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5화. 불사의 신의 사도 (5)
“흠.”
게일은 곤란하다는 듯 호진의 뒤로 나열하는 지원군들을 보며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기도 잠시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뭔가 어제 들었던 말과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요?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하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던가요.”
“전혀 다르지 않아. 저들은 각자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자기 자신의 목숨을 걸고 이 자리에 섰다. 나와 마찬가지로.”
“흠…… 과연. 그게 생각처럼 될까요?”
저들이 죽어갈 때도 그렇게 생각할까? 자신의 의지대로 싸우다 죽는다고?
그럴 리가 없다.
고통과 두려움은 몸을 경직시키고, 각오를 물렁하게 만들 것이다.
게일은 쓴웃음을 지으며 과거의 기억을 애써 짓눌렀다.
이에 호진은 옅게 미소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각오하는 게 좋을걸. 꽤나 따끔할 테니.”
서로의 목적이 같은 이상 가장 이상적인 결과는 서로 준비한 패들이 상하지 않게 하는 것일 터다.
하지만 게일도 호진도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부딪치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다.
그만큼 서로가 선택한 방향과 수단이 다르기 때문이었다.
게일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대로 자취를 감췄다.
동시에 괴물들이 괴성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오오오오오오오!
전쟁의 시작이었다.
‘우선은 지켜본다.’
게일이 참여하지 않았다면, 호진도 나서서는 안 됐다.
누가 먼저 참지 못하고 전쟁에 끼어드느냐가 승패를 가르는 중요한 지점이 될 터였다.
“발포!”
누군가의 외침과 동시에 대포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전쟁의 시작을 알린 것은 지옥을 연상케 하는 작열하는 대지였다.
─쾅 쾅 쾅쾅쾅!
땅이 흔들리고 매캐한 연기와 뜨거운 열기가 공기를 덮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대지가 폭발하는 포탄에 의해 땅이 뒤집혔다.
새카맣게 몰려오던 괴물들도 주춤할 정도의 화력이었다.
놈들에게 현대식 무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건 어느 정도 수준 이상의 괴물들에게 통용되는 이야기일 뿐.
십중팔구는 이 정도의 화력에 무사할 수 없었다.
“키에에에에에엑!”
괴물들의 비명과 고함이 한층 더 전장에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방어선의 최전방에서 충돌을 대비하던 강화도 헌터들 앞으로 한 무리가 다가와 섰다.
호진의 시선이 그중 가장 앞에 선 이들과 교차했다.
“저번에 호진님에게 진 빚은 이걸로 갚겠습니다.”
흑색 창 부대와 경호차장이 창을 괴물들을 향했다.
반면 온몸을 철로 덮은 부산 대표는 기다리지 않고 곧장 괴물들을 향해 달려들며 소리쳤다.
“호진님 보고 계십니까! 저도 요전번에 진 빚을 이걸로 갚겠습니다! 자 들어가자!”
“오오!”
대표의 성향을 닮은 그의 친위대가 대표를 뒤따랐다.
─콰직 콰지직
몸이 철로 된 부산 대표는 단순히 부딪치는 것만으로 몰려오던 괴물들 수십을 그대로 뭉개버렸다.
그 모습은 마치 전차를 연상케 했다.
그의 친위대 역시 단단한 방어력을 앞세우며 강물을 막아 세우는 댐과 같이 적들의 흐름을 끊어냈다.
그렇게 주춤하며 접근해온 적들에겐 흑색 창 부대의 창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리하고 날카로운 창들은 적들을 말 그대로 도륙 냈다.
덕분에 강화도 캠프 헌터들은 그 뒤로 흘러든 괴물들을 여유롭게 상대할 수 있었다.
물론 이곳은 전장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다른 곳곳에서도 비슷한 장면들이 연출되고 있었다.
“쿠어어어엉!”
거대한 곰과 같이 변한 드루이드가 앞발을 휘두르자 수십의 괴물들의 머리가 터져나갔다.
드루이드, 그러니까 곰은 말 그대로 괴물들을 찢어버리고 있었다.
─쩌정 쩡
다른 쪽에선 포대를 향해 접근하던 괴물들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그러자 얼어붙은 녀석들을 향해 화살과 창과 같은 투사체들이 쏟아져 그대로 깨트려버렸다.
협회장과 소속 헌터들이었다.
“가, 간다!”
