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불사의 신의 사도 (7)
─띠링
「새로운 스킬을 성공적으로 시연했습니다.」
「새로운 스킬의 이름이 지정되었습니다. 심검/거짓 베기」
호진은 눈앞에 떠오르는 푸른 상태창을 치워 버리며 상대를 바라봤다.
무덤덤한 시선 끝에 비틀거리는 게일의 모습이 있었다.
“설마…… 끄윽, 시간을 비틀다뇨. 크큭.”
게일은 내장과 피를 한 손으로 틀어막으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건 당신의 근원과 권능이 아니지 않습니까.”
“맞아.”
호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근데 모방이 너만의 특기는 아니잖아.”
“…….”
게일은 호진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물론 누군가의 기술을 보고 흡수하는 능력이 자신만의 전유물이 아님은 안다.
하지만.
“……다른 신의 신격을 모방하는 건 크윽, 저도 어렵습니다만.”
하물며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어레인지 하는 것은 더더욱이나 말이 되지 않았다.
오랜 시간 관찰하고 궁리하여 얻어낸 검신의 기술.
그것조차 아직 완성하지 못한 게일은 터무니없는 부조리를 느꼈다.
“그건 몰랐네. 그치만 난 되던걸.”
호진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게일은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거야 원.’
이래서야 화도 나지 않는다.
압도적인 가능성.
그 끝이 보이질 않는 호진의 재능에 게일은 혀를 내둘렀다.
비슷하다고 여겼지만, 호진은 자신과 너무나도 다른 존재였다.
‘그런가. 내 여정은 여기까진가.’
모든 인간을 구원한다는 목적에 방점을 찍을 자는 자신이 아니었다.
이 이야기에 자신은 들러리, 잘해봤자 주연 악역일 뿐.
애초에 주인공은 정해져 있었던 듯했다.
그렇다면 하다못해…….
“입체적인 악당이 좋겠군요. 단순한 건, 쿨럭, 싫어서요.”
“뭐?”
마무리를 위해 검을 고쳐잡은 호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에 게일은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
“잠시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무슨 소릴…….”
호진은 인상을 찡그리던 표정 채로 멈춰 섰다.
현실의 세계에 게일의 세계가 겹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거절할 수 없는 초대이자, 아직 호진이 깨우치지 못한 신들의 고유한 세계.
신역이었다.
***
누군가에게는 심상세계. 또 누군가에게는 주술세계.
격을 지닌 자의 내면에는 또 하나의 세상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신역이란 그 신격의 근원과 가장 유사한 공간이 된다.
예를 들면.
울그렉 이후트는 창조를 기반으로 하는 근원을 지녔다.
그렇기에 자신의 신역에서 다른 신들의 사도들을 불러내는 신위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거미집처럼 세계를 짜고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그녀의 신역이 가지는 특성이었다.
용재의 투신전도 마찬가지다.
스킬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투신전 또한 용재의 투쟁심과 향상심이 만들어낸 고유의 신역이라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여긴…….’
호진은 눈 깜짝할 사이에 끌려온 공간을 두리번거렸다.
이 짙은 어둠은 당연하게도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살아 숨 쉬는 듯한 어둠은 호진의 눈으로도 꿰뚫어 볼 수 없었으니까.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사방에서 울리듯 들렸다.
“어서 오십시오. 저의 가면무도회에.”
“가면…… 무도회?”
호진이 인상을 쓰며 머리를 짚으려던 순간.
─틱
무언가 손끝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이마가 있어야 할 자리 위로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건…… 가면?’
호진은 자신의 얼굴에 반쯤 뒤덮인 반 가면을 그제야 눈치챘다.
그와 동시에 어둠 속에서 게일이 모습을 드러내며 말했다.
“빈손으로 오신 손님께는 대여도 해드리고 있습니다. 괘념치 마시길.”
“……필요 없으니까 도로 가져가.”
“그건 곤란한데요. 기껏 준비한 거니 그냥 써주십시오. 벗으면 이 공간에서 머무르실 수 없게 됩니다.”
