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8화. 자유 교단 (1)
─서걱
붉은 선혈이 튀어 올랐다.
가상의 공간임에도 통증은 그대로 몸에 새겨졌다.
호진은 비틀거리며 손에든 검을 바닥에 꽂아 몸을 지탱했다.
그러나 그러기도 잠시 힘이 풀린 다리가 버티지 못하고 끝내 넘어지고 말았다.
“웃기지도 않는군.”
몇 번째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수백 차례 몸이 썰린 호진은 바닥에 널브러진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찡그린 얼굴을 돌려 바라본 그곳엔 검신이 서 있었다.
아이와 같은 체구에 회색 로브를 뒤집어쓴 그 모습은 수도승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것이 검신의 검술.’
호진은 새삼 깨달았다.
게일과의 마지막 승부에서 심검으로 승부를 보려 했다면 당하는 것은 분명 자신이었을 것이라는 것을.
“설마 검신의 검술이라는 게 카운터였을 줄이야.”
검을 늘어트린 채 무방비하게 있는 기수식.
검신이 노리는 것은 호진의 공격이었다.
그의 반격 앞에선 검도, 마법도, 권능조차도 무의미하다.
타이밍만 맞출 수 있다면 모든 공격을 그대로 상대에게 되돌릴 수 있다.
상대를 벤다는 개념을 현실로 구현하는 호진의 심검조차 말이다.
‘오늘로 칠 일째인가.’
다른 수백의 검사들의 검을 꺾고 익히는 데는 고작 이틀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러나 검신과의 대결은 전혀 달랐다.
호진은 검신의 옷 끝 하나 스치지 못하고 나흘을 보내야 했다.
검의 교단의 검술은 게일과 신도들이 자신과 인간에 맞게 변형시켜 쌓아 올린 것일 뿐.
검신의 검술은 일반적인 검술과는 개념부터 다른 것으로, 이미 검술이라고 정의하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호진이 주먹을 꽉 쥐며 중얼거렸다.
“이번엔 베었다.”
─비틀
검신의 신형이 흔들리더니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회색의 로브가 잘려 나풀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 속의 모습은 금색 머리칼과 푸른 벽안을 지닌 소년.
하얀 반 가면을 쓴, 신비로우면서도 아름다워 보이는 그 외견은 어딘가 익숙했다.
이 세계의 것이 아닌 듯한 무기질적인 느낌…….
‘울타.’
호진은 소년을 보며 처음 숲에서 울타의 모습을 보았을 때를 떠올릴 수 있었다.
생김새는 달랐지만 인간의 형상이라기엔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소년의 외형은 울타를 연상시켰다.
그러던 그때 검신이 고개를 돌렸다.
호진은 왠지 그와 눈이 맞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다음 순간 검신의 몸이 연기가 되어 사라져 갔다.
─띠링
「스킬이 생성되었습니다. 신검(神劍)/ 되돌리기」
「신검(神劍)/ 되돌리기 : 어떠한 공격이라도 상대에게 돌려보내는 오의.」
「스킬을 한계치까지 익혔습니다.」
어둠이 드리워진 무도장에 남은 것은 이제 호진뿐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익혔다.’
검신의 기술을 이용해 그를 쓰러트리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기술이 아닌 격과 개념을 이해해야 했기에 결코 쉽지만은 않았지만, 호진은 끝내 해냈다.
물론 그가 쓰러트린 것은 진짜 검신이 아니었다.
그저 게일이 보고 파악한 검신일 뿐이다.
그래도 많은 것을 배웠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호진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찬찬히 돌아봤다.
이미 무너지고 있던 세상이 더욱 빠른 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자신의 역할을 다했다는 듯이.
어둠이 드리워진 세계가 새하얀 빛에 먹혀가며 산산이 부서졌다.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곳은 기껏해야 호진의 주변 정도였다.
“이제 나갈 시간이라는 거군.”
조금 더 쉬고 나가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게일이 한계에 부딪힌 모양이었다.