폭탄 세례를 뚫고 나타난 거인을 향해 타이탄이 주먹을 뻗었다.
호연은 어눌한 발음과는 달리 섬광 같은 일격으로 거인을 꿰뚫었다.
단순히 만드는 것뿐만이 아닌 조종에도 일가견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 뒤를 이어 스미스가 이끄는 골렘들이 괴물들을 분쇄하며 전선을 유지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도 왔다네. 호진군!”
붉은 수염 에우두르가 하픈덤의 사람들과 난쟁이들을 이끌고 등장하는가 싶더니, 고장 난 골렘들과 타이탄에 달라붙어 순식간에 수리를 시작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가동을 시작하는 타이탄과 골렘들.
드워프들은 최고의 공병들이었다.
호진은 수천의 인형을 조종하는 수현과 눈을 마주쳤다.
호진이 걱정스레 바라보자 수현은 짧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아요. 아저씨. 이젠 헷갈리지 않아요. 전 아저씨처럼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울 거예요.”
수현은 그 말을 증명하듯 조금도 흥분하지 않았다.
전장의 상황을 빠르게 읽어내며 필요한 곳에 인형들을 지원 보내 전선의 유지를 도왔다.
그것은 말 그대로 타고났다고밖에 설명할 수 없는, 전장을 읽는 지휘 능력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놀랍게도 전선은 조금의 흩트림도 없이 유지되고 있었다.
치열한 격전이 계속해서 펼쳐졌지만, 그 누구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때였다.
하얀 가면을 뒤집어쓴 무리가 전열에 등장했다.
전부 열 명 정도밖에 안 되는 인원.
하지만 그 등장만으로 방어선의 분위기는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협회장을 비롯한 S 랭크 헌터들은 떨리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하나하나가 격을 지닌 존재들.
하얀 가면들은 그 자체로 사도에 준하는 힘을 지닌 자들이었다.
샴과의 전투를 겪은 이들은 더욱 그 반응이 클 수밖에 없었다.
하나로도 버거웠던 괴물의 존재감을 지닌 적이 열 명씩이나 모여 있었으니까.
그러나 호진은 그들의 등장에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의 맞은편에 도훈과 용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껏 억눌러왔던 힘을 터트리면서 말이다.
도훈은 손에 쥔 군번줄을 힘주어 움켜쥔 후,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건?”
용재의 물음에 도훈은 덤덤하게 답했다.
“순찰하다가 숲에서 발견했다.”
“운이 좋았네요.”
용재는 쓰게 웃으며 도끼를 어깨에 걸쳤다.
운 따위가 아님을 잘 안다.
적이 내려올 북쪽도 아니고 남쪽 숲에 있었을 감시대의 시체들을 우연히 찾았을 리가 없다.
도훈은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다들 나와 오랜 시간 함께한 녀석들이었다.”
“알죠.”
“전투가 끝나면 술이나 뿌려 주러 갈 건데 같이 가겠나?”
“좋아요. 빨리 끝내고 가죠.”
용재는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도훈이 자신을 동료로 여기지 않는다면 하지 않았을 제안이었기에, 용재는 상황에 맞진 않지만 기쁨을 느꼈다.
도훈은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의 손끝에 달린 은색의 실들과 단검이 차가운 빛을 흩뿌렸다.
두 사람은 거침없이 전장으로 향했고, 맞은편의 하얀 가면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향하는 전장에 있는 이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물러났다.
괴물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대부분 의식은 물론 두려움조차 거세된 존재들이지만, 그럼에도 몸에 새겨진 원초적인 본능이 경종을 울린 까닭이었다.
서로 인사 따위는 필요하지 않았다.
지금은 말 대신 검을 나눌 시간이다.
─카랑!
거리를 좁힌 그들은 순식간에 맞부딪혔다.
‘내가 가진 패는 전부 꺼냈다.’
호진은 그 싸움을 지켜보며 생각했다.
만약 적이 준비한 게 더 있다면 이 싸움은 호진에게 불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저벅 저벅
방어선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며 한 인형이 호진이 서 있는 감시탑을 향해 다가왔다.
들고 있는 검을 한 번도 뽑지 않았지만, 그 주위의 인간들은 감히 그를 향해 덤벼들 생각을 하지 못했다.
호진과 같은 존재.
지상에 현현한 신격을 아낌없이 드러낸 게일이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능청스럽게 말했다.
