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불사의 신의 사도 (6)
시작은 호진이었다.
호진은 돌연 겨누고 있던 청성을 손에서 놓았다.
그와 동시에 허리춤에 찬 검이 빗살과 같은 속도로 뽑혀 나왔다.
─스걱
기습은 예상치 못한 순간, 즉 의외의 순간에 빛을 발하는 법이다.
그렇기에 지금은 절 베기만 한 것이 없을 터였다.
호진의 가장 숙련된 기술이 눈이 깜빡할 사이에 게일의 목을 노리고 뻗어나갔다.
그러나…….
“호오. 느닷없이 시작하시는군요.”
게일은 고개를 비스듬히 하는 것으로 공격을 흘렸다.
호진은 당황하지 않았다.
절 베기는 이제 호진이 지닌 많은 수 중 하나일 뿐이었으니까.
호진은 곧장 절 베기에 사용한 검을 투척하고는 손에서 놓았던 청성을 발로 차올려 낚아챘다.
그러곤 환령보를 사용, 놈에게 접근해 검을 휘둘렀다.
─챙!
그러나 어김없이 호진의 검은 너무나 쉽게 가로막혔다.
“환령보? 아, 설마 빼앗은 겁니까?”
검을 막은 게일은, 코등이를 부딪치며 맞은편의 호진에게 물었다.
호진은 대답 대신 검에 힘을 주어 뒤로 튕겨 나듯 물러났다.
그 순간.
─후욱
게일이 빠르게 호진과 거리를 좁히며 검을 휘둘렀다.
뭔가 특별한 기술이 아니다.
그저 빠르게 다가와 검을 휘두른 것뿐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위험……!’
호진은 재빠르게 이화접목을 사용했다.
─스륵
검을 흘려냄과 동시에 빈틈을 찾았지만, 아쉽게도 보이지 않았다.
급하게 펼친 만큼 이화접목도 완벽하진 않았던 것이다.
호진은 재차 거리를 벌리는 데 집중했고, 이번엔 다행히 무사히 물러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은 좋다고 보기만은 어려웠다.
‘이런.’
이렇게 빠르게 기술들을 내보일 예정이 아니었기에, 호진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욕지거리를 내뱉어야 했다.
그런 호진을 향해 게일은 웃으며 말했다.
“제가 받은 만큼은 돌려주는 편이라.”
‘역시 쉽지 않겠네.’
탐색전이었다고 하지만 전력을 다한 공격이었다.
하지만 게일은 그것을 너무나도 쉽게 파훼하며 이쪽을 탐색해 왔다.
“처음의 그 기술은 발도술의 일종인가요. 궤적을 따라 기를 투사하는 느낌으로?”
정확했다.
잠깐 사이에 호진의 기술들은 낱낱이 밝혀진 데 비해 호진은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야 당연하지…….’
아직 상대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어떻게든 본 실력을 끌어내야 한다.
이대로 모든 패를 드러내고도 게일이 멀쩡하다면, 이 싸움의 결과는 호진의 패배가 될 것이 자명했기에.
호진은 청성에 기를 불어넣었다.
주변에 얼음 폭풍이 일며 시야가 흐려졌다.
호진은 동시에 모래시계를 사용해 게일의 측면에서 검을 휘둘렀다.
검을 휘두르는 순간 모래시계를 사용한 만큼 놈에겐 대비할 시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스륵
게일은 호진의 검을 부드럽게 흘려넘겼다.
그것은 호진이 사용했던 이화접목과 같은 기술이었다.
마치 자신을 농락하는 듯한 기술을 선보이는 게일에 호진은 입술이 하얘지도록 깨물었다.
‘속도를 높여 몰아붙인다.’
호진은 검을 이스티리온으로 바꿔 들었다.
빠른 속도로 휘몰아친다면 아무리 놈이라 해도 무언가 보여줄 수밖에 없을 터.
호진은 검을 든 채 튀어 오르듯 몸을 튕겼다.
순식간에 강신무가 발동하며 세계가 변화했다.
발에 기를 흘려보내 보법을 운용하자, 뜨거운 열기가 가득한 전장의 공기를 가로지르며 신형이 흐르듯 움직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반전된 시야.
게일은 여전히 호진이 서 있는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호진이 서 있던 자리에 아직도 호진의 잔상이 있었기 때문이다.
‘절호의 기회다.’
호진의 검이 놈의 무방비한 등을 내리그었다.
─후웅
그리고 허공을 갈랐다.
“어?”
호진의 입에서 의문이 흘러나오던 그때, 장난기 가득한 게일의 목소리가 고막을 울렸다.
“좋은 보법이죠. 환령보.”
─카랑!
호진이 급히 옆으로 세운 검날에 게일이 휘두른 검이 맞부딪치며 불꽃이 튀었다.
