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자유 교단 (2)
“그럼 부탁하겠습니다.”
“얼마든지 맡겨주게.”
호진의 정중한 인사에 협회장 또한 고개 숙여 인사를 돌려줬다.
호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뒤를 돌아봤다.
─저벅 저벅
열을 맞춘 골렘들과 헌터들이 차례대로 게이트를 통과해 강화로 향하고 있었다.
“이대로 물러나도 되는 겁니까?”
어느새 다가온 기서가 걱정스럽다는 듯 전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이에 호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이제 괜찮을 겁니다.”
이곳 철원에서의 전쟁이 마무리된 지도 하루가 지났다.
들리는 소식으로는 다른 전선들 또한 적들의 기세가 눈에 띄게 꺾였고 현재는 대부분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고 했다.
게일을 쓰러뜨린 이상, 아마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이번 전투는 이대로 종식될 가능성이 높았다.
중국과 북한을 포함한 여러 국가들을 폐허로 만들고 한국마저 멸망의 위기로 몰아넣었던 위기치고는 짧고도 허무한 결과였다.
‘아니, 허무하지만은 않았나.’
호진은 자신의 손바닥을 쥐었다 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불사의 신이 이곳에 제대로 강신을 했다면.
하얀 가면이 의도했던 대로 신의 힘을 갈취해 계속 힘을 키웠다면 어땠을까.
한국은, 아니 어쩌면 이 세상은 존폐의 기로에 섰을지도 몰랐다.
‘그걸 내 손으로 막았다.’
이젠 알고 있다.
호진이 지닌 힘은 비단 한 인간의 것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커졌다.
지구의 인간들을 대표한다거나 모든 이들의 생명을 짊어지고 있다거나 하는 오만한 생각을 할 셈은 아니었다.
하지만, 책임감은 느끼고 있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일어날 결과들은 이곳을 포함한 저쪽의 세계까지 지대한 영향을 미칠 테니까.
‘토할 것 같군.’
호진은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더 생각을 이어 한다면 부담감에 잠조차 잘 수 없게 돼 버릴 터였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나중의 문제.’
중요한 것은 호진이 무엇을 할 것이냐다.
‘처음엔 여신을 만나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이 모든 사태를 불러온 당사자인 여신.
그녀를 만난다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지구에 닥친 문제를 해결할 가장 쉽고도 간편한 방법은 두 세계 간의 연결을 끊는 것이고.
여신이라면 그 방법을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된다면 지구는 분명 다시 회복할 것이었다.
추가적인 유입이 없는 이상 지구는 남겨진 괴물들을 섬멸하고 이계의 신들의 영향력에서도 멀어질 테니까.
하지만…….
‘그걸로 충분한가?’
호진은 인상을 찌푸렸다.
힘을 얻고 숨겨진 신들의 이야기에 접근할수록 점점 생각이 바뀌었다.
어째서 인간은 신들이 정해 놓은 운명과 변덕 아래에서 발버둥을 쳐야 하는가, 라는 의문이 생긴 것이다.
‘저쪽 세상에선 선신들의 치하에서 안정적인 삶을 살아가던 인간들이 고대신의 준동에 악몽과도 같은 시기를 보내고 있다.’
그리고 신들의 영향을 받은 것은 지구 또한 마찬가지였다.
여신이 무슨 일을 벌인 것인지는 모르나, 그녀의 잘못된 선택으로 두 세계가 이어지며 지구마저 위기에 빠졌다.
신들의 힘이 인간들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이 옳은가?
‘그럴 리가.’
하얀 가면의 숙원은 그런 신들의 영향력 아래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신들을 압도하는 강한 힘을 손에 넣어, 모든 신들을 끝없이 죽이는 것.
단순하지만 확실한 해결법이긴 했다.
만약 처음부터 하얀 가면이 호진에게 이런 목적을 말하며 협력을 구했다면……. 무고한 사람들을 해치지 않았다면…….
‘어쩌면 하얀 가면과 함께했을지도.’
호진은 그런 생각을 하며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미 지나간 일을 가정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
무엇보다 차분히 생각해보니 하얀 가면의 생각은 다소 무리한 부분이 있었다.
죽지 않는 신들을 무한히 죽이다니.