“이거야 원.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생각보다 다들 굉장하시군요.”
이에 호진은 놈의 앞으로 이동하며 입을 열었다.
“말했잖아. 따끔할 거라고.”
“두 번 따끔하면 아주 가겠는데요?”
“아니, 두 번도 필요 없지. 지금 보내줄 거니까.”
“무슨 말을 그리 살벌하게 하십니까. 섭섭합니다.”
장난 투로 말하고 있었지만, 게일은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호진을 위해 모인 사람들의 눈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었다.
대의를 위해 사람들을 강제로 희생시키며 이곳까지 도달한 게일의 입장에선,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는데도 기꺼이 목숨을 거는 호진의 사람들이 믿기지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눈이 부셔서 눈물이 흐를 것만 같았다.
자신이 지키고자 했던 인간이란 이렇게 가능성을 품은 아름다운 존재였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되어서 말이다.
그렇기에 게일은 호진에게 다시금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이라도 저희와 함께해 주십시오. 우리들이 힘을 합치면 이 세계는 물론이고 저쪽 세계의 강대한 신들조차 인간의 아래에 둘 수 있습니다. 저희의 손으로 신성의 시대를 끝내고 인간들의 시대를 여는 겁니다!”
호진은 그런 게일을 천천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무리라니까. 네놈이랑은 시작부터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꼬였어.”
“역시, 그런가요. 그럼…….”
─스륵
게일은 천천히 검집에 들어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이만 끝을 내볼까요?”
“좋지. 이젠 그 가면도 지긋지긋한 참이었다.”
호진 역시 마찬가지로 검을 들어 올렸다.
진정한 전쟁은 지금 시작되었다.
***
─카랑!
날붙이들이 부딪치며 가까스로 공방을 이어 나가는 도훈에게 용재가 소리치듯 물었다.
“아저씨! 저 부탁이 있어요!”
“뭐냐.”
하얀 가면들은 역시나 쉽게 상대할 존재들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열 명이나 되는 적을 상대로는 두 사람이라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저 ‘투신전’을 쓰려고 하는데요.”
“……뭐?”
순간 무슨 소리인가 고민하던 도훈이 딱딱하게 굳은 음성으로 되물었다.
본인이 잘못 들었으리라고 여기면서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도훈이 들은 것은 사실이었다.
“죄송한데 잠시 혼자서 시간 좀 끌어주실래요?”
“그게 가능할 리가…….”
도훈이 답하던 그때였다.
거대한 석상들이 조각된 거석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면서 지축을 뒤흔들었다.
그러곤 순식간에 용재와 하얀 가면 중 한 명이 그 안으로 모습을 감췄다.
“…….”
“…….”
하얀 가면들과 도훈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그 침묵을 깬 것은 도훈의 씹어 뱉는 듯한 중얼거림이었다.
“감시대원들 옆에 묻어 버릴 거다. 반드시.”
다음 순간 도훈을 향해 아홉 자루의 검이 날아들었다.
‘한 번밖에 못 쓰는데…….’
도훈은 이를 악물며 ‘소리 없는 죽음’을 사용했다.
─후웅
허공을 가르는 아홉 개의 검.
하얀 가면들이 당황한 듯 주변을 살피던 그때였다.
─퍼걱
어디선가 날아든 단조로운 창 하나가 그들 중 하나를 꿰뚫었고, 창에 맞은 하얀 가면은 그대로 절명했다.
“……어떻게 한 거지?”
하얀 가면 중 가장 높아 보이는 이가 묻자 창을 던진 도훈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미스틸테인. 그 창의 이름이다.”
“여태 힘을 숨긴 건가?”
“글쎄.”
숨기긴커녕 전력을 다했다.
하루에 한 번씩밖에 사용이 불가능한 스킬들이지만, 도저히 아홉 명을 상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전력을 줄이는 쪽으로 방향을 정한 것이다.
그때였다.
─툭 투둑
투신전의 밖으로 깨진 하얀 가면 하나가 떨어져 내렸다.
그리고 이어 뇌성벽력과 같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음!”
어느새 하얀 가면들 중 또 하나가 사라졌다.
투신전 안으로 끌려간 것이다.
남은 하얀 가면은 일곱.
도훈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 미소를 지으며 중얼거렸다.
“이젠 좀 해볼 만하겠군.”
그 중얼거림에 하얀 가면들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