁에 다들 모여있습니다! 가서 말씀 나누시죠.”
***
“여섯 가주가 전부 말입니까?”
대대로 근위대장직을 해온 브론즈비어 가문이야 당연히 수도에 있지만, 그 외에는 전부 자신의 영지와 성을 가진 영주들이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영지가 아닌 이곳에 모두 모였다는 것은 무슨 일이 생겼다는 말일 터.
아무래도 시리온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닌 듯했다.
그렇게 아르바흐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원탁.
모여있는 사람들의 면면은 모두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카잣 둠의 영주 쿠라그 쉴드락.
카락 아조르의 영주이자 마이스터들의 수장 오웬 롱비어드.
그리고 왕의 스승이자, 전 용사냥꾼 단장 구르드 스틸하트까지.
그 외에도 실버핸드 가주와 그레이고트 가주 역시 원탁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스륵
호진이 입장함에 따라 그곳에 모인 모두가 호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예의를 잘 따지지 않는 드워프 사회에선, 더군다나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여섯 가주들한테선 결코 쉽게 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용, 방패, 투구, 산양, 모루와 망치, 은빛의 손바닥.
각자의 가문을 상징하는 깃발들이 가주들의 뒤에서 사락거리며 흩날렸다.
장내에 묵직한 분위기가 흐르기도 잠시, 구르드가 호진에게 말을 건네왔다.
“그동안 코빼기도 안 비추더니 정말 아슬아슬하게 나타나는군. 그리 바빴나?”
“간단하게 설명해 드릴 만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호진의 대답에 이어 용재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치. 무려 불사의 신과 싸우고 왔는데.”
“……?”
구르드의 불만을 잠재우기엔, 단 한마디로 충분했다.
구르드가 입을 뻐끔거렸고, 옆에 있던 오웬은 인상을 쓰며 중얼거렸다.
“내 귀가 이상한 건가.”
다른 가주들도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지만, 오직 아르바흐만은 용재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눈을 반짝이며 반응했다.
“불사의 신을! 대단합니다!”
“후훗.”
용재는 코를 쓰윽 문지르며 잔뜩 뻐겼고, 그 모습에 호진은 이마를 짚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르바흐는 용재의 손을 잡아채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물론 우리가 가볍게 이겼죠. 현신한 불사의 신을 빡 하고 한방에……!”
“그만.”
호진은 이야기가 더 이상하게 흐르기 전에 용재의 말을 끊었다.
애초에 일국의 왕을 대하는 용재의 태도가 너무 가벼웠다.
지금은 그 입에서 나온 이야기가 너무 황당무계하다 보니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듯하지만.
“저희 이야기는 됐습니다. 사실과 조금 다르기도 하고요. 그보다 이쪽의 이야기를 들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아……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르바흐는 노골적으로 아쉽다는 분위기를 풍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만도 했다.
아르바흐에게 있어 호진과 함께한 여정은 고생을 잔뜩 했지만, 동시에 무척 강렬하고 흥분되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호진과 함께 떠나지 못한 것을 몹시 아쉬워했었던 아르바흐가 호진의 모험담을 궁금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이제 아르바흐는 바룩크툼의 왕.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해야 하는 것을 더 중요시해야 하는 사람이다.
아르바흐도 그것을 잘 알고 있는 듯, 순식간에 분위기를 바꾸며 입을 열었다.
“사실 시간이 많지는 않습니다.”
“시간이요?”
호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이에 아르바흐는 고개를 무겁게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시리온이 위험합니다.”
“……조금 더 자세히.”
호진이 억누르던 기세가 아주 잠시 흐트러지며 날카롭게 주변으로 번져나갔다.
이를 느낀 여섯 가주들은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무슨 기세가…….’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호진이 불사의 신과 싸웠다는 말이 농담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아르바흐 역시 호진의 기세에 방금 전보다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제국이 자랑하는 강철 함대가 시리온의 해안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 수만 수백 척. 동원한 병력이 2만이 넘습니다.”
“제국이 말입니까?”
호진은 예상치 못했던 이야기에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제국이라니.
제국이 무슨 이유로 시리온을 공격한단 말인가.
호진의 그런 의문을 눈치챈 아르바흐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국이 시리온의 영토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왔습니다.”
“……그럴 리가요.”
호진은 아르바흐의 말에 표정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분명 시리온은 제국의 공국이었다.
과거에는 말이다.
호진은 서늘함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과거의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이전 시리온이 제국에 도움을 요청했을 때, 제국은 시리온이 제국과 분리된 독립적인 국가라는 이를 이유로 지원을 거절했습니다.”
이는 명백히 제국과 시리온이 다른 국가임을 공언한 것이다.
제국은 시리온의 도움을 거절하고, 이후에 에우리우스가 이끄는 푸른 늑대 기사단을 파견했다.
그들의 임무는 시리온의 정황을 살피는 것 그리고 대망루를 수호하는 것이었지, 시리온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제가 시리온의 새로운 왕으로 추대됐을 때 분명 제국으로부터 확언도 받았습니다.”
작금의 시리온은 더 이상 제국의 땅이 아니다.
제국의 황제가 보내온 서찰의 내용이었다.
호진도 이런 문제를 염려했었기에, 일찍이 에우리우스를 통해 이 문제에 대해서 제국으로부터 확언을 받아 놓은 상태였다.
이미 끝난, 쓸모없는 땅이라고 여겼기 때문일까.
제국은 미련 없이 너무나 쉽게 시리온을 포기했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영토 소유권을 주장해?
호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자격으로 그런 주장을 한다는 겁니까?”
“그게, 제국 쪽에서는 그런 서찰을 보낸 적이 없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시리온에서 바룩크툼으로 향한 에우리우스와 연락이 끊겼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르바흐의 말에 호진의 몸이 잠시 멈췄다.
제국의 주장을 파훼할 가장 간단한 방법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에우리우스님은 지금 어디에?”
지금도 황제의 서찰은 호진의 인벤토리에 있다.
하지만 이를 증명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지금은 인간들끼리 싸울 때가 아니라는 것을 황제에게 간언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좋다.
즉, 에우리우스만 시리온으로 데려갈 수 있다면 문제는 빠르게 해결될 것이다.
호진의 물음에 아르바흐는 서둘러 지도를 펼치며 답했다.
“이곳이 바룩크툼에서 동부 왕국으로 빠져나가는 길입니다. 이곳을 따라나서서 쭉 이동하시면 성국으로 향할 수 있습니다. 에우리우스 님도 이 길을 이용했고요.”
“감사합니다. 혹시 남은 시간은?”
그 질문엔 구르드가 대신 답했다.
“현재 바룩크툼의 군대 중 절반 가까이가 시리온으로 이동해 있는 상태입니다. 제국과 대치 중이긴 하지만…… 길어야 일주일이겠죠.”
“좋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시간을 끌어주세요. 그전엔 돌아오겠습니다.”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기한은 일주일.
그 사이에 성국으로 향한 에우리우스와 예은을 찾아 전쟁을 막는 것.
그것이 당장의 목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