어서 빨리 나가라는 그의 재촉이 느껴지는 듯했다.
호진은 끄응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몸에 난 상처는 조금의 흉터도 없이 나아 있었다.
굉장한 공간이었다.
만약 호진에게도 이런 수련용 공간이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쉽게 강해졌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랬다면 게일을 이길 수 없었겠지.’
호진에겐 호진을 이루는 근원과 힘이 있다.
없는 것을 욕심낼 필요는 없다.
호진은 그저 이런 기회를 마련해 준 게일을 향해 내심 감사를 표할 뿐이었다.
그러기도 잠시, 호진은 몸을 돌려 점점 다가오는 새하얀 빛무리를 향해 발을 내디뎠다.
***
“으아아아아! 죽어!”
“물러서지 마!”
소란스러운 전장의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이젠 시끄럽게 귀를 울렸다.
‘여긴?’
호진은 흐린 동공을 깜빡이며 주변을 살폈다.
순식간에 바뀌어버린 시야와 상황은 잠깐이지만 정신을 멍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렇지. 전쟁 중이었어.’
일주일간 수련을 하느라 이미 예전의 기억처럼 어색하게 느껴졌지만, 현실의 시간으로는 고작 칠 분이 흘렀을 뿐이었다.
호진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머리도 몸도 묵직했다.
일주일간 수백 차례 죽어가며 검을 휘두른 피로감은 지워지지 않았기에.
그럼에도 호진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우선 쓰러져 피 흘리는 게일을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가서 몸을 흔들었음에도 게일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심장은 멈췄고 피부는 차게 식었다.
‘아니, 애초에 되살아난 거였으니 당연한가.’
불사의 신의 봉사자들은 하나같이 움직이는 시체들이다.
그런 그들이 심장이 뛰고 피부가 따듯한 게 이상했다.
하지만 불사의 신의 권능으로 되살아난 자들에게도 느껴지는 생명력이 있다.
그런데 지금의 게일은 영혼이 빠져나간 텅 빈 그릇일 뿐이었다.
호진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마지막까지 버텼을 터.
“쯧.”
가볍게 혀를 찬 호진은 문득 그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그의 가면을 향해 손을 뻗던 호진은 순간 멈칫하며 손을 멈췄다.
그러곤 천천히 손을 내렸다.
검의 교단의 교인들이 하나같이 가면을 소중히 하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정작 게일이었으면 신경조차 안 쓸 것 같은 느낌이었지만, 왠지 호진은 그의 가면을 벗기고 싶지 않았다.
호진이 그렇게 게일로부터 몸을 돌리던 그때였다.
─띠링
「불사의 신의 사도, 전(前) 검의 교단 초대 총대주교 게일을 처리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불가능한 업적을 달성했습니다. 보상이 가산됩니다.」
「보상이 인벤토리에 수납되었습니다.」
「플레이어의 격이 크게 상승합니다.」
「고대신의 파편을 얻었습니다.」
전투의 끝을 알리는 시스템 창이 눈앞을 가렸다.
하지만 아직 전쟁은 아직 한창 진행 중이었다.
호진은 시선을 돌려 전장을 바라봤다.
게일이 쓰러졌음에도 불사의 신의 봉사자들은 아직도 인간들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들고 있었다.
아직 호진의 일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마무리를 해야겠지.”
호진은 방어선에 서 조용히 손을 들어 올렸다.
몸 깊은 곳에서 새롭게 얻은 격이 일렁이며 끓어올랐다.
무려 검의 교단 초대 교주인 게일의 격을 흡수한 것이다.
텅 비어 버렸던 호진의 격도 충분히 회복되었다.
‘한 번 정도는 가능하겠지.’
호진이 검신과의 대결 중에 본 검술, 신검(神劍).
그것은 전부 다섯 초식으로 이루어진 검술이었다.