“그럼 좋은 거 아닌가? 내가 여기 있어야 할 이유를 모르겠는데.”
“끝까지 이야기를 들어주시죠.”
호진은 게일과 말을 주고받으면서도 슬며시 쥐고 있는 검에 힘을 줬다.
게일의 모습이 멀쩡했기 때문이었다.
‘공격이 통하지 않았던 건가……?’
그렇다고 한다면 이 싸움은 호진이 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호진의 긴장된 분위기를 눈치챈 걸까.
게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곳은 저의 신역이자 심상의 세계. 현실이 아니라 저만의 규칙이 작용하는 세계입니다. 즉…….”
호진의 긴장한 표정을 바라보며 게일은 말을 멈췄다.
어색한 침묵 끝에 호진이 발끈하며 물었다.
“즉, 뭐?”
“즉, 저의 몸은 지금도 실시간으로 죽어가고 있으니 걱정은 넣어두시라는 말입니다.”
게일은 긴장한 호진을 보며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젠장…….’
호진은 자신이 놀림당했다는 것을 깨닫고 속으로 혀를 찼다.
죽어가는 순간마저 장난이라니, 머리가 정상이 아니었다.
‘어울려 줄 필요는 없겠지.’
호진은 곧장 화제를 돌려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렇다면 승부는 정해졌을 텐데. 인제 와서 왜 이런 짓을…….”
“이건 일종의 선물입니다.”
“선물?”
호진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게일은 여유롭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가면무도회. 이곳은 모방의 근원을 이용해 만든 저만의 연습 공간입니다.”
─딱
게일이 손가락을 튕기자 어디선가 조명이 켜지며 어둠이 드리워진 공간을 차례로 비췄다.
차례차례 내리쬔 원형의 빛무리 아래, 모습을 드러내는 가면을 쓴 이들.
새하얀 민무늬 가면.
용 형상의 가면.
황금색의 화려한 가면.
가면의 생김새는 가지각색이었지만 다르지 않은 것도 있었다.
이들은 하나같이 검을 들거나 차고 있었던 것이다.
‘검사들인가.’
호진은 순간 홀린 듯 그들을 바라봤다.
한 명 한 명이 일반적으론 도달할 수 없는 경지까지 오른 검사들임이 분명했다.
“전 한 번 본 모든 검사들을 이곳에 불러올 수 있습니다. 죽고 죽이는 대련을 할 수도 있고 천천히 기술을 관찰할 수도 있죠.”
능력을 모방하는 것은 간단하지만 그것을 능숙하게 활용하는 것은 다른 문제.
그렇기에 게일은 가면무도회라는 자신만의 연습 공간을 만들어냈다.
“이곳에선 다치거나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도 없고, 잠도 음식도 필요 없습니다.”
게일은 반짝이는 호진의 두 눈을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곳을 빌려드리겠습니다.”
“무슨 헛소리지? 네가 그럴 이유가…….”
호진은 반사적으로 경계심을 끌어올리다가 멈칫했다.
이유야 있었다.
그것도 너무나도 분명하게.
“너…….”
“제가 졌으니 순순히 인정해야겠죠. 제 목적을 이뤄 줄 사람은 당신뿐입니다.”
“……쯧.”
호진은 짧게 혀를 찼다.
그와는 반대로 게일은 큭큭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죽어가는 중이라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길어 봤자 일주일일까요. 이곳에서의 하루는 현실에서 일 분이거든요.”
원래라면 사실상 시간제한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이곳에 비하면 멈춘 거나 마찬가지라 해도 현실 세계에선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제 자아는 흐려지고 세계는 붕괴되겠죠. 그전에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말해.”
호진이 불퉁하게 답했다.
게일의 도움을 받는 이 상황이 도통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거절할 생각은 없었다.
‘이런 기회를 거절한다면 미친 거겠지.’
게일이 지금까지 상대했던 모든 검사들의 경험을 흡수할 기회.
그것을 거절하기엔 호진의 머리는 지극히 이성적이었다.
게일은 그런 호진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첫 번째로 말씀드릴 건, 신에게 기도 올리는 돌입니다.”