가볍게 휘두른 듯 보이지만 묵직한 일격에 호진은 또다시 게일에게서 거리를 벌려야만 했다.
“쯧.”
또 당했다.
자신과 같은 기술을 능숙하게 쓰는 모습에 호진은 혀를 차고는 놈과 재빨리 다시 거리를 좁혀 검을 휘둘렀다.
다행히 환령보를 쓸 줄 아는 녀석과는 부산에서 싸워 봤다.
문제라면 상대도 호진이 쓰는 환령보에 대한 대응이 완벽하다는 것이었다.
─캉 카강 카가가강
그럼에도 호진의 검은 점점 빨라졌다.
이스티리온의 효과에 힘입어 퍼붓는 연격은 호진 자신조차 셀 수 없을 수준이었다.
‘이거라면…….’
그 폭풍 같은 기세에 여유로 일관하던 게일도 입을 다문 채 바삐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연격이 극에 다다른 순간.
호진은 또 다른 기술을 꺼내 들었다.
조영검.
무수한 연격 속에 공간을 찢어발기는 검격을 섞어 넣은 것이다.
보이지 않는 날카로운 이빨은 상대의 검과 몸을 물어뜯을 터였다.
분명 그랬어야 하는데…….
호진은 자신의 생각을 이어 나가지 못했다.
허벅지와 팔에 붉은 선이 그어지더니 피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베인 상처가 아니다.
공간에 살점 채 뜯겨나간 것이다.
“조…… 영검?”
자신이 수놓았던 검로는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렇다는 말은 정답은 하나뿐.
“이야, 조영검까지 익히셨다니. 호넷 교구장도 결국 당한 모양이군요.”
게일은 즐겁다는 듯이 웃으며 멍하니 멈춰선 호진에게 말을 건넸다.
‘놈이다.’
게일이 조영검을 사용해 호진을 벤 것이었다.
‘이것이…… 검의 교단 초대 교주인가?’
다른 하얀 가면들에게 모든 기술을 전수한 게 게일이라는 걸까?
그 모든 기술들을 직접 만든 사람이라고?
그렇다고 하면 승산은 있는 걸까.
어제와 마찬가지로 울타는 응답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호진은 막연한 기분에 잠시 멍하니 있다 어금니를 악물었다.
‘아니, 생각해 보자. 뭔가 걸리는 게…….’
자신보다 강자와의 싸움은 얼마든지 해 왔다.
자신이 어느 정도 강해진 이후로는 이런 강적을 한동안 만날 수 없었지만, 여기까지 오면서 몇 번이고 죽을 고비를 넘어왔다.
그때마다 호진은 전투의 흐름을 뒤바꿀 승리의 단서를 찾아내곤 했다.
이번에도 다르지 않았다.
‘뭔가…… 아.’
호진은 이번에도 이질감의 존재를 눈치챘다.
환령보도 그렇고 조영검도 그렇다.
만약 게일이 다른 하얀 가면들에게 기술을 전수한 것이라면…….
“다른 이들이 그것을 똑같이 쓸 리가 없지.”
“갑자기 무슨 소리입니까?”
게일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미 자신이 이기기라도 한 듯 여유로운 그의 모습에 호진은 헛웃음이 났다.
하긴, 상황만 놓고 본다면 분명 자신에게 절망적인 상황이리라.
하지만 호진은 방금 조금이지만 게일에 대해 깨달은 점이 있었다.
“다른 하얀 가면들과 네가 쓰는 기술들이 너무 닮았단 말이다. 필요 없는 부분마저도.”
“……그래서요?”
“그 기술들을 네가 가르친 게 아니야. 오히려 네가 따라 한 거지.”
“…….”
게일은 묘한 분위기를 흘리며 호진의 입을 바라봤다.
그리고 그에 응하듯 호진은 자신이 추측한 바를 입에 담았다.
“너. 모방이 특기구나.”
***
잠깐의 정적.
그 정적을 깬 것은 게일의 박수 소리였다.
─짝짝짝짝
“대단합니다. 그 짧은 사이에 눈치챈 사람은 당신이 유일합니다. 대개는 죽기 직전쯤 깨닫거든요.”
게일은 즐겁다는 듯 이어 말했다.
“예에. 제 근원은 바로 모방, 그 자체입니다.”
확신을 한 것은 놈이 이화접목을 따라 한 부분에서였다.
그는 급하게 펼치느라 완벽하지 않았던 호진의 이화접목을 그대로 따라 펼쳤다.
놈이 그 기술을 이미 알고 있었다면 그럴 필요는 없었을 테지.
모방.
남을 흉내 낸다는 것에서 볼품없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원본과 조금의 차이도 없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가짜라고 할 수 있을까?