그건 무한이라는 숫자를 너무 가볍게 보고 있는 거다.
호진은 억겁의 시간을 홀로 살아가며 미치거나 변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지.’
예를 들어 신격들을 완전히 소멸시킬 방법을 찾는다거나 아니면 그들을 세상에서 떠나게 한다거나.
뭐 아직은 생각뿐이지만 말이다.
‘그리고 고려해야 할 것은 지구만이 아니야.’
저쪽의 세상에서도 호진은 많은 인연을 쌓아 올렸고, 많은 이들의 기대를 짊어지고 있었다.
호진은 그들 역시 지키고 싶었다.
해야 할 일은 변하지 않았다.
더 많은 힘과 정보를 얻어야 했다.
힘과 정보가 호진의 선택에 다양성과 자율성을 가져다줄 것이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은…….
“형.”
“어어?”
호진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해? 역시 더 쉬어야 하는 거 아냐?”
용재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호진을 보며 물었다.
“아니,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 어라? 기서 씨는?”
“아까 형이랑 인사하고 게이트로 들어갔잖아…… 진짜 괜찮지?”
“아, 괜찮아. 괜찮아.”
호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살폈다.
어느새 게이트로 들어서는 행렬도 마무리에 들어섰다.
남은 것은 일부 헌터들과 호진 그리고 일행들 뿐.
“형, 역시 일단 강화로 가서 푹 쉬자. 이렇게 서두를 필요는…….”
“아니,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아.”
“……후우.”
호진의 단호한 대답에 용재는 한숨을 쉬곤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호진도 피곤함을 감추기 어려웠다.
하루 종일 쉬었다지만, 몇 개월간 싸우고 이동하기를 반복했으니.
정신과 육체에 피로가 쌓였을 수밖에.
하지만 그럼에도 호진은 하루라도 빨리 저쪽 세계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예상보다 이쪽 세계에서 시간을 많이 썼다.
하다못해 가서 쉬어야 마음이 놓일 듯했다.
“고맙다. 도훈 씨도요.”
“갑자기?”
용재는 흠칫 놀라며 인상을 찡그렸다.
“피곤한 거 알고 있어. 가서 별일 없으면 푹 쉬자,”
“됐네. 누가 피곤해서 그래? 형이 피곤해 보여서 그렇지.”
“맞는 말이다. 아파 보인다.”
용재와 도훈이 동시에 말을 쏟아내자 호진은 차 유리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바라봤다.
정리하지 않은 머리와 수염 그리고 까칠한 피부.
가장 심각한 것은 눈 밑의 다크서클이었다.
이래서야 신은커녕 병실의 환자에 더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목표를 위해서라면 지금은 움직여야 할 시기였다.
지구에서의 할 일은 끝났으니.
호진은 기껍게 웃으며 게이트를 새롭게 하나 열어젖혔다.
“가 보자고. 성국으로.”
***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뇨, 그보다 바로 가볼 수 있을까요?”
가을은 기서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그런 그녀의 말에 기서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 이내 손뼉을 탁 쳤다.
“아. 신전에 가 보고 싶다고 하셨죠. 가시죠. 그렇지 않아도 많이 바뀌었다고 들어서 궁금하던 참이었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가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높은 친화력을 지닌 그녀였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낯을 가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강화도에는 처음 온 터라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 이름은 물론 얼굴조차 잘 몰랐다.
기껏해야 하루 같이 있었던 게 전부였으니까.
‘오히려 잘됐어.’
가을은 주먹을 쥐며 앞서는 기서의 뒤를 쫓았다.
그녀가 앞으로 해야 하는 역할은 남들에게 가볍게 보여선 안 됐다.
‘믿음은 신비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것.
보고도 믿을 수 없는 것.
즉, 미지야말로 인간들이 종교를 만들고 신을 숭배하는 이유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거대한 성을 빠져나와 잘 닦인 길을 걸은 지 몇 십여 분.
가을의 눈에 화려하고 웅장한 신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와아.”
“이건…… 대단하네요.”
가을도 그랬지만 길 안내를 해준 기서마저 멍하니 신전의 모습을 바라봤다.