그중 하나가 호진이 마지막에 겨우 익혔던 ‘신검/되돌리기’였는데, 아무리 호진이라도 다른 초식들을 전부 익히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다만, 되돌리기 이외에 호진이 익힌 기술은 하나가 더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후우.”
폐로 숨이 가득 들어찼다.
아까보다도 짙은 혈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호진의 손끝이 곧게 펴진 채, 거리낌 없이 수직으로 내리 떨어졌다.
동시에 호진의 입에서 나지막하게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신검(神劍) 소낙비.”
─화악
하늘에 드리워진 구름을 흩어내며 무언가가 낙하하기 시작했다.
하나둘 늘어가다 이윽고 셀 수조차 없이 늘어나 하늘의 구름을 모두 지워버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가가가가각
천둥 벽력과 같은 굉음을 내며 지상으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하나하나가 호진의 격이 실린 검의 형상.
그것은 비처럼 쏟아지는 검의 폭풍이었다.
피와 살이 튀고 뼈가 부러졌다.
폭풍우처럼 쏟아지는 검에 맞고도 멀쩡히 서 있을 수 있는 자는 이 전장 어디에도 없었다.
검은 자신이 꿰뚫은 시체의 묘비가 되어 지상에 단단히 자리 잡았다.
흔들리지 않는 고목처럼.
얼마나 이어졌을까.
눈에 닿는 곳부터 아닌 곳까지.
호진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은 없었다.
길게 이어진 방어선 그리고 지평선의 끝까지.
하늘에서 쏟아지는 검의 비는 마치 모든 걸 휩쓸어 버리는 해일과 같이 전장을 뒤덮었다.
─콰직
마지막으로 떨어진 검에 맞은 시체 하나가 부르르 몸을 떨다 그대로 절명했다.
그것을 끝으로 전장에는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적막이 찾아왔다.
“…….”
눈앞에서 일어났다고는 하나, 쉬이 믿기 어려운 이적이었다.
사람들은 그저 입을 벌린 채 눈을 끔뻑일 뿐이었다.
돌연 하늘에서 쏟아진 검들은 골렘을 비롯한 인간들에게 조금의 피해도 주지 않은 채, 불사의 신의 봉사자들만을 휩쓸어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검의 무덤.
수천 수만 자루의 검이 내리꽂힌 지상은 아이러니하게도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
“내가 미친 건가?”
“……나도 그런 것 같다.”
용재와 도훈은 나란히 주저앉아서 중얼거렸다.
놀라기도 놀랐지만 움직일 힘이 남지 않아서였다.
그들의 주위로 열 개의 하얀 가면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두 사람은 힘을 합쳐 끝내 그들을 전부 쓰러트리는 데 성공한 것이었다.
‘조금만 쉬다가 다시 전투에 참여하려고 했는데.’
용재는 멍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간신히 적들을 쓰러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두 사람의 시야에 담긴 것은 말 그대로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이었다.
하늘에서 검의 비가 쏟아져 내리는가 싶더니 전장을 뒤덮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게 끝났다.
“이렇게 끝난다고?”
용재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말을 하면서도 도통 실감이 나질 않았다.
‘도대체 누가 이런…….’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용재가 아는 한, 한 명뿐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한 명도 이런 이적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만약 이런 일이 가능하다면 그건 이미 인간이 아니라…….
─저벅저벅
“신이겠지.”
용재는 어느새 눈앞에 나타나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호진을 보며 생각했던 말을 내뱉었다.
이에 호진은 인상을 찡그리며 답했다.
“갑자기 뭐라는 거야.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죽지는 않을걸.”
“나도 괜찮다.”
용재와 도훈은 호진의 물음에 답하며 그를 지그시 바라봤다.
“뭡니까?”
호진의 물음에 용재와 도훈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답할 뿐이었다.
“아니, 그저. 새삼 느꼈을 뿐이다.”
자신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존재는 눈앞의 남자 단 하나뿐이라고.
─띠링
「플레이어의 격이 크게 상승합니다.」
이날 호진은 전장에 선 모든 이들의 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