모방이 원본을 대체할 수 있는 시점에서 그것은 이미 가짜가 아닌 또 하나의 진짜라고 할 수 있다.
그 모방을 제한 없이 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와 대결을 펼치는 모든 이들의 기술을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다는 말이다.
심지어 상대는 신들의 전쟁 시절을 겪은 신화 속의 인물이다.
그 말은즉.
‘끔찍하군.’
괴물도 이런 괴물이 없었다.
그가 검의 교단 최초의 교주가 될 수 있었던 이유.
“너, 검신조차도 모방했구나.”
“이야. 정말 머리 회전이 빠르신 분이시군요. 검의 교단 출신들은 대부분 머리가 좋지 않은 편인데 말이죠.”
게일은 연신 감탄하며 호진을 바라봤다.
반면 호진은 게일을 오싹하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검의 교단 초대 교주, 게일.
그야말로 검신 샤카하의 검술을 처음으로 ‘따라 한’ 남자인 것이다.
그렇기에 모방이야말로 그의 근원인 것이다.
호진의 시선을 즐겁게 받아내던 게일은 미소를 지으며 호진을 바라봤다.
“그래서? 당신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궁금해?”
호진은 피식 웃으며 동시에 자신의 심상 세계 속 근원을 불러냈다.
상대가 신의 검술을 따라 한 검사라면, 호진은 스스로 신격을 얻은 검사였다.
자신의 실력이 뒤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진 않았다.
그러나 최대한 빨리 결판을 내야 했다.
상대는 수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검술을 모방해 왔으며, 싸우면 싸울수록 자신의 기술도 모방할 터.
시간을 끌면 끌수록 불리한 것은 호진이었다.
단 한 번의 일격.
호진은 직감했다.
일격으로 승부를 내지 못한다면, 이 싸움은 자신의 패배였다.
─꽈악
푸른빛을 은은하게 흘리는 검 한 자루가 어느새 손아귀에 쥐어졌다.
그 순간 온몸에 전능감이 쩌릿하게 흘러 퍼졌다.
땅도, 하늘도, 바다도.
그 무엇이라 해도 벨 수 있다.
갈라낼 수 있다.
그런 확신이 머릿속을 채웠다.
“한 번만 보여줄 테니 잘 봐.”
“……재미없는 분이시군요.”
게일은 쓰게 웃으며 검을 땅을 향해 늘어트렸다.
처음 보는 기수식이다.
아니, 저걸 왜 기수식이라 생각했을까.
저런 터무니없는 준비 동작이 있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왠지 알 수 있었다.
저것이 게일이 모방한 검신의 기술이라는 것을.
호진이 전력을 다하기로 한 만큼, 게일도 자신이 지닌 최고의 수를 꺼내 든 것이다.
놈에게서 자신과 닮은 격이 느껴졌다.
격을 직접 쌓아 올린 자 특유의, 단단하면서도 견고한 기운.
‘위험한데.’
방금까지만 해도 온몸을 감돌던 전능감이 희미해져 갔다.
맞부딪친다면 벨 수 있을까?
‘아니.’
이대로라면 베는 건 자신이 아닌 상대라는 직감이 머리를 스쳤다.
자신의 근원은 베는 것.
하지만 아직 그것은 완성된 단계가 아니다.
이전에 비하면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예리해졌지만, 그럼에도 뭉툭하고 단조로운 검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울타가 있었더라면…….’
호진은 문뜩 이 자리에 없는 그녀를 떠올렸다.
그녀가 보여주던 언령들을 기억한다.
‘얼어라[π?γωμα]’
그저 말을 뱉는 것만으로 적의 움직임을 제한하고, 세상을 불태우고 얼리는 신비를.
‘잠깐.’
호진은 생각했다.
여신의 격을 검에 담았듯, 울타의 격 또한 검에 담을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지를 당장 떠올려야 했다.
더 강한 위력?
아니면 더 빠른 검격?
무엇도 아니다.
게일이 준비하는 일격이 무엇인지 모르는 이상에야 어떤 것을 준비해도 무의미했다.
호진이 게일을 살피듯, 게일 역시 호진을 살피고 있었다.
그렇기에 호진은 떠올릴 수 있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잠시 후.
호진은 머리 위로 올린 검을 내려긋기 시작했다.
이에 게일도 기다렸다는 듯 검을 휘두르려 했다.
─서걱
“어라?”
게일의 손이 검을 늘어트린 그대로 멈춰 섰다.
그의 허리에 붉은 실선이 생겨났다.
그리고 양단된 허리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후웅
반면 호진의 검은 이제 막 휘둘러진 참이었다.
기이한 엇박자.
그건 환상이나 기교 따위가 아니었다.
호진은 창백하게 식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두 번은 못 써먹겠군.”
검에 신비를 담아, 시간을 비틀어 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