아무리 기본적인 구조는 잡혀 있었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그 짧은 시간 안에 만들었다고는 믿을 수 없는 크기와 정교함이었다.
특히 신전 앞에 놓인 호진의 동상은 그 크기도 크기지만, 보는 것만으로 베일 것 같은 압도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역시 난쟁이들이네요. 소설이나 영화와 비교해 조금도 모자라지 않아요.”
기서가 감탄하자 가을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며 신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전 안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게이트였다.
가을은 정작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지만, 아무래도 이 게이트를 지나면 다른 세상으로 갈 수 있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호진은 그곳에서도 신으로 추앙받는 모양이었다.
“질 수 없지.”
가을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중얼거렸다.
지구는 호진이 원래 살던 세계이고, 그중 강화도 캠프는 호진이 처음으로 만든 조직이자 거점이었다.
‘그런 이곳이 다른 세계보다 믿음이 부족하면 안 되겠지.’
가을은 각오를 다지며 한쪽에 만들어진 제단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용재와 일행들이 집필해온 호진의 경전이 놓여 있었다.
가을은 그것을 펼쳐서 훑어봤다.
그러곤 예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아무래도 공식 경전은 이쪽이 좋겠죠.”
작게 중얼거린 그녀는 품속에서 경전을 하나 꺼내 그것을 제단 위로 올렸다.
이를 지켜보던 기서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그건 뭡니까?”
가을은 몸을 비켜 경전을 기서에게 보여주며 입을 열었다.
“검의 교단, 아니 호진님의 경전입니다.”
검의 교단의 경전.
한때 교단의 역사가 담겼던 이 경전은 이제 오직 한 사람의 이야기만을 써 내려가게 되었다.
검의 교단 마지막 계승자이자 최강의 검사인 호진의 이야기를.
가을은 제단 앞에 무릎 꿇고 신실한 기도를 올렸다.
어릴 때부터 몸에 익은 기도자세에선 경건함이 자연스럽게 묻어났고, 이를 지켜보던 이들로 하여금 신비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기서와 가을의 등장에 호기심을 가지고 이쪽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하나둘 재단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직 강화에서는 제대로 체계가 잡히지 않았지만, 호진을 신적인 존재로 여기는 이들은 꽤나 많았다.
굳이 그런 게 아니더라도 존경하고 동경하는 이들은 강화도 캠프의 전부에 가까웠고 말이다.
‘조건은 충분.’
가을은 사람들이 보내오는 신앙심을 몸으로 느끼며 가볍게 전율했다.
마치 사람들과 정신적으로 연결된 듯한 기분이었다.
가을은 천천히 눈을 뜨고 몸을 일으켰다.
적막한 분위기 속 주변의 사람들의 시선이 가을을 향했다.
어딘가 고양되고 뜨거운 시선들.
종교적인 충만감에 젖은 이들은 가을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저는 호진 님을 섬기는 무녀. 앞으로 그분의 말을 전하고 여러분의 목소리를 그분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맡게 될 사람입니다.”
가을의 목소리가 신전 안에 울리듯 조용하게 퍼져나갔다.
“그렇기에 이 자리에서 선언합니다.”
가을은 자신의 신력을 끌어올려 주변으로 퍼트렸다.
목소리에 불가사의한 설득력이 서리고, 신성한 기운이 신전 주위를 맴돌았다.
가을은 얼마 전 호진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교단의 이름?’
‘그런 게 필요하다니까요. 언제까지 호진교라고 부를 수도 없잖아요.’
‘그건 싫지.’
‘그러니까 떠올려보세요. 뭔가 목표라던가.’
‘목표? 흐음. 목표라면…….’
턱을 붙잡고 고민하던 호진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한마디.
“자유.”
가을의 단호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류의 자유와 해방을 위한 교단. 자유 교단의 시작을!”
─띠링
「공식 경전이 지정되었습니다.」
「지배하는 모든 도시에 신전과 관리자가 지정되었습니다.」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자유 교단의 이름이 널리 퍼집니다.」
「모든 도시에 신앙이 크게 증가합니다.」
「결계가 강화되고 축복이 발동합니다.」
「플레이어의 격이 크게 상승합니다.」
「플레이어의 격이 크게 상승합니다.」
「플레이어의 격이 크게 상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