“돌?”
호진은 인벤토리 안에 고이 잠들어있는 텅 빈 돌을 떠올렸다.
“그 돌의 원래 용도는 사도를 만들기 위함이니, 힘을 담아 원하는 사람에게 넘기십시오. 그자가 당신의 사도 자리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런 용도였다니.
호진은 티 나지 않게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용재와 도훈이라면 사도가 될 자격은 충분할 터였다.
다만, 사도가 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뿐이라는 게 걸렸지만…….
게일은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이어 나갔다.
“두 번째는 검신에 대한 정보입니다. 모든 신 중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신이 있다면 그건 단연코 검신입니다. 다만, 제가 죽인 이후의 행방이 모호하더군요.”
신들의 전쟁에서 패배한 고대신들과는 달리, 전쟁은 선신들의 승리로 끝났다.
선신들의 일원인 검신은 진즉에 부활했어야 할 텐데, 행적이 묘연했다.
“혹자는 제 검에 소멸됐다 하고, 또 혹자는 선신들이 그를 봉인했다고도 하지만…… 모두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게일은 고개를 젓다가 호진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진실은 당신만이 밝힐 수 있을 겁니다. 부디 원하는 바를 이루시길.”
“……네가 말 안 해도 그렇게 할 거야.”
“쌀쌀맞으시긴. 마지막으로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뭐지?”
호진이 되물었음에도 게일은 보기 드물게 질문을 망설였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게일이 물었다.
“제가 당신의 성장에 도움이 됐습니까?”
그 물음을 던지는 게일의 목소리엔 왠지 모르게 이전과는 다른 긴장감이 느껴졌다.
되살아난 자신의 삶의 목적을 찾고 싶었던 것일까.
호진으로서는 그를 위로해 줄 마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게일이 어쩔 수 없다는 이유로 해온 모든 악행들은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쯧.”
그렇다고 거짓으로 그의 삶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래. 네가 한 짓거리들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호진은 진심으로 그렇게 답했다.
만약 게일이 아니었다면 호진은 이렇게 빠르게 성장할 수도, 나아갈 방향을 찾아내지도 못했을 테니까.
대답을 들은 게일은 한차례 가볍게 몸을 떨곤 답했다.
“그렇습니까. 그건 조금 기쁘군요.”
그러기도 잠시, 언제 그랬냐는 듯 능글맞게 웃었다.
“그럼 어디 한번 끝까지 발버둥 쳐보시죠. 당신이 어디까지 도달할지 지켜보겠습니다.”
─툭
하얀 가면이 게일이 선 자리에 떨어져 내렸다.
게일은 그 말을 끝으로 신형을 흐리며 사라진 것이다.
뒤이어 하얀 가면도 연기가 되어 어둠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남은 것은 호진과 가면을 쓴 무수한 검사들 뿐.
호진은 잠시 말없이 게일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일주일…… 인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먹지도 자지도 않는다면 글쎄.
“뭘 얻어도 얻겠지.”
호진은 천천히 검사들을 둘러봤다.
얼굴은 안 보이지만, 그럼에도 알 수 있는 것들이 있었다.
노인과 소년.
여자와 남자.
인간과 아인까지.
가면으로 채 가려지지 않는 것들.
그들이 쥔 검의 형태도 모두 달랐다.
과연 어떤 검술을 보여줄까.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그리고.’
가장 욕심나는 것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스윽
호진의 시선이 늘어선 가면들의 끝을 향했다.
그곳엔 회색 로브를 뒤집어쓴 이가 있었다.
인간을 닮았지만, 결코 인간이 아닌 존재.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베일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의 정체를 호진은 단번에 눈치챘다.
“검신…….”
이야기로만 들어왔던 존재를 드디어 눈에 담았다.
의외로 체격은 크지 않았다.
키는 오히려 호진보다 훨씬 작았다.
아이 같은 체구에 자신의 신장만 한 검을 허리에 차고 있다.
검의 신은 과연 어떤 검술을 보여줄 것인가.
“재밌겠군.”
호진은 웃으며 검을 고쳐 잡았다.
